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주의'를 경계한다
    [말글 칼럼] '개인'의 부도덕과 '사회'의 부도덕을 갈라내야
        2013년 04월 03일 05: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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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한 페이스북 친구한테서 메시지를 받았다. 요즘 터져나오는 ‘도덕성’에 관한 논란이 ‘도덕주의’가 돼가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고종석의 발언이나 공직자들의 부도덕성, 거기 이외수의 사생활 문제를 떠올리며 상당히 공감했다.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거론되는 방식, 그에 따른 결과가 문제라 여겨서다.

    입을 틀어막는 도덕주의

    누구나 최초로 발언할 때는 어설프다. 노련하다 생각해왔던 고종석도 그랬다. 그래 원래 제기하려던 문제의식이 파묻혀버린 측면도 있다 본다. 그만큼 성적인 문제를 언급할 때는 조심스럽다.

    유난히 이런 문제가 자주 터져 나오는 데가 연예계다. 아예 ‘연예가 중계’ 같은 프로그램까지 만들어놓고 캐낸다. 대중은 비난하면서도 눈을 못 뗀다. 솔직히 연예인과 일반인은 노는 물이 다르다. 심지어는 DNA가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다. ‘끼’라는 걸 ‘도덕’에 가두면 어떡하나. ‘일반적’인 데 갇힐 것이었으면 연예인 되기 힘들었을 게다. 두둔하려는 게 아니고, 난 그들의 사생활에 별 관심 없다. 연기 보는 거지 도덕군자 구경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는 너는?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하다. 술 처먹고 벌인 사건이 한둘일 것이며, 그 땜에 괴로웠을 일 또한 한둘일까? 지금껏 사는 게 용할 정도다. 이런 부끄러움을 의식한다면 이런 글 쓸 수가 없다. 그래도 쓴다. 부끄러움과 발언은 별개고, 그 부끄러움이 발언을 막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여겨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쓰려는 내용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사정, ‘영웅’들의 여성편력 따위에 기대고 싶지는 않다. 할 말만 하고 싶다. 주제를 명확히 나누자는 거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세상을 향해 발언할 때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걸 그의 삶으로 평가하는 게 정당한가, 이게 내 문제의식이다.

    그냥 그가 하는 말만 받으면 된다. 그뿐이다. 그가 정치인일 것이면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되고, 그가 철학자일 것이면 철학적으로 따지면 된다. 그에게서 얻을 게 도덕이 아니잖나.

    하니 기대치만큼만 기대하자. 소설가에게서 뭘 그리 많은 걸 기대하나. 마치 어물전에서 소고기 상했다 따지는 격이다. 유럽 모장관이 미혼모되고 당당하게 ‘이 아이 아빠가 누군지 묻지 말라’고 한 것이 멋지고, 그걸 더는 따지지 않는 풍토도 부럽다.

    발언의 자격은 그 주제 아닌 것에서 나와선 안 된다. 그가 정치인이면 정치로, 예술가면 작품으로, 과학자면 발견으로 발언하고 우리 역시 그렇게 판단하면 그만이다. 수학자의 사생활을 추적하여 그의 실적을 가늠하는 건 어리석을 뿐더러 인류에게도 손해다.

    그래 도덕에서 가장 부자유한 자는 종교인이다. 그렇다고 억울해할 것은 없다. 도덕, 바로 그것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이고, 도덕이 그 자격 요건이니까. 이를 빼면, 자격은 도덕 아닌 실력에서 나오는 거다.

    공직자의 부도덕 보는 법

    지금 이 사회는 온통 도덕 투성이다. 박근혜가 꼽은 그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건 단지 그들의 부도덕성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이 그 자리랑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이 시작되고, 그것은 이윽고 부메랑이 된다. 문제제기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지적할 걸 분명히 하지 못한 까닭이다. 자격이 없는 것이지, 부도덕해서만은 아니다.

    평소에 따지지 않던 걸 하필 지금 따지는 까닭이 뭐겠는가? 물러나기만 하면 평소대로 멀쩡해지는 이치를 생각하면 금세 밝혀진다. 부적절한 것이다!

    그들의 부도덕은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데 있다. 미국 정보부에서 일하던 놈이 한국 IT산업을 관장하려 든다. 국민의 재산이어야 할 것을 빼돌린 놈이 나라 곳간 열쇠를 쥐려 든다. 도둑 지키겠다는 놈이 도둑과 같은 편이다. 굳이 로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종이 주인 재산을 훔치려드는 것이고 게다가 월급까지 받겠다는 것 아닌가. 이중의 도둑질이고 천하에 부도덕한 놈이다. 바람 피우는 거나 문자 주고받은 걸로 따진 게 아니었잖나?

