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깃발 들고 새 좌파정당 건설
[기고] '총체성의 노동' 실현하는 당 만들고 대선 대응하자
    2012년 06월 04일 12: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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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혼돈 속으로

진보신당은 또 다시 혼돈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체성을 둘러싼 혼돈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공무원노조는 법외노조입니다. 법외노조라고 해서 노조가 아닐까요?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단결하여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정체성을 한갓 노동부가, 행정안전부가 규정해 줄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등록취소를 선고한 선관위가 우리 당의 정체성을 규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통합진보당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지 못합니다. 새누리당을 넘기 위해서는 반MB라는 반사이익만으로는 부족하듯이, 통합진보당의 실수와 한계가 곧바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우리의 존재의의와 가치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이 불순하고 패악한 세상과 불화하기를 잠시 미루고 쉬운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의 이름을 가로채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의 진보정당이라면 불순하고 패악한 이 자본의 세상을 걷어내는 근본적인 실험을 해야 할 사명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녹색당과 함께 하려는 시도에 대한 우려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녹색사회당이라는 깃발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녹색당 동지들은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 통합진보당이 진보당의 이름을 참칭하듯이 우리가 녹색의 가치를 어설프게 빌려가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녹색의 가치는 어느 일방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상대를 동지로 생각한다면 정치 도의상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정도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제 첫 깃발을 든 그들로서는 기회가 더 필요합니다. 비록 등록 취소가 되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0.5%라는 득표율을 얻은 것은 고무적인 결과입니다.

그것이 설령 통합진보당 등 기존 진보정당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한 반사이익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성과인 것은 틀림없고 만만찮은 지지세를 확인했으니 다시 도전할 기회가 필요할 것입니다.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와 김순자 후보(사진=이상엽)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노동과 녹색의 관계에 대해서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이 녹색의 가치도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노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닌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우리의 깃발로 삼는 한, 우리의 깃발은 ‘노동’ 하나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복원하자.

자본은 모든 악의 근원이지만, 노동은 그에 대항하는 부문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모순과 투쟁의 배후에는 자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해방투쟁의 배후에 노동이 있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로 프로레타리아트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생태, 소비자, 여성, 민족 등의 문제에서는 프로레타리아트가 보이지 않는 걸까? 분명 이 모든 부문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발현된 질곡의 한 형태인데 소비자, 생태, 여성, 민족 심지어는 노동 내부에서 포괄되어야 할 비정규직조차 따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두 가지 축의 하나인 협동조합도 전혀 다른 세계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노동은 왜 해방의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자는 소외된 생산자이기도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굴레에 갇힌 소외된 소비자이자이기도 합니다. 자본으로부터 강요된 최소한의 필요욕구와 개인 개성의 충분한 계발을 위한 사회적 필요욕구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서 발생하는 불만족과 투쟁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임노동이 자기 존재의 조건인 자본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조합주의적이고 고립분산적인 운동들이 발생합니다.

노동조합운동은 노동력의 가격이 자신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며, 임금투쟁은 임금하락이라는 결과와 싸우는 것이지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 즉, 자본의 철폐를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임노동에게 화폐를 지불하여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조차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우리 노동운동 역시 협소한 임노동을 방어하기 위한 부문운동에 매몰되어 왔습니다.

생산과정의 임노동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의 자본이 생산과정에서 일으키는 환경 훼손,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 생산 등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노동은 자본에게 단지 노동력만을 판매한 것이라 하더라도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노동 일반을 자본의 지휘 통제에 통째로 내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로서의 임노동은 시장에서 자신의 적을 찾을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의 수중에 없는 화폐로 인해 벌어지는 무권력 상태를 경험할 뿐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비자불만센터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한계 뿐 아니라 자본에 의한 분열공세에 의해서도 한계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자본이 추진하는 생산과정에서의 혁신이 반드시 생산성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에게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목표에 대항하여 자신의 필요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동자를 패퇴시키기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자본이 노동의 성과물을 가져가기 위한 조건은 임노동을 분열시키는 경우뿐이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노동 일반은 또한 생태, 소비자, 여성, 민족, 비정규직 등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자본은 성장주의, 서비스노동, 가부장제, 민족주의, 정규직이라는 표면적인 형태 뒤로 숨어서 스스로를 신비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운동은 표면적인 적을 넘어서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본 일반이라는 공동의 적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하지는 않습니다.

해방의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에 포획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으로부터 강요된 최소한의 필요욕구와 개인 개성의 충분한 계발을 위한 사회적 필요욕구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격차에서 발생하는 불만족과 투쟁하는 존재입니다.

이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은 생리적인 것에 그치기도 하고, 주어진 시점에 주어진 사회의 관습과 관례에 합당한 소비수준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발전된 인간존재로서의 필요욕구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필요욕구는 최소한의 생리적 필요욕구조차 자본과의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면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필요욕구가 고귀하지만, 정치적 결사체인 진보신당이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필요욕구입니다. 즉, 생리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질적으로 풍요로운 인간으로 성장하고픈 필요욕구, 타인과 만나 우리가 됨으로써 진정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필요욕구입니다.

홍세화 대표가 정치의 고귀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해방투쟁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열망이 있습니다. 홍세화 대표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의 당명으로 ‘전태일당’을 주장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일차적으로 일어난 반향은 이것입니다. 즉 전태일의 삶 속에 녹아있는 질적으로 풍요롭고 고귀한 인간에 대한 지향성, 그것을 위한 진지한 투쟁의지입니다.

