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샌델에 열광하는 사회,
    보수적 공화주의의 도래인가?
    [비판과 비평]<정의란 무엇인가>의 사회적 정치적 쟁점 1- ①
        2013년 03월 28일 10: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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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의 이번 칼럼은 한국에서 초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독서노트이자 비평 글이다. 글이 길어서 몇회에 나눈다. 샌델의 글과 입장이 가지는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소개하는 1부와 이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공동체주의에 대해 밝히는 2부로 나뉜다.  1부 글도 길어 2회로 나누어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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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장에 초청된 철학자

    학원에서 몇 년째 강독을 하고 있다. 강독을 듣는 학생들은 많지는 않지만 나 자신도 공부를 겸하여 계속하고 있다.

    2012년 수업 도중 고등학생 몇몇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1년)를 같이 읽자고 했다. 너무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은 안 읽는 버릇이 있어서 이 책이 세간에 널리 읽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읽지는 않은 상태였다. 아이들도 원하고 나도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 싶어서 같이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들고 나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이 책이 2011년 6월 당시 179쇄를 돌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철학책이 200백 쇄를 향해 간다는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정의’를 주제로 한 철학책이 200쇄를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다.

    혹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척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의’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점을 들었다. 더불어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부정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정의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높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혹자는 하버드에서 가장 유명한 강의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비판을 제시한 점에서 그가 주목받는다고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한국 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샌델의 인기는 급기야 그를 한국에 초청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방문했고, 대학에서 특강도 했으며, 심지어 야구장에 가서 시구도 했다. 야구장에 초청받는 철학자라는 점에서 그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건 뭐 코메디 같은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 한국 사회의 출판 상업주의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재미있는 철학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철학, 윤리 하면 무엇인가 따분하고, 이해할 수 없고, 난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단박에 날려 버린다. 샌델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회적 쟁점들에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 과정에서 이들 쟁점과 관련된 철학의 거장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곧장 그 철학자들의 핵심사상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피터 싱어와 같은 실천 윤리학자들의 글은 솔직히 큰 맘 먹고 읽지 않으면 따분하기 그지없는데, 샌델의 ‘정의론’은 흥미와 지적 쟁점을 기가 막히게 연결시켜 놓았다.

    예컨대 장애를 지닌 응원단원은 과연 칭송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논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호출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주디 판사’역을 맡은 방송인이 과연 1년에 2500만 달러를 벌어드릴 자격이 있는가를 논하기 위해 롤즈를 철학의 법정에 출두시킨다. 롤즈에 따른다면 그는 자격이 없다. 궁금하면 책을 직접 읽어보시라.

    사실 샌델류의 ‘정의론’은 진보적 자유주의나 반이명박 정서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확산된 인민주의자들의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로서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샌델류의 정의론에 열광하는 이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공화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 비판’이며, 보수적 공동체주의를 통해 사회적 부정의를 치유하자는 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샌델의 [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독서노트이자 비판이다. 처음 샌델의 책에 대한 비평을 쓰려고 했을 때는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만 읽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샌델의 관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 안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와이즈베리, 2012)와 [민주주의와 그 불만](동녘, 2012)을 함께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롤즈의 [정의론] 비판인 [정의의 한계](멜론, 2012)는 제외했는데, 이 책의 핵심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독서노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의 글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의 핵심을 정리한다. 많은 독자들은 이미 이 책을 읽었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읽기가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샌델의 정치 철학이 지닌 정치적, 사회적 쟁점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샌델식의 공동체주의를 비판할 것이다.

    공동체주의의 윤리: 서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는 이름만 있을 뿐이고 진정한 실체는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논의를 진척시킨다. 사회란 개인들 간의 합의이고, 법은 다수의 의지이며, 내가 법에 복종하는 것은 내가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정의], 154쪽; 299쪽)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개인으로서 나 자신의 안전과 존엄을 보호해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복지를 위해 세금을 내는 이유도 내가 필요할 때 혜택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정의], 306쪽)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근원적으로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샌델은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사회관을 수용하지 않는다.

