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국가'의 명암
        2013년 04월 04일 1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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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국내의 공론장에서 “극우”를 제외한 나머지 스페크트럼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핵심어는 아마도 “복지국가”일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공주님과 같은 유형의 극우들이 그냥 “복지”를 지겹도록 들먹이지만, 그들보다 약간만 더 왼쪽으로 가면 민주당이든 통진당이든 진보정의당이든 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한 술 더 떠서 “복지국가”를 이야기합니다. 아, 듣다 보면 꼭 박정희와 장준하가 공유했던 60년대의 “근대화” 같은 담론들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물론 일면으로 이해가 갑니다. 우리에게 과연 어떤 “국가”가 있어왔습니까? 안보 국가, 반공 국가, 경찰 국가, 요즘 같으면 “신자유주의형 경찰 국가” 정도? 우리에게 “국가”와 가장 어울려 보이는 단어는 아마도 “폭력”일 것입니다.

    “국가 폭력”, 이건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이런 국가에서 살다 보면 자연히 폭력만 행하지 말고 우리에게 뭔가를 “해줄” 국가를 꿈꾸게 됩니다.

    더군다나 양육비, 교육비, 그 중에서는 특히 사교육비가 살인적으로 비싸서 아이 낳기가 두려운 나라, 40%의 노인들이 가난하게 살아 노후가 두려운 나라, 이런 나라에서는 “복지국가”는 그저 유일무이한 현실적인 “처방”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도 실은 이와 같은 정서를 십분 공유합니다. 당연히 양육, 의료, 교육, 노후가 제대로 보장돼 있는, 즉 부분적으로나마 탈시장화된 사회야말로 정상적인 사회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회 생산 영역 전체의 탈시장화, 즉 이윤추구적인 생산/소비 방식의 본질적인 변혁이라면, 일단 부분적이라 해더라도 그 어떤 탈시장화도 환영할 만하고, 또 투쟁해서 쟁취해야 할 매우 중요한 “중간 목표”로 인식되어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복지국가” 담론은 분명히 그 본질상 진보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칼 카우츠키와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독과점의 극에 가면 자연히 사회주의로의 이동의 가능성이 열리겠다”는 식의 공상을 꿈꾸지 않고 사회적 현상들을 변증법적으로 관찰한다면, 카우츠키 류의 “속물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늘 놓치곤 하는 “수정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노동자들이 복지국가를 쟁취하는 것이 “계급적 역량”의 부분적 승리지만, 또 동시에 이와 같은 부분적 승리는 – 사회적 생산에 대한 자본의 통제가 여전하다면 – 우리 계급의 체제내화를 의미할 것이고, 체제가 늘 노리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포섭의 기제들이 어마어마하게 성장될 것을 의미할 것이기도 합니다.

    좀 추상적이죠? 그러면 구체적인 사례들을 한 번 흝어봅시다.

    아직 복지국가도, 이렇다 할만한 복지도 잘 없는 국내에서도 이미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상층부 관료들은 사실상 “계급투쟁” 내지 “계급연대”를 포기한 대신에 “조합원 몫의 늘리기”에만 집중합니다. 그 조합원들 사이에 비정규직이 들어설 틈도 없고, 또 지금 현대차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보이겠지만, 비정규직들의 투쟁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정규직 노조 관료들의 절대적으로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우리 조합원의 몫”, 즉 “우리/나의 소득”만을 늘리려는 그들의 태도는 이미 자본주의 논리를 딱 그대로 대표합니다.

    노조의 경영참여마저도 불가능한 국내에서도 이미 “주류” 노조의 체제내화가 이 정도로 발전(?)됐는데, 노조 간부와 사용자측이 “파트너”가 되어서 이윤추구적인 기업을 사실상 같이 운영해야 하는 진정한 복지국가에서는 과연 노조 간부층의 입장은 어떨까요?

    당연히 노르웨이의 최대 기업인 스타트오일 (국영 석유회사)의 노조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조합원의 임금 인상과 복지” 등을 위해서 커다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기업이 이윤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자연환경 파괴적인 로포텐 섬 (관련링크) 근방의 유전 개발 문제라든가 알제리아와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실상 약탈) 참여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환경 본위의, 국제연대 본위의 입장을 취하겠습니까?

    르포텐 섬 내의 평화로운 한 어촌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르포텐 섬 내의 평화로운 한 어촌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조직노동과 자본은 비록 각각의 “몫”을 놓고 늘상 긴장을 하고 있지만, 또 동시에는 (주)노르웨이 운영에 있어서는 “동업자”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자본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앙골라나 방글라데시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공범”은 아닐까요?

    노르웨이의 굴지의 재벌인 통신사 텔레눌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별다른 안전장치없이 일해야 하는 13세 아이들에게는 텔레눌의 “해외 경영”을 반대한 적도 없는 그 노조는 과연 무엇일까요?(관련링크)

    회사의 공범이 되는 노조 간부들만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간부들을 일단 계속 선거해서 뽑는 일반 사원들은 그렇다면 과연 “혁명사상”의 소유자일까요? 노조의 역량이 상당해서 계속 임금이 오를 수 있는 복지국가의 노동자들이 그 임금의 잉여분을 과연 어떻게 쓸까요? 일단 그들이 “집”부터 살 것입니다.

    20년전만 해도 63%의 노르웨이 가구들이 한 채나 그 이상의 주택을 소유했는데, 지금은 약 80% 정도입니다. 절대 다수가 “집”을 소유하는 곳에서는 ㅡ 다수가 가장 원하는 것은? 맞다, 바로 “집값이 오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민주의적인 복지국가 메카니즘 안에서 임금과 소비력이 계속 오르는 만큼 집값도 꾸준히 오르는데, 거기에다가 “투기”라는 요인이 가세돼서 사실은 아주 많이 오릅니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사실 약 430% 정도 오른 것이죠. 미국보다는 약 6배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은 절대 다수가 더더욱더 잉여가 생겨 예컨대 매년 수차례 해외여행 다니는 것은 인제 전국적인 “관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타국들의 저물가를 이용해서 거기에서 일년에 몇주씩 “멋지게 휴식하는” 복지국가 시민들에게는 과연 “국제무산계급 연대” 사상의 편린이라도 많이 남을까요?

    참, 노르웨이 전체 인구 중에서는 약 7%는 주식을 보유합니다. 오슬로 같으면 약 8% 정도인데, 가구로 치면 약 20%의 가구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가 고임금 노동자들입니다. 집과 주식을 보유하고, 매년 몇번씩 해외여행을 다니고 전세계에 대해서는 무비의 우월감을 늘 느끼는 복지국가의 노동자는 과연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 예컨대 임금노동이 인간의 자기실현을 불가능케 만든다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집중할 수 있을까요? 자기 사회의 주변부에서의 가난과 착취와 소외라도 제대로 똑바로 볼 수 있을까요?

    역설로 들리지만, 실은 가장 내구력이 있고 가장 튼튼한 자본주의는 바로 다수를 공범이랄까, 배부른 감옥의 “수인 겸 간수”랄까 하여튼 체제의 순량한 “일분자”로 만드는 복지자본주의입니다.

    복지국가는 우리 계급의 일정한 “중간적 승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계급을 일정 정도로 자본화시키기도 하죠. 물론 이것도 시기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는 복지부문은 불가피하게 축소돼 우리 계급의 전투성은 그 과정에서 쉽게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단, 노르웨이에서는 아직도 그 과정은 거의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수마를 이겨내지 못해 일단 침대의 부름에 응해야 하겠지만, 나중에 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 문제에 대해 상론해볼까 합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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