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육군 심리전 학교, 포트 브랙
    ...전두환 노태우도 여기서 유학
    [정지된 역사-5] 심리전의 역사...사면초가 4부
        2013년 03월 28일 01:3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정지된 역사….냉전 심리전의 역사 ‘사면초가’ 3부 관련 기사<편집자>

    ***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서유럽 국가들이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중요했지만, 냉전시기 심리전의 특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은 ‘철의 장막’ 너머 진행된 작전이었다. 1946년부터 51년까지 헝가리, 알바니아, 루마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각지에 유랑하고 있던 이 공산권 국가의 난민들을 활용하여 게릴라 침투작전을 수행했다.

    그 결과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과 만주일대를 무대로 진행되었던 공수침투 작전과 마찬가지로 ‘대참사’였다.

    한데 그 결과에 눈이 멀어, 이 무렵 진행된 공산주의를 상대로 한 ‘비정규전’의 패턴과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잡문에서 분류와 종합, 개념과 정의를 남발하는 것이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 한가지만큼은 기억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 확립된 공산주의와의 투쟁방식, 즉 심리전과 게릴라전으로 대표되는 ‘전쟁이 아닌 전쟁’ 즉 ‘비정규전(unconventional warfare)’은 이후 수십년 간 자유진영의 거의 모든 반공전사들의 매뉴얼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한민국은 단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모범 사례였고.

    고6-1

     

    고6-2

    [사진설명]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랙(Fort Bragg) 미 육군 심리전학교의 모습. 매그루더 준장의 오랜 노력 끝에 결실을 맺은 미군 심리전 전문 훈련기관인 포트 브랙은 이제 막 식민지에서 벗어난 신생 독립국 혹은 미국의 앞마당 국가들의 엘리트 장교들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중요한 유학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심리전과 반란진압, 게릴라전 등 이 학교의 교수프로그램은 정권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들을 습득시켜주었다.

    체 게바라를 때려잡았던 볼리비아의 토벌대 장교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을 상대했던 월남 정규군의 엘리트 장교들, 산디니스타가 축출했던 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Anastasio Somoza Portocarrero)도, 또 그 산디니스타를 몰아내기 위해 CIA가 후원한 콘트라(CONTRA)의 주축 장교들도, 10년 이상 CIA의 급여지급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파나마의 엘리트 군인이자 독재자이시며 마약사범이던 노리에가도 모두 이 학교 졸업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진압 아니 초강경 시위진압에 있어서는 월드클라스급인 전두환 노태우 이 두 분의 전직 대통령들께서도 자랑스러운 ‘포트 브래거’이시다. 20세기 전반 전세계 우등 공산주의자들의 1지망 대학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었다면, 20세기 후반 전세계 반공 군인들의 로망은 이 포트 브랙이라 할만했다. 오른쪽 사진은 1952년 진해 육사가교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전노 생도. 이 두 절친은 1959년 6월 포트 브랙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출처 : NARA ; 김진, “청와대 비서실”

    루즈벨트가 갑자기 사망하고 일본이 급작스럽게 항복하면서, 소련(공산주의)과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둘러싸고 워싱턴에서는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돌아서면 남남이라지만, 한때 그렇게 물고 빨던 소련에게 싸늘히 등을 보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미소의 결별을 촉진했던 사람들은, 1930년대 대공황의 근본적인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사회주의적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런 부류와는 아예 다른 종족들이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파업, 사회혼란, 무질서, 급진주의 등을 연상시키는 공산주의와 소련을 적대시하던 사람들이었다. 군부, 월스트리트의 변호사들과 은행가들, 정보기관 종사자들, 철의 장막을 빠져나온 난민들 등등.

    이들은 각기 자신들의 역할에 따라 무기, 자금, 정보, 인력을 제공하면서 미국의 국가정책으로 ‘반소 반공’이 형성되기 전부터 실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 20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미소의 결별과 함께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기갑사단과 공수부대 그리고 상륙작전을 대신해서 철의 장막 외곽을 따라 설립된 250여 곳의 전파발신소를 거점으로 한 24시간 선전방송, 세계의 지성들을 앞세운 출판물의 간행, 대대적인 망명 유도, 무의미한 희생만을 야기시켰던 “커튼 저편”의 지하저항 세력의 구축, 출처확인이 불가능한 악성루머의 살포, 위조지폐를 통한 경제혼란 야기, 반공전단과 미국산 식료품깡통을 매단 애드벌룬의 대량 살포 등등.