    샌델에 따르면 개인들은 사회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 편입되는 존재이다.([정의], 311쪽) 내가 누구인가는 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가족, 시민사회, 국가, 민족의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정의], 312쪽) 나의 가치관, 지향, 안전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나 또한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와 같은 서사를 다른 구성원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는 것은, 개인은 자기 자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으며 그 역사, 이야기의 일부로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누리는 행복, 불행, 나의 삶의 경로는 공동체가 만들어져 온 역사의 일부이며, 그 역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동체로의 편입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며, 그 속에서 구성원들은 그 공동체가 제공하는 혜택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체가 각 개인에게 부과하는 의무도 동시에 충실히 수행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정의], 314쪽)

    마이클 샌델의 강의 모습

    마이클 샌델의 강의 모습

    공동체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개인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공동체가 부과하는 의무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조국을 위해 전선’에 나가야할 때가 있고, 자신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있는 것이다. 의무는 단지 내가 합의한 것, 선택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공동체의 역사적 서사과정에서 만들어 졌다면 그를 만들어 준 공동체에 대한 충직의 의무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정의], 334쪽)

    이것은 ‘역사적 사죄’라는 쟁점에서 잘 드러난다.([정의], 294쪽) 독일인들은 나치 행각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죄했다. 비록 자신들이 직접 행하지 않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들이 사죄하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한 잘못이나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한 잘못일지라도 그것은 자기 공동체가 저지른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인들에 대해 식민지 시절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현재의 그들과 과거의 일본인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불어 개인은 그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다른 구성원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지닐 수밖에 없다. 공동체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시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단지 국가로부터 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을 내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와 비록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의 일원이라면 나의 삶의 일부이며, 그에 대한 나의 책임의식 역시 당연히 전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대의식이야말로 공동체주의의 핵심이다.([정의], 368쪽)

    더불어 샌델식 공동체주의는 윤리적 책임에 있어서 보편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내 가족, 내 지역사회, 내 민족에 대한 나의 충직이 다른 가족, 지역사회, 민족들에 대한 윤리적 의무보다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지역사회에 대한 의무를 타인들에 대한 의무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정의], 319쪽) 왜냐하면 같은 공동체에 속한 성원들에 대한 책임의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무는 결코 공평무사한 보편주의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가까운 존재에 대한 헌신은 당연한 것이다.

    공화주의: 덕 있는 삶의 실천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열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샌델에 따르면 공화주의란 시민들의 덕 있는 삶을 추동하고 시민들 스스로 자발적 참여를 통해 공동체의 주체로 서도록 하는 정체를 일컫는다.

    공화주의란 개인의 사적이익을 절대화하는 사회가 아니라 공공선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사고하며, 이런 공공선에 시민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시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교양과 책임의식, 참여를 조직하는 정체인 것이다.([민주주의의 불만], 44쪽: 이하 [불만])

    공화주의가 추구하는 공공선은 각 공동체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온 것이다. 민주정체에서 공공선은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사회적 주체가 되어 공공의 의사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모든 개인들이 존엄을 유지하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불만], 45쪽) 비록 공화주의에서 추구하는 공공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공익 실현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어야 하고, 시민들은 이런 공익 실현을 위한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 모든 공화주의의 기본적인 목표라 할 것이다.([불만],183쪽)

    샌델은 공화주의를 강조하며 고대 희랍철학을 불러낸다. 그가 불러내는 이는 [국가]의 플라톤이 아니라 [정치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고유한 목적을 지녔으며 정치는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사회제도의 존재 또한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삶이란 미덕을 쌓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며, 정치는 시민들의 미덕을 기르고 공공선을 위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정의], 270쪽)

