어느 연대장의 죽음
[산하의 오역] 제주....김익렬과 김달삼, 박진경
    2013년 04월 04일 1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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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쯤,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육군 11 연대본부에서 총성 두 발이 울렸다. 곯아떨어졌던 경계병이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희생자는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었다. 그는 중령에서 대령으로 갓 진급하여 제주 유지들과 함께 축하연을 치르고 귀대한 터였다. 두 발은 정확히 머리와 심장을 뚫었다. 위생병이 달려들어와 살폈지만 이미 연대장은 사망한 후였다.

위생병은 눈물을 흘리며 연대장님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연기였다. 위생병 손석호 하사는 잠든 연대장 방 안에 숨어들어 M1소총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스물 여덟살의 패기넘치는 연대장 박진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를 죽인 이들은 3대대장 문상길 중위 이하 몇 명의 부하들이었다.

그럼 그들은 왜 박진경을 죽였는가. 일단 그들은 남로당 세포들로서 제주도 4.3 봉기의 지휘자였던 김달삼의 지령으로 봉기의 진압군 사령관격인 박진경을 죽였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좀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일단 박진경이 부임한 것은 1948년 5월 6일이었고, 그 전임 연대장은 김익렬 대령이었다. 이 사람으로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김익렬 대령은 제주도 주둔 9연대장으로서 4.3을 맞는다. 6.25 때 혈전을 치르고 살아남아 중장으로 예편했던 그는 사망하기 전 흡사 고려 말 초야에 묻힌 충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때 공개하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것은 4.3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에 따르면 4.3은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출동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악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폭동”이었다. 그는 그 신념대로 일을 처리하려 든다. 즉각 토벌을 호령하는 미군정에게 “극렬 분자는 2-300명에 불과한만큼 화평 선무 귀순 공작을 펴 보고 그 뒤에 토벌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한 것이다. 즉 그에게 봉기한 이들은 어쨌든 달래고 설득해야 할 국민이었지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제주도내 국군의 최고 지휘관은 직접 봉기자들과의 협상에 나선다. 목숨을 건 협상이었다. 그는 ‘수괴’ 김달삼과 마주하려 했지만 봉기자들이 그를 믿으려 들지 않자 “내 가족을 인질로 데려가라.”고 선언한다. 세상에 이런 군인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 그에 따른 김달삼의 대답도 걸작이었다. “노모를 산에 잡아 둘 수는 없다.”

김달삼(왼쪽)과 김익렬(사진=제주평화공원)

김달삼(왼쪽)과 김익렬(사진=제주4.3평화기념관)

김익렬은 무장대의 은신처로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김달삼과 만나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그 3일 뒤 오라리 사건이 터진다. 이는 평화협상을 깨기 위해 경찰의 비호 아래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무장대에게 뒤집어 씌워졌고, 5월 5일 서울에서 딘 군정장관을 비롯하여 조병옥, 안재홍 , 송호성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제주도로 온다. 조병옥은 강경론을 폈고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김익렬에게 뜻밖의 공박을 가한다. “저 자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로서…… ”

이에 흥분한 김익렬은 단상에 올라가 조병옥의 목을 조른다. 이 개새끼야. 우리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조병옥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일대 육박전이 벌어지고 안재홍은 그저 통곡하고 딘 소장은 콰이어트! 콰이어트! 만 외치는 난장판이었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초토화해서라도 공비들을 토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딘 소장도 이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딘 소장은 김익렬을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그 자리에 박는다. 그리고 새로이 11연대를 구성한다. 박진경 중령은 부임 직후 훈시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군인 특유의 과장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취한 행동은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중산간 지역의 주민들을 쓸어담다시치 체포한 것이었다. 게릴라와 인민이 물과 고기의 관계라면 물을 말리겠다는 심사였다.

부임한지 불과 한 달 열흘(48년 5월 6일~6월 18일)만에 대부분이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 브라운에 따르면 “제주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과감한 행동은 미군정의 격찬을 받았고 박진경은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그 축하연 밤에 그는 죽음을 당한다. 그의 장례는 육군장 1호로 치러진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은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 (박명림)

암살자들의 수괴는 문상길 중위였다. 그는 남로당 세포였고 여맹 위원장 딸의 애인이었다.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의 투사였는지, 아니면 태풍에 휩쓸린 제주도 사람들을 동정하고 상관을 죽임으로써 그를 막으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당 중에는 제주도 출신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용케 혐의 대상에서 벗어났지만 뜻밖의 투서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문상길 중위가 범인이라는 투서가 수사대에 제보된 것이다.

문상길 중위는 모진 심문 끝에 범행을 인정했다. 그의 가슴에 부적을 넣고 있었는데, 붉은 인주가 피부에 번져 있는 것을 보고 심문관은 “상관 죽인 뒤에 불안해서 그 부적 갖고 있었던 거지?”라고 추궁을 했고 문 중위는 인정을 했다고 한다.

부적을 품에 안고 있었을지언정 문상길은 기독교인이었고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의 최후진술을 보면 그렇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문상길은 처형된다. 대한민국 성립 후 사형 1호였다. 해방 공간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슬픈 것이 결국은 모 아니면 도 라는 논리가 칼날같이 곤두선 가운데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버티고 서서 널려 있는 쇳가루같은 인간들을 휩쓸고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나라가 빨갱이 만들고 지주가 공산당 만들던” 시기, 나라는 빨갱이들에게 야차처럼 무서웠고 지주들은 공산당 비슷한 이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빨갱이들 역시 “민족반역자 처형하고 무산대중의 조국 건설”을 하기 위해 협상을 하기 보다는 목전에 다다른 해방을 위한 무장봉기와 무력항쟁을 선호했다. 결국 김익렬 같은 이들의 설 곳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결국은 박진경과 문상길로만 남게 된 것이다.

김익렬이 자신의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조병옥에게 육박해 들어갔던 그 현장에 있던 사람 가운데, 조병옥은 제주도 학살의 책임을 두고두고 면치 못할 위인으로 남고, “연대장 제발 놓으시오. 이 무슨 망신이오.”라고 통곡하던 안재홍은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김익렬의 상관이자 김익렬을 만류했지만 뜯어말리지는 않았던 송호성은 국군 지휘부의 무신경 속에 6.25 발발 직후 서울에 남겨지고 인민군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나마 김익렬 대령이 한국군에 남아 나름의 공을 세우고 중장으로 예편, 종생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1948년 6월 18일 한 고급 장교가 죽었다. 그 죽음은 그때에만 남아 있지 않다. 한 사회의 내부 구성원들 사이를 극단과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묘미이자 의무라고 할 때, 그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우리 형편 때문이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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