    그 어떤 곳에도 미군부대의 휘장이 발견되거나 미국의 재외공관원들이 공식적으로 개입된 흔적은 없었지만, 누가봐도 그 주인공은 미국이었다.

    이 전쟁은 볼세비키 혁명 그리고 총력전으로서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20세기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대중(mass)’을 전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여기에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이 기름을 끼얹은 셈이고.

    한데 심리전이라고 해서 골방에 앉아서 지푸라기 인형에 바늘이나 꽂아대고 저주만 읊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릴라전과 요인암살 그리고 주요 시설 파괴와 같은 ‘특수전’은 심리전과 함께 동전의 양면처럼 취급되었다.

    미군과 CIA는 모두 이 두 교전수단에 대한 작전권과 전문가 그리고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CIA가 보다 돋보였던 것은 미 육군이 결국 정보부처(G-2)와 심리전·특수전을 분리하는 것을 택한 반면, 미 행정부는 여전히 정보기관이 이 두 교전활동을 수행하도록 결정(이는 모두 워싱턴의 최종 국가정책문서인 NSC 4와 NSC 20로 결정된다)했다는 점이다. 냉전 하의 새로운 교전수단인 심리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관점에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보다 권장되는 모델이었다. 정보기관과 심리전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심리전의 수행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정보와 그 정보에 대한 분석이 불가피하다. 특히나 적대집단을 상대로 한 심리전이라면 정보의 수집은 특별한 자질과 기술을 갖춘 전문요원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타켓으로 삼고있는 집단이 주로 의지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무엇인지, 그들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는 “거점 인물”은 누구인지,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는 무엇인지 등등. 사회학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등의 협업을 통한 분석작업도 필연적이다.

    이런 방대한 작업은 이미 그만한 정보를 축적해놓고 있는 “전능한 기관”이거나, 혹은 그러한 정보를 분산해서 보유하고 있는 기관·집단을 “조정”(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동사가 바로 이 “조정하다”이다)할 수 있는 권력기관이거나. 아울러 권력기관이야말로 ‘심리전’이 노리는 두 가지 효과, 즉 “속이기와 깨우쳐주기(Deception and Enlightenment)”에 필요한 수단들, 즉 신문·방송·대학·연구소 등을 “조정”하는 데에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심리전을 통해 유포된 “허위의 세계(apparent world)”를 믿게 하려면, 그것을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심리전과 정보기관의 또다른 친화력은 바로 그 활동의 ‘은밀함(confidentiality)’에 있다. 한때 일본경찰이 인간 두뇌를 꿰뚫어보기 위해 설치했던 ‘사상경찰’이 겪었던 어려움(특히 고문을 수행해야 했던 어려움이다)처럼, 심리전이 다루는 인간 정신활동의 특성은 은밀하고 또 사적이라는 다루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군중’이나 ‘익명’의 방패를 빌어 출현하게 되는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심리전 수행의 주체들은 “잠입과 탈주(Penetration and Escape & Evasion)”에 능한 특수요원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꿰뚫어볼 수 있는 천리안도 반드시 필요하다. ‘검열과 사찰’ 이 두 요소는 정보기관의 가장 커다란 일상 업무 중 하나이며,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통제하기 위한 심리전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기도 하다.

    많은 정보기관과 심리전의 상관관계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심리전이 먹혀들게 만드는 가장 좋은 환경은 바로 ‘공포와 안심(Terror and Reassurance)’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가장 잘 구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뭐 어려운 기술은 아니다. 밤마다 마누라를 팬더곰으로 만드는 폭력남편이 아침만 되면 그 눈두덩이를 어루만지며 “사랑해서 그라는거 알제?”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특성은 CIA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의 현대사에는 가장 잘 들어맞는 법칙이기도 하다.

