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보증 잘못 서 고생
[어머니 이야기-11] 외삼촌 이야기
    2013년 04월 01일 02:55 오후

Print Friendly

1972년쯤 어머니 고향인 경북 군위군 소보면 사리동 새기터에서 살던 큰 외삼촌이 서울에 올라왔다. 큰 외삼촌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 군대에 갔다.

외할아버지가 55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외삼촌은 술병에 빠지고 의처증이 생겼다. 군대를 가야 고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 와도 고쳐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야야, 누가 그러는디 니 동상은 객지 생활을 해야 낫는다고 한다.” “그라몬, 내가 서울에 데리고 가지요.” 큰 외삼촌은 우리 집 지하방에 먹고 자고 했다. 그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나중엔 시골에 살던 큰 외삼촌 식구들 모두가 서울에 올라왔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에서 구멍가게를 열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었다. 하지만 큰 외삼촌은 다시 술독에 빠졌다. 어머니에게 차비를 달라고 하면서도 술 마실 돈은 다른 주머니에 숨겨 놓고 다녔다. 큰 외삼촌은 술을 마시면 아내를 때리고 집안 물건을 던지고 부셨다.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이 낫는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다했다. 쥐꼬리를 삶아 먹이기도 하고 호랑이똥을 구해다가 삶아 먹였다. 그래도 낫지 않았다. 병이 갈수록 심해져서 외삼촌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어느 점쟁이가 하는 말이 어머니 할아버지 묘를 옮겨야 큰 외삼촌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외할머니와 작은 외삼촌이 시골 새기터에 내려가 외증조할아버지를 묘를 팠다. 묘를 파보니 눈 코, 구멍이란 구멍엔 칡넝쿨이 엉켜있었다.

돈이 없어 사람을 불러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작은 외삼촌이 가위로 칡뿌리를 한나절 동안 잘랐다. 나무로 자를 재서 뼈를 나란히 간추리고 상자에 담았다. 새기터 앞산에 다시 묻었다. 그 뒤로 큰 외삼촌 병은 차차 나아졌다.

큰 외삼촌은 집장사를 했다. 그때 한참 건설 경기가 좋았다. 집을 사서 팔고 다시 집을 사면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1979년, 중동 석유 값이 갑자기 오르며 건설 경기가 뚝 떨어졌다. 세계 공황이었다. “박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경기가 갑자기 안 좋아졌지. 동생은 세 들어 사는 사람들 전세금도 못 줄 정도로 망했어. 홀딱 까먹고 빈털터리가 되었지.”

어느날 큰 외숙모가 어머니를 찾아 왔다. 어머니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동생 하나 살리겠다고 덜컥 보증을 섰다. 큰 외숙모는 새벽잠을 설치며 우유장사를 했다. 하지만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었다.

그때 쓴 돈은 사채였다. 빚을 갚지 못하자 우리 집에 압류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 기계와 집에 있는 가구마다 딱지가 붙었다. 어머니는 절망했다. 동생 하나 잘못 두어서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 어머니는 달마다 은행에 가서 그 빚을 다 갚았다.

사채업자를 다룬 드라마 '쩐의 전쟁'의 한 장면

사채업자를 다룬 드라마 ‘쩐의 전쟁’의 한 장면

어느 날 사채업자가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종로에 있는 허름한 건물 5층에 올라갔다. 계단도 삐꺽거리고 어두워서 무서웠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큰형과 함께 갔다. 큰형이 말했다. “엄마, 만약에 사채업자가 엄마를 해치려고 하면 바로 소리 지르고 뛰쳐나와요. 내가 경찰에 알려서 그 놈들 다 잡아 넣을게.”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이 있어서 든든했다.

어머니가 사무실에 들어가니 다리를 책상 위에 떡 올려놓은 사람이 말했다. “어이, 요즘은 파리들만 날리고 장사가 안 되네.” 그는 어머니에게 콜라 한 잔을 주면서 인감도장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빚을 다 갚았기에 다 갚았다는 종이에 도장을 찍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백지에 인감도장을 찍었고 돈을 낸 영수증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은행에서 받은 영수증을 주고 집에 돌아왔다.

