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샌델에 열광하는 사회
    공동체적 보수주의 대한 향수?
    [비판과 비평]<정의란 무엇인가>의 사회적 정치적 쟁점1-②
        2013년 03월 29일 11: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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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사회적 정치적 쟁점 1-1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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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비판 :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역설

    자유주의 비판은 곧장 현대 민주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샌델은 현재 미국 민주주의는 기능장애를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샌델은 [불만]에서 미국 공화정의 역사를 논하면서, 공화주의적 이상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패배함으로써 정치과정은 점차 형식적인 것이 되고 대중들은 불만에 사로잡혔으며, 도덕적 불관용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공화주의가 20세기 진보적 자유주의에 패배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샌델은 초기 미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연방헌법의 기본정신은 공화주의적 이상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불만], 181쪽) 물론 절차적 공화정에 대한 요구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합중국은 기본적으로 시민적 덕성, 공공선, 참여 자치의 원리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불만], 190쪽)

    초기 공화정에서 토머스 제퍼슨이나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규모 산업을 반대하고 자율적인 시민들의 경제를 옹호한 것도 이와 같은 자치와 참여, 공동체적 책임의 윤리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제퍼슨과 같은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대기업의 성장을 반대했고([불만], 202쪽), 대부분의 시민이 거대 기업의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우려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 자체가 인격적 예속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할 주체적 능력을 상실시키고, 시민적 책임과 공공선을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불만], 246쪽)

    그러나 샌델은 20세기를 넘어 오면서 점차 이와 같은 공화정의 이상은 약화되고 절차적 공화정의 원리와 중립적 국가관이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논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이게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야말로 미국 정치를 공화주의적 이상으로부터 절차적 공화정으로 바꾸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불만], 342쪽)

    정부는 더 이상 시민적 덕의 함양과 참여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자율성과 사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경제적 안정과 복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루즈벨트의 입장이었다.([불만], 373쪽)

    복지는 덕의 함양보다 시민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의 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복지가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불만], 361쪽) 개인들은 이와 같은 물질적 토대 위에서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면 되었다. 종교적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 도적적 판단에 있어 정부는 더 이상 개인의 삶에 관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불만], 372쪽) 시민사회는 상이한 가치관, 이념, 문화로 균열되어 있지만 이런 다양성은 민주주의 사회의 꽃으로 칭송받게 된 것이다.

    샌델에 따르면 이는 시민사회의 성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와 대중의 불만을 초래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개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삶을 선택하면서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해 판단을 중지했으며, 각자는 서로 독립된 채 타자에 대한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공동체는 해체되고 서로 남남이 되었으며, 공동의 이상, 교류, 상호협력은 냉정한 개인주의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케인즈주의적 자유주의, 미국식 복지국가가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불만], 401쪽)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균열은 대중들에게 삶에 대한 만족감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력감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더불어 사회가 점차 자신들이 참여해서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이 어찌할 수 없는 세력들이 조종하는 공간이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복지는 참여의 열정과 공동체의 책임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에만 관심을 두는 시민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동체적 이상을 타락시키는 수단이 된 것이다.

    복지국가에서 만연한 개인의 고립감, 불만, 소외는 레이거노믹스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문화적 조건이었다고 샌델은 쓰고 있다. 레이건은 로버트 노직류의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만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적 보주수의에 토대를 둠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불만], 409쪽) 공동체주의적 보수주의란 낙태, 동성애, 성적 관용, 여성 해방주의 등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일컫는다. 이들은 풀뿌리 보수주의를 통해 오염된 문화로부터 공동체와 지역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급진적 운동으로 성장했으며, 이 조직적 틀로 신우익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불만], 410쪽)

    한 백인 공동체 보수주의자의 변화를 나름 멋지게(?) 보여준 영화 '그랜토리노'

    한 백인 공동체 보수주의자의 변화를 나름 멋지게(?) 보여준 영화 ‘그랜토리노’

    샌델은 공동체주의적 보수주의가 공화주의적 이상을 부분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절차적 공화정과 문화적 다원주의에서 무기력해진 대중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불만], 413쪽) 물론 샌델 자신은 이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보수주의보다 민주당에 더 가까우며, 만약 민주당이 정치적 지도력을 갖추고자 한다면, 공화주의의 공동체주의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 적절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불만], 435쪽) 샌델은 오바마가 그와 같은 긍정적 변화를 보인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긍정적 미래를 관측하고 있다.

    만물의 상품화 비판 : 소박한 도덕경제

    샌델의 [정의]는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를 휩쓸고 간 이후 이 지역에서 있었던 가격폭리처벌법에 관한 논쟁에서 시작한다.([정의], 13쪽) 허리케인으로 인해 붕괴된 집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주택개량/복구 사업자들이 시민들의 급박한 사정을 활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두고 정치적, 사회적 논쟁이 플로리다 주에서 진행된 것이다. 가격폭리처벌법이 과연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핵심적인 쟁점이다.

