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에쥬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
    [협동조합의 역사 미래 의미] 협동조합 절대시는 오류
        2013년 03월 25일 02:0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J선생님께,

    이번 편지를 마지막으로 제 연재를 마치고자 합니다. 협동조합 법 시행 직전, 협동조합의 경험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시작했던 편지이지만, 이제 협동조합 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이에 따르는 협동조합들이 만들어지면서 저와 같이 외국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현실과는 유리된 군말이 될 수밖에 없겠더군요.

    그래서 예정했던 한 꼭지 글을 뛰어넘고 이제 마지막 편지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연재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협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 그 자체, 사회적경제라는 개념 그 자체, 해외의 경험과 역사적 경험 그 자체를 절대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협동조합, 더 나아가 사회적경제의 요체는 현실의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진취적으로,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한 증거들만 모아다가, 많은 문제들에 대한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이나, 거꾸로 성공이 불가능한 모델로만 몰아가는 양 극단 모두 위험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다양하듯,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의 구체적인 현실태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공존하고, 가능성과 위험성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협동조합/사회적경제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파괴하는 일반화 경향 그 자체일 것입니다.

    사회적경제만으로 이루어진 경제체제를 주장하는 입장은 실질적으로 사회적경제의 요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저는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서구에서 사회적경제 개념이 제안하고 전파해온 핵심적인 논리는 사람들의 민주적 통제에 종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경제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협동조합/사회적경제라는 활동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경제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서 현실에서 그리고 대중의 인식에서 새로운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협동조합의 설립이나 참여를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최근 한국의 협동조합 설립 동향을 관찰하고 이를 유럽의 협동조합 운동과 비교하면서 드는 제 생각을 몇 가지 나누어볼까 합니다.

    1.

    협동을 하는 것과 협동조합을 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협동조합을 위해서는 협동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같은 뜻을 추구하고