다시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라 왔다. 어머니는 소송을 했다. 없는 돈에 변호사를 썼고 그 빚만큼 공탁금을 법원에 걸었다. 사채업자들은 돈놀이에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빚을 다 갚은 영수증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나는 아(아이)를 업고 은행에 갔어. 은행 문이 닫혀 있어서 뒤쪽 샛문으로 겨우 들어갔지.” 은행 여자 직원은 친절하게 어머니를 도와주었다. “아주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다시 찾아서 모두 복사해 드릴게요.” 어머니는 법원에 그 영수증을 냈다.

하지만 재판에서 이길 수 없었다. 백지에 찍은 인감도장은 빚을 안 갚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다행히 이자는 주지 않고 공탁 걸었던 원금만 사채업자에게 뺏기고 재판을 마쳤다.

어머니는 그 일을 겪고 나서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동생을 감옥에 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큰 외삼촌은 술병이 더 도졌다. 아침이 밝으면 검은 봉지에 맥주 두 병을 들고 찾아오는 날이 많았다. 식구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날도 늘었다. 큰 외삼촌을 용인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입원이 아니라 가둔 것이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 큰 외삼촌 식구들은 큰 외삼촌을 속이고 멀리 보냈다. 어쩌면 죽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큰 외삼촌이 없는 외갓집은 잠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척 마음이 아팠다. 애지중지 하는 큰동생을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보내 버렸으니 누나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몇 해 뒤 큰 외삼촌은 집으로 돌아왔다. 술병은 많이 고쳐졌다. 하지만 사람이 숫기가 없고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언제 또 다시 자신을 감옥 같은 정신병원에 쳐 넣을지 모르니 가까운 사람들조차 믿지 못했다. 어머니는 큰 외삼촌 식구들을 영세민으로 해서 상계동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얻도록 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서 외할머니를 비롯한 예닐곱 식구들이 살았다. 그곳에서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고모, 고모, 할머니가 숨을 안 쉬어. 아버지가 안고 있는데 숨을 안 쉬어. 고모 어서 오래.”

어머니는 한달음에 상계동 집에 갔다. 그땐 이미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병풍을 쳐 놓고 있었다. “아이고~ 어쩌나 평생을 병원 한 번 데려가지 않았는데. 우리 엄마 이렇게 죽으면 어떡해.” 어머니는 당신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울었다. 평생을 자식들한테 호강 한 번 받지 못 하고 돌아가시게 해서 어머니는 더욱 슬펐다.

어머니는 장례 치르는 버스값을 댔고 안동에 사는 이모는 외할머니 관값을 대었다. 어머니는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 삼우제를 지내러 동생 집에 와보니 밥이라고 해 놓았는데 찬밥이었다. 큰 외숙모는 방금 밥을 했다고 하는데 다 식어 있었다. 어머니는 화가 났다. 그 일이 있고 나선 친정엔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 큰 외삼촌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다시 가슴이 무너졌다. 서울에 와서 남부럽잖게 살고 싶었는데 식구들에게 미움만 받고 떠난 동생이 불쌍했다.

어느 날 친정 조카에게 전화가 왔다. “고모, 앞으로 우리 집안일에 고모가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십 년이 넘도록 친정집엔 발을 들여 놓지 않는다. 가끔 친정 조카들이 설에 우리 집에 오기도 하지만 그냥 한 번 웃어주고 만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불교를 믿는데 친정 식구들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일요일마다 교회 나가는 모습이 영 마음이 차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나마 막내 동생이 있어 덜 외롭다. 큰 외삼촌은 술병에 걸려 어머니를 괴롭혔지만 작은 외삼촌은 늘 어머니 일을 도와주었다. 작은 외삼촌은 배운 것 없이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에는 한량이 되서 날마다 낚시를 하러 다니고 내기 바둑을 두러 기원을 들락거렸다. 그러다 고물장사를 벌였다. 낡은 차를 얻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철을 주워 먹고 살았다. 혼례도 치르고. 우리 집에 망가진 것이 있으면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와서 고쳐주었다.

2013년 3월 30일 날은 봄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겨울을 지나는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