    그 위에 더 큰 부도덕이 있다. 이런 놈들 뽑아놓고 걸리니까, 마치 도덕적인 문제인 양 몰고 간다. 무능력, 부자격을 도덕 문제로 환원하여 제 무능력을 덮으려는 거다. 하여 내가 볼 때 가장 부도덕한 이는 잘못 뽑아놓고 되레 큰소리치는 대통령이다. ‘종 중의 종’인 주제에.

    부도덕이든 뭐든 결과적으로 막아낸 데 만족하는 게 문제다. 왜 거부했는지, 왜 그는 아닌지가 명확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따질 건 부도덕이 아니다. 잘못 뽑은 것이고, 그걸 전혀 다른 걸로 덮으려는 거다. 정말로 부도덕, 불법일 것이면 잡아들여야 마땅한데, 그건 아예 꿈도 꾸지 못하잖나. 이것이 이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가 어리석다는 증거다.

    도덕주의와 파시즘

    ’00주의’란 ’00’을 기원이자 목표로 삼는 거다. ‘자본주의’면 자본이 기원이자 목표고, ‘자유주의’면 자유가, ‘민주주의’면 ‘인민주권’이, ‘민족주의’면 ‘민족’이 지상과제란 말이다. 그래 가장 위험한 게 ‘민족’, ‘가족’ 같은 거란 게 내 생각이다.

    그럼 ‘도덕주의’는? 일상적으로 지켜야할 도덕을 강조하는데 누가 뭐라나? 그렇지만 이게 최상의 이념 내지 이데올로기가 돼버릴 것이면? 모든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이 잣대로 따질 것이다. 하여 그 나름의 주제나 가치는 ‘도덕’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재단되고 만다. 파묻히거나 비틀리거나.

    나찌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

    나찌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

    나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 인간 말종. 줄기차게 떠들어 믿게 만들었던 고약한 인간. 그의 핸디캡을 커버할 단 하나, 뭔가에 몰입하고 거기 다수를 빠뜨리는 것. 그는 참말 줄기차게 떠들었다. 이윽고 그 단 하나가 신념, 교리가 되었고, 모두가 빠졌다. 그의 무기, ‘니가 그런 말할 자격 있나?’

    나치즘을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의 등장 경로가 그랬다. 아우슈비츠 담벼락에 씐 표어는 ‘정직은 인생의 보물’, ‘웅변은 은, 침묵은 금’, ‘이 건물 안에서는 모자를 벗을 것’ 따위였다.

    강제수용소 시스템의 최고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좌우명도 ’무엇을 하든지 예절 바르게’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렇게 예절 바르게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독일인들은 표어만 쳐다보고 거대한 악을 묵인했다. ‘평범한 악’은 그렇게 작동한다.

    ‘도덕주의’를 경계함

    내가 부도덕하다는 것과 사회가 그렇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데 개인들은 누군가의 부도덕을 심판함으로써 제 부도덕을 덮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걸로 마치 사회가 깨끗해지기나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이른바 ‘희생양’ 의식. 누군가를 비난하여 제가 벗어나려는 게다.

    노무현을 죽게 한 것은 이명박만이 아니다. 그에게 도덕적 굴레를 씌워 손가락질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한몫했다. 그를 희생양 삼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막상 죽고 나니 잘못된 희생양인 듯하여 그토록 유난스러운 조문행렬을 이룬 거다. 미안해서, 정말 미안해서.

    개인의 부도덕과 사회의 부도덕, 이걸 갈라내는 게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일 듯싶다. 내 부도덕은 반성과 이후 삶으로, 또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걸로 갚을 수 있다. 허나 도덕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아무도 말을 못하게 된다. 그의 말과 삶이 발달한 정보망에 고스란히 걸릴 것이고, 하여 그는 만연한 도덕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입을 다무는 수밖에, 죽은 듯이 사는 수밖에.

    그러는 사이, ‘거대한 악’이 스멀스멀 나올 것이다. ‘죄 없는 자 누구뇨?’라면서, ‘니가 그런 말할 자격 있냐?’ 되물으면서. 도덕주의가 만연할수록 부패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나라꼴이 딱 그렇다. 그 짐을 지금 우리가 지고 있고, 우리 새끼들은 더 큰 짐을 질 것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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