    샌델은 [불만]에서 공화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면서 미국혁명(독립전쟁) 당시 건국주체들의 공화주의적 열정을 논한다. 미국혁명의 주체들은 “정치의 핵심이 경쟁하는 이익들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선을 추구”([불만], 184쪽)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덕 있는 사람들의 통치”를 강조했고, 정치는 이런 “덕 있는 시민들을 지속적으로 길러”내어야만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정부의 역할이란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공화주의적 관점은 윤리를 판단함에 있어 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윤리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개인은 자율적으로 윤리를 판단하고 국가와 정치는 되도록 개인들의 도덕적, 윤리적 판단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다르다. 모든 공동체는 고유한 윤리적 선이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기본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들이다. 조국에 충성하는 것(애국), 다른 구성원에게 책임을 지는 것(연대), 공동체의 의무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책임의식) 등이야말로 공화주의가 옹호하는 윤리의 기본적 토대인 것이다.([정의], 308쪽)

    공화주의 속에서 정의란 단지 사회적 계약이나 개인들의 자발적 합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윤리적 선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개인들의 선택을 넘어서는 객관적 도덕이 존재해야 하며, 사회는 이런 보편적 도덕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을 때 강한 연대의식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정치는 이런 객관적 도덕, 보편적 윤리를 구성원들에게 적극 교육하고 이끎으로써 시민들의 덕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덕성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그들이 주체가 된 민주사회가 공화국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화주의는 윤리적 쟁점에 있어서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는다. 윤리적 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때 공화주의는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을 옹호하지 않는다. 예컨대 낙태나 동성애가 개인들의 자유로운 판단의 몫이기 때문에 국가나 정치가 개입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것들이 진정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낙태와 동성애가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정의], 306쪽) 윤리적 판단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지 말고 좋은 것은 왜 좋은가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샌델은 물론 공동체 내부의 윤리 논쟁을 인정한다. 한 사회에서 무엇이 올바른 윤리인가를 두고 갈등할 수 있다. 그러나 해법은 자유주의자들과 다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윤리를 간직한 채 공동으로 합의한 법을 존중하면 삶의 지속성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이런 식의 다원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윤리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삶이라는 보편적 지평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그에 따른 사회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정의란 올바른 가치측정의 문제인 것이다.([정의], 362쪽)

    자유주의 비판 : 사회계약론의 딜레마

    샌델의 공화주의/공동체주의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정의]는 많은 부분을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철학적 전통을 비판하는 데 할당하고 있다. 이 책은 3장의 공리주의, 4장의 자유지상주의, 5장의 칸트주의, 6장의 롤스에 대해 논한다. 샌델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각각의 정치철학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장하는 공동체주의 윤리학으로 넘어간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가운데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벤담식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개인이나 공동체의 소수집단을 희생시킬 수 있는 논리이다.

    이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실천윤리학의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미 많이 비판 받는 내용이다. 칸트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을 때([정의], 171쪽), 롤즈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되는 불평등만 정당화했을 때([정의], 199쪽) 이들 모두가 조준한 것은 공리주의였다. 공리주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 내부에서조차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라는 점이다.([정의], 192쪽)

    자유지상주의는 오늘날 가장 파렴치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하이예크, 프리드만, 로버트 노직으로 연결되는 이들 자유주의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로크의 소유권적 기본권이다.([정의], 90쪽)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내 신체, 내 재산은 나의 것이며 이것은 국가라고 해도 함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정의], 102쪽)

    심지어 민주주의의 원리로도 소유권의 절대성은 공격할 수 없다. 노직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원리를 통해 다수자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정부가 세금을 부과하는 것도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이자 인간의 노예화를 이끄는 악이다.([정의], 93쪽)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장기 판매든 대리 출산이든 자기 신체와 관련된 결정은 개인의 자율성의 영역이지 법이나 국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자유지상주의는 미국 공화당 우익의 철학적 토대이다. 자유지상주의는 세금은 단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공화당의 논리나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티파티 운동과 같은 풀뿌리 보수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고 있다.

