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잡지의 멸종, 그것의 의미는?
    '권위의 분산과 권력의 집중'....<무비위크> 폐간에 부쳐
        2013년 03월 26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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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 관객과 천원 잡지

    《스크린》(1984~2010),《로드쇼》(1989~2003),《키노》(1995~2003),《프리미어》(1995~2009),《씨네버스》(2000~2003),《필름2.0》(2000~2008).

    그동안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의 손때로 제 몸에 무늬를 만들다가 발행을 멈춘 영화잡지들이다. 수집가들의 책장은 신권을 추가하기 위하여 더 이상 자리를 마련해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2013년에 이 목록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2001년부터 발행되어오다가 2007년에 중앙일보 계열로 편입된 한 영화잡지는 곧 무료영화지로 통합된다고 하지만 사실상 폐간을 맞는다. 이제 그 이름도 다음과 같은 괄호를 달게 될 것이다.《무비위크》(2001~2013).

    여러 대중예술 분야의 전문지들이 비슷한 난국에 처해 있다. 이 가혹한 운명을 앞서 개척한 분야가 ‘K-POP’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는 대중음악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는데, 음악인 다수의 생활은 궁핍하고 음악잡지들 역시 대부분 사라졌다.

    영화계에선 2012년부터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까지 1000만 명이 봤다는 영화가 세 편이나 연달아 나오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82%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1년 내내 동원하는 관중기록을 단 한 편의 영화로 곧잘 상회하는 한국영화의 속사정은 그리 밝지 않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많지만, 영화인 대부분의 생활은 궁핍하고 영화잡지들 역시 퇴장하고 있다. 오프라인 영화잡지도 멸종위기종에 합류했다.

    영화잡지들

    생각해보면 인구 5000만의 국가에서 1000만 명이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좀 괴기스럽지 않은가?

    한국은 프랑스와 극장 관객의 수는 비슷하지만 몇 편의 흥행작으로 쏠림현상이 심하다. 게다가 천만 관객 시대에 일부 영화잡지들은 천원이라는 염가판매로 그나마 생명을 연장해야 했다.

    외국의 영화마니아가 ‘한국영화’가 세계의 브랜드가 되었는데 비평과 저널의 기능을 수행하는 인쇄매체가 달랑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을지도 모른다. “정말 한국에 시네필(cinephile)이 존재하는가?” ‘한국적 상황’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말이다.

    환경의 변화와 권위의 분산

    우선 보편적인 원인부터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물성이 사라지고 있다. 영화잡지의 1차 재편은 1995년부터 기존의 잡지들과는 성격이 다른 《키노》와 《씨네 21》처럼 전문성 있는 매체들이 등장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재편은 주간지들이 월간지들을 대체하는 단계였다. 이미 이때부터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전면화는 3차 재편, 즉 종이잡지의 쇠락으로 이어진다.

    알다시피 종이잡지는 인터넷의 정보신속성을 따라갈 수 없었고, 환경의 변화에 따른 구독자 감소와 수익성 악화에 시달렸다. 또한 정보 취득과 발언의 공평성은 자기권위의 시대를 열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권위의 분산은 일견 멋진 말로 보이지만, 근거 없는 환상을 수시로 불러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인터넷, 특히 SNS에 대한 기대 섞인 담론들이 횡행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기대란 개인문화의 변화가 시스템의 변혁을 추동하리란 것이다.

    경쟁과 지배와 독점을 참여와 개방과 공유로 전환시켰다는 얘긴데, 시스템의 작동(경쟁과 지배와 독점)과 개인문화(참여와 개방과 공유)는 같은 전선 위에 놓여있지 않다.

    이러한 착시 상태에서 ‘인터넷이 이렇다면’ 그리고 ‘긍정성이 더욱 발현된다면’과 같은 기대는 가정의 중첩이다. 가정의 중첩은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물론 새로운 소통과 만남의 방식은 인간관계에서 연령․학력 등에 의한 권위와 서열을 약화시켰고, 새로운 인재의 수혈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변화는 늘 변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문은 통로인 동시에 장애물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찾아온 인터넷 시장의 독점화는 새로운 가능성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금세 입증해주었다. 플랫폼을 포털과 대기업 자본이 장악하고, 독립적인 웹진들처럼 군소 매체들은 식물화하거나 포털에 종속되어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일부 대중의 비평과 저널 무용론은 본의 아니게 시장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그 자리에 각종 잡기(가십)와 참여를 가장한 홍보도구를 불러들였고, 이른바 전문가들은 ‘재미있는 현상 파악’만을 주문받아 납품했다.

    누군가의 의견과 구분할 수 없는 따옴표뿐인 글과 말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아주 민주적인’ 비평가 혹은 칼럼니스트와 모니터링 요원의 역할을 하는 기자들의 기사 노출 빈도와 TV프로그램의 출연 횟수만큼 전문가와 매체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졌다. 덕분에 괜한 사람들까지 욕을 하도 많이 먹어 배가 터지도록 불러서 욕-다이어트라도 해야 할 사람들로 취급당했다.