    이 세 번째 친연성은 심리전의 토대를 위한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해당하는 위의 두 가지에 반해 ‘직접 행동’ 혹은 ‘작전’ 단계에 해당한다. 사실 최종적인 심리전의 위력은 여기에서 드러나며, 이런 활동은 극작가나 역사학자가 우두머리를 맡았던 COI와 같은 태동기 정보기관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든 고난도의 종합격투기에 해당한다. 우리의 정보기관이야 이런 난관을 뚫고 뼈가 굵지 않았던가?

    고7-1

    고7-2

    [사진설명]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 전부터 사실상 남한에서는 좌익사상에 관한 치밀한 검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이 자신의 사상을 위장하기 위한 조치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시기의 사상통제에 해당하는 활동을 담당한 것은 주로 미군정의 정보기관이었던 G-2와 CIC 그리고 남한의 경찰(사찰과 등)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남한에서 신문과 잡지에 사용되는 용지를 만들던 공장은 단 한 곳(전주)만이 있었고, 이 회사가 군정의 통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용이한 편이었다. 그리고 1946년 법령이 개정되면서 간행물에 대한 검열과 사후제재는 더욱 엄격해졌고, 좌익 출판물은 ‘적색분자의 체포’로 안내하는 가장 확실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

    따라서 군정과 경찰의 불온서적에 대한 추적은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일찍이 일본 특고를 상대로 한 숨바꼭질에 익숙한 남한의 좌익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추적을 따돌리고자 했다. 광산학개론, 인간처세학, 조선사정해, 현대사상개요, 근세동양사 등등 모두 점잖은 지식인들의 서재에 꽂혀있을 법한 표지였지만 내용물은 모두 남로당 기관잡지인 “전진”이었다. 모두 1949년에 발행된 것이다. 사진출처 : NARA

    최근 심리전이라는 단어가 다소 남발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사실의 반영일 뿐이다. 사실상 냉전이 가시화된 이후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자유진영’이 제2세계에 맞서, 그들이 ‘전략’이라 불렀던 봉쇄정책을 수행하는 데에 활용했던 핵심적인 정책도구는 바로 ‘심리전’이었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미국의 핵독점이 와해된 이후 초래된 핵전쟁과 3차 대전의 우려로 인해 ‘열전’이 억제된 상황에서 ‘심리전’이라는 “보이지 않는 총알”은 유일한 무기였다.

    간혹 용어가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해 ‘정치전(political warfare)’, ‘심리작전(psychological operation)’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사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바로 ‘심리전’이었다.

    냉전이 드러나던 시점에서 워싱턴의 최고위 정책가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단어가 심리전이었으며, 1947-50년 무렵 대소정책의 조정을 위한 최고급 정책조정기구들의 이름에도 ‘심리(전)’이라는 이름이 내걸렸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사실상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20세기의 모든 ‘독재자’들을 괴롭혔던 아이러니기도 했다. ‘

    봉쇄’라고 하는, 병균은 격리시키고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정책이라는 이 미국 시민들의 정서와 자유주의의 전통과 어울리는 듯한 전략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을 꺼꾸러트리려는 시도를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워싱턴의 공격적 본능 간의 갈등을 해결 하는 데에 심리전 외에 다른 대안은 많지 않았다.

    미국의 무차별적인 심리전을 지지하는 한 연구자가 “민주국가의 시민들을 상대로도 언제나 수행할 수 있는 작전에 교전수단(warfare)”이라는 명칭을 써야 하냐며 발끈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전문가들은 좀 소심해보인다. 대중을 전취해야 하는, 경우에 따라 속이거나 위협을 해서라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권력’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늘 하고 싶은 일인 셈이다.

    그러니. . . 왜 말을 못해? 왜 바보같이 말을 못해? 니가 내 애인… 아니 내가 그랬다고! 내가 시켰다고 왜 말을 못하냐고?

    * 다음 연재부터는 정말 사진에세이 형태로 한국전쟁의 심리전과 관련해서 구경해 볼 예정입니다^^ <필자주>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