    이들은 나라가 파산상태에 이르러도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낼 필요는 없으며, 시민들이 굶어 죽어도 그것은 개인적인 선택의 몫이지 국가가 나서서 구제할 문제는 아니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샌델은 이런 류의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을 이기적 동물로 타락시키고, 공동체의 유대를 파괴하며, 파렴치함과 도덕적 무감각만 키운다고 비판한다.([정의], 124~125쪽)

    그러나 샌델이 [정의]에서 진정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이들 두 입장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빈곤한 철학일 뿐이다.

    샌델이 직접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칸트와 롤즈, 말하자면 근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계약론이다. 샌델 자신이 철학계의 떠오르는 샛별이 된 것도 롤즈의 [정의론]을 정면으로, 그것도 매우 설득력 있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샌델의 칸트 비판은 공동체주의와 연결된다. 칸트는 우리가 법에 복종하는 이유는 자율적 주체로서, 이성적 주체로서 우리 스스로 도덕법칙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존엄할 수 있는 것”이다.([정의], 165쪽)

    그러나, 앞에서도 보았듯이, 샌델에 따르면 우리가 도덕을 수용하고, 공동체에 충직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내가 합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합의 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한다.([정의], 314쪽) 자신이 합의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지라도 공동체가 부과하는 윤리적 규범을 따르는 것이 ‘좋은 삶’이자 ‘미덕’인 것이다.

    롤즈에 대한 샌델의 비판도 이와 관련된다. 롤즈의 저 유명한 ‘정의의 두 원리’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롤즈는 무엇이 도덕적 선인가, 무엇이 정의인가를 논하기에 앞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공정한 절차만 구성된다면 그에 따라오는 합의는 정의의 원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정의], 226쪽) 말하자면 롤즈는 절차적 과정을 새롭게 함으로써 사회계약론을 현대화 한 것이다.

    롤즈의 입장은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철학을 핵심적으로 대변한다. 자유주의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논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들의 선택의 몫으로 놓아둔다.([정의], 306쪽) 대신 공정한 절차를 통해 다수의 구성원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정의], 225쪽) 이렇게 합의된 것에 대한 복종이 시민의 의무라는 것이다.

    샌델에 따르면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합의된 내용이 언제나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칸트는 자율적 주체들이라면 응당 정언명령에 도달할 것이고, 롤즈는 무지의 베일 속에서 합의를 도출하면 필연적으로 ‘정의의 두 원칙’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정한 절차를 거쳐 합의된 것이 반드시 윤리적인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합의를 토대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다른 공동체를 공격할 수도 있고, 공동체 내부의 소수자들을 학살할 수도 있으며, 절차 그 자체를 통해 사회적 위악을 더 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정의], 308쪽) 샌델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이 문제에 대한 아무런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이렇다. 자유주의는 윤리적 선에 대한 논의에서 언제나 개인의 선택만을 강조함으로써 누가 보아도 ‘위악’인 선택에 대해서도 허용해버린다는 것이다.

    굶어 죽는 것도 개인의 선택의 일부이고, 흑인들의 비참함이나 제3세계의 빈곤도 다양할 라이프스타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쿨하게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해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아무런 비판도 제기할 수 없다. 도덕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으며, 보편적 선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누가 보아도 파렴치하고 부끄럽고 노골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윤리적 비판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정의], 337쪽)

    샌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토대를 둔 미국식 진보주의가 사회의 윤리적 타락에 대해 아무런 제어를 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공동체는 무엇이 좋은가를 기꺼이 제기하고, 시민들을 이와 같은 좋은 방향으로 선도하는 것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이지, 윤리적 선에 대한 개인들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질서와 유대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은 삶과 시민적 미덕을 정치를 통해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윤리적 쟁점에 대해 보편적 입장을 만드는 것만이 이런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정의], 343쪽)  <계속>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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