‘고귀한 정치’가 다양한 운동을 하나로 만든다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은 이러한 고귀한 정치로부터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고귀한 정치를 추구할 때 생태, 소비자, 여성, 민족, 비정규직, 협동조합 등의 다양한 부문운동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귀한 정치로부터 출발할 때 임노동은 개인주의적이고 실리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고, 여성운동은 가부장제 뒤에 숨어 있는 자본의 성 차별전략을 발견할 수 있고, 민족 간의 갈등은 제국주의 침략은 물론 더 나아가서 자본의 지배 자체를 반대할 수 있고, 정규직은 자본의 노동 분할전략에 맞서서 비정규직과 함께 투쟁할 수 있고, 생태운동은 자본의 무한한 탐욕을 발견하고 노동운동과 함께 할 것입니다.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체 사회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아니라 시장에서 경쟁에 함몰되어 있는 상황 하에서, 즉 국가라는 도구가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서 역할하지 않는 상황 하에서, 개개의 협동조합의 실험이 그 유용성을 증명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스스로를 착취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극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탈핵은 근본적인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핑계를 조작해서든 제3세계를 침략하고자 하는 전쟁 책동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한,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인간 생존의 조건인 자연조차도 스스로 허물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한, 환경운동은 그야말로 내 집 안마당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소비자운동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 결과에 봉착합니다. 생산물 소유자로서의 자본에게 잉여가치의 실현, 즉 시장에서의 상품 판매는 사활을 건 도약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소비자운동에 천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소외를 낳은 결과와 싸우는 것이지 원인과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품소유자로서의 자본이 없다면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서의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복원하지 않을 경우, 연대운동 역시 한계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가치를 아우르려는 시도는 한편으로는 바람직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병렬적인 것에 그친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에 입각한 시도라면 바람직할 것이고, 임노동의 입장에서 다양한 가치와 교류하는 것이라면 부족할 것입니다. 다양한 가치의 존중, 혹은 연대의 관점은 주체로서의 우리의 자신감 결여, 혹은 무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좌파정당 건설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롭게 건설될 정당의 정체성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진보신당의 상징인 네 가지 색깔의 팔랑개비는 병렬적으로 단순 나열된 다양한 가치의 연대를 표방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병렬이 아닌 통일,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이 구현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담대한 깃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우리는 각종 단계론의 패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NL노선은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식민지 남한 사회의 해방, 즉 인민민주주의론(마오의 신민주주의, 80년대의 민중민주주의, 최근의 진보적 민주주의)의 변종이며, 2단계 연속혁명론이라고 알려진 그 노선에 근거한 것입니다.

현실적 이유로 인민민주주의론과의 동거를 결정한 통합연대 역시 단계론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뛸 징검다리, 혹은 교두보로서 통합진보당을 설정하고 있는 참여당 계열 역시 단계론적 사고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는 이 모든 단계론의 파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항은 저항을 통해서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닮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을 위해서 현재를 불가피하게 능욕해야하는 단계론은 정확히 이 말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는 노선입니다. 저들의 패퇴가 불가피한 이유입니다.

저들의 패퇴의 근저에는 목적에 대한 천착을 포기한 수단에 대한 집착, 담대한 깃발을 대신하는 정교한 정치공학적 계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의 향연, 고귀한 정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로두스 섬의 딜레마에 빠진 것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저들의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비판에서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대안을 지금 제시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담대한 깃발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첫째, 자본 대 노동의 구도가 필요합니다. 보수 대 진보라는 막연한 구도가 아니라 이제 자본 대 노동의 구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럴 때만 중간에서 흔들리는 자들과 함께 보수, 자유, 진보의 삼 분할 구도 역시 복원이 가능합니다.

둘째, ‘총체성으로서의 노동’을 표방하기 위해서, 제2의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당명의 복원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혹은 전태일당도 좋습니다. 또 다른 더 좋은 당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자본 대 노동 구도를 형성할 수 있는 당명이라면 무방할 것입니다.

셋째, 대선은 반드시 대응해야 합니다. 정당은 다른 모든 조직이 할 수 없는 일, 즉 선거에서 후보를 내는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입니다. 선거라는 공간에서 후보를 통해서 자신의 깃발을 담대하게 제시하기를 포기한다면 정당으로서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자후보 운동은 이재영 동지가 지적했듯이 현실적인 준비 정도를 초월하는 역사적으로 확립된 우리 운동의 조류입니다. 진보신당이 대선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임하면 진보정치운동에 혁신을 이룰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서둘러야 합니다.

넷째, 대선후보로는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적합할 것입니다. 단병호 위원장만큼 노동 대 자본의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세밀한 정책보다 우직한 신심, 지금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단병호 위원장의 성품 또한 그렇습니다.

다섯째, 우리 내부를 혁신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조급하게 창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담대한 깃발을 드는 것 자체가 혁신 즉l 노동정치의 혁신입니다. 지역정치 혁신의 경우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상적인 활동의 결과물인 만큼, 그 완성을 어느 시점으로 잡아야 할지는 기준이 불분명합니다. 당원 참여와 활동가 교육 역시 당장 시작할 수는 있지만, 정착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기준점을 설정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진보좌파정당의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단 시작은 하고 볼 일입니다.

여섯째, 노동자들이 전체 당원 숫자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해야 하고, 노동자들이 이름만 당원이 아니라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참여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과거 국민승리 21을 결성하던 것처럼, 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듯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직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장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조직하는 상향식 방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원칙과 방향은 동의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지에 대해서 더 진일보한 제안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것을 이유로 지금 당장 진보정당이 해야 할 임무를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상황논리에 의해 현실의 정치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정치적 기획이라는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제안이 기대됩니다.

이상으로 이 글을 맺습니다. 새로운 진보좌파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타인과 만나 우리가 됨으로써 진정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모든 동지들의 비판과 토론을 기대합니다.

필자소개
진보신당 강원도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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