    흩어진 점들을 찾아내 선으로 연결하고, 때로는 칼날 같은 차이를 발견하면서 좌표를 만들어 담론을 생성하는 비평과 저널은 향유자에게도, 산업에도 필수이다.

    작품 가이드는 역할의 일부일 뿐이며, 본시 보편의 담론을 생성하여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사회와 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비평매체가 맡아야 한다.

    역사와 장르, 산업과 정책, 제작과 이론, 환경과 트렌드의 이해를 바탕으로 주제·대상별 전문성을 기본으로 삼아 나름의 안목과 관점 그리고 설득력을 지닌 인력과 매체가 존재해야 발굴하고 해석하고 전달하고 폭로할 수 있다. 그렇게 쓸모 없고 저급하고 위험하고 놀랍고 참신하고 귀중한 작품들을 길어 올린다.

    그래서 남의 산물을 품평이나 하는 직업이라는 자학이라든가 예술에 기생한다는 식의 폄훼 따위는 비평과 저널에 대한 졸렬하기 짝이 없는 몰이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무슨 책인지도 몰라야 지껄일 수 있는 소리다.

    시장의 변화와 권력의 집중

    기존의 영화비평과 영화저널을 변호하며 자기권위의 시대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하며, 문제의 ‘한국적 상황’을 말할 차례이다.

    자금의 부족과 편중에 시달려온 영화계에게 자본의 유입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목마 안에서 흘러나온 수익지상주의와 독과점 구조는 트로이처럼 오래된 성벽 위에 새로운 깃발을 꽂았다.

    한국의 문화산업에서 대기업의 플랫폼 독점은 점차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데, 영화시장은 CJ그룹 계열사들이 투자와 배급, 상영관까지 과점했다. CJ 계열인 CGV와 프리머스 시네마가 상영시장의 42.2%를, 그리고 CJ E&M이 배급시장의 41.2%를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 상영시장 25.3%와 배급시장 26.3%를 차지하고 있는 롯데 계열사들의 몫까지 합치면 한국영화시장의 67.5%가 두 재벌 계열사의 점령지이다(최현용, 「한국영화산업 독과점의 실태와 문제점」, 2012).

    그 결과 감독과 제작사는 자본(=생명줄)을 쥔 투자배급사의 지휘 체계 아래에 놓인 처지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산업의 규모는 커지고 있는데도 영화 종사자들의 처우와 매체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영화만이 아니라 멜론과 SKT가 전체 음원시장의 과반을 점유한 것처럼 대중예술 전반에서 소수기업의 독과점 심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구성요소들은 무너져도 산업은 성장하는 양태는 우리사회의 각계에서 공히 찾아볼 수 있다. 게임 역시 산업의 규모뿐만 아니라 수출 부문에서도 다른 문화콘텐츠들을 압도하며 2012년 기준으로 10조5300억 원의 매출액과 27억8700만 달러의 수출액은 기록했지만(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 「2013 콘텐츠산업 전망」, 2013),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액수가 커지는 만큼 해당 업계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소리 없이 부풀고 있는 말풍선들의 크기도 커져가고 있다.

    영화감독 출신으로 제작사 사장이 되고나선 투자사의 지시대로 선배감독을 잘라버리는 사람이 있고, 음악 관련 글을 기고하며 불합리한 관행을 성토하다가 입장이 바뀐 후에는 어떻게든 20년 전 수준의 원고료를 나눠주려는 자도 있다. 그들은 동료와 단합하는 대신 권력과 담함하며 입장의 번복을 반복한다.

    비평과 저널의 쇠락은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읽고 생각하는 작업을 무용하게 만들고, 종사자와 애호가를 연결했던 무형의 공동체를 조각낸 산업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간 하나둘 사라진 매체들에게도 영화노동자의 현실과 독과점 문제를 외면하고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시류에 편승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집중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며, 앞으로는 다양한 문제제기를 기대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류한석기술문화연구소의 류한석 소장은 《주간경향》(1017호)에 “모든 플랫폼은 독점이 심화됨에 따라 여러 가지 산업적․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고 썼다. 여기에 공론화 기능까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비위크》의 폐간과 ‘메가박스+중앙일보 무료 패키지’로의 전환은 이러한 커다란 그림의 한 조각이다. 한국의 영화와 산업이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했는지 기억한다면, 다음의 물음이 영화관객 모두와 산업 전체에게도 위험신호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한국에 씨네필은 존재할 수 있는가?”

    약자가 기득권을 쥔 강자와 싸우는 영화의 히트가 관객의 의식과 행동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현실과 무관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작품과 현실이 분리되어 소비되고 있다. 시장의 자유는 영화들을 현실과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고. 역사 배경과 사회의 합의, 즉 시대의 요청을 내뱉지 못하는 것을 고상한 태도인양 치장한다. 비평과 저널의 책무는 그것들의 연결이었다.

    오늘날 영화와 음악과 예술은 높은 탑과 어두운 감옥의 쇠창살 대신, 바퀴가 달린 쇼핑카트의 철창에 갇혔다. 우리사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쉽게 말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음악평론가,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장,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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