    시장의 자율성을 인정한다면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됨으로 가격 폭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동료시민들의 급박한 사정을 활용하여 평소보다 몇 배 더 높은 가격으로 주택을 복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정의], 16쪽) 시장이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며 공동체는 도덕적 규범을 넘어서는 과도한 폭리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쟁점을 보다 확장하면 시장은 도덕적 통제 속에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로 곧장 이동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의]는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덕 있는 삶을 옹호하고 있다. 덕 있는 삶이란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며 동료시민에 대한 책임의식과 도덕적 책무를 느끼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공공선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사적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사적인 이익은 공동체 전체의 유대 강화를 방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만물을 상품화’하는 자율적 시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시장원리에 따른다면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발적 의지에 따른 거래는 한계가 없다. 군 복무도 돈으로 대체할 수 있고([정의] 122쪽), 신장도 팔 수 있으며([정의], 103쪽),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정의], 132쪽). 시장은 모든 것을 현금의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마이더스의 손인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도덕적 판단과 충직이라는 공동체의 의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상품 거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군 복무는 시민의 고유한 의무이며, 신체는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의 고유한 목적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자발적 성매매라고 해도 윤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공화주의적 덕목에서 보자면 시장은 통제되고 제한되어야 한다. 만약 윤리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시장에는 온갖 부패가 만연할 것이고, 돈의 지배는 무제한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다.

    [정의]에 따르면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것과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이런 관점을 보다 심층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죽음’은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돈으로 제공되는 선물은 선물의 본래 목적과는 무관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대리 줄서기를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윤리가 배제된 거래는 정당성의 위기를 낳고 시장 자체에 대한 근원적 불신만을 조장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은 적절히 규제됨으로써 정당성을 얻게 되며,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의]는 시장이 낳는 불평등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정의], 367쪽) 한 공동체 내부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면 필연적으로 연대의 문화가 무너진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사회체제에 대한 개인들의 불만을 야기하며, 규범에 대한 복종을 갉아먹는다. 더불어 극단적인 불평등은 공공선이라는 의제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며, 사회적 연대의식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불평등의 심화를 방치하는 것은 동료시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회피하게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균열을 야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칼 폴라니가 [인간의 살림살이](풀빛, 1998)에서 심층적으로 논하고 있는 도덕경제와 같은 관점이다. 도덕경제란 어떤 공동체든 그 사회를 유지하는 도덕적 규범으로 인해 시장이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나아갈 때 도덕은 이를 제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유명하게 만든 구호 ‘공동체에 내재된 시장’이란 이를 이르는 말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길, 2009)에서 유독 19세기 자유주의체제에서만 시장은 공동체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시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샌델의 시장비판은 폴라니처럼 멀리 나아가진 않는다. 그는 시장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이라 할 만한 대상(대리모 출산, 성매매, 폭리, 대리 군복무 등)에 대해서만 ‘윤리적 비판’을 제시할 뿐이다.

    결론 : 샌델에게 드리워진 보수주의의 얼굴

    샌델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의 관점이 자유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는 정의에는 롤즈식의 분배정의도 있지만 공동체의 올바른 윤리로서 ‘애국’, ‘충직’, ‘연대’, ‘의무’, ‘종교의 가치’를 옹호하는 가치측정으로서의 정의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덕목은 자유주의나 급진주의자들의 담론에서는 보기 드문 언어이다. 그가 제시하는 공동체주의 윤리학은 권리에 앞서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충직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그는 보수적 공동체주의가 공화주의의 가치를 되살려 내었다고 부분적으로 옹호한다. 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호출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에드먼드 버크(왼쪽)와 매튜 아놀드

    에드먼드 버크(왼쪽)와 매튜 아놀드

    샌델의 논리는 에드문트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8)과 매튜 아놀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를 연상시킨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권리만을 강조하는 문화는 일탈과 방종을 초래하며, 인간이 그가 속한 사회에 지녀야할 의무를 방기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한다. 버크는 전통적 관습, 공동체의 우상, 국부와 충성의 가치 등은 간단하게 부정할 대상이 아니라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질서가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애국과 충직의 가치를 옹호하는 샌델의 입장을 선취한 것이다.

    더불어 매튜 아놀드는 [교양과 무질서]에서 국가와 공동체가 ‘덕 있는 삶’을 무지한 대중들에게 학습시키지 않은 채 민주주의가 확산되면 무질서와 방종만 키우다고 주장한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와 60년대 신좌파의 도전이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보수적 공동체주의를 불러왔다는 샌델의 논리는 아놀드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샌델은 앨리스데어 맥킨타이어나 찰스 테일러와 같은 사민주의적 공동체주의와 비교된다. 앨리스데어 맥킨타이어와 찰스 테일러는 모두 영국 1세대 신좌파 출신으로 20세기 공동체주의 윤리학의 대가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현재 입장은 사민주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입장이다.

    샌델이 비록 공동체주의를 논하면서 맥킨타이어를 인용하고 있지만([정의], 310쪽) 그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엘리트주의적 공화주의나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와 더 공명한다. 이는 그가 공동체에 대한 충직을 강조하고 민주주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보수주의적 공동체주의의 미덕에 대해 동의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샌델이 미국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와 [불만]의 일관된 정치적 입장은 민주당 지지이다.

    샌델이 가장 역겨워하는 것은 타인들을 위해 세금 한 푼 낼 수 없다는 밀턴 프리드만이나 로버트 노직류의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와 그들을 추종하는 티파티 운동 같은 풀뿌리 이기주의 집단이다.

    샌델의 입장은 민주당이 진보적 자유주의와 절차적 공화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적 윤리와 덕 있는 삶,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을 국정에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윤리적, 사회적 논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공화주의의 원리를 더 심화시킬 수 있을 때 미국 사회가 더 건강한 연대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주의자들이라면 샌델식 공화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 가장 한심한 것은 한국의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 사민주의자들이 샌델식 ‘정의론’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정의’라고 모두 수용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샌델식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비판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공동체주의란 무엇인가를 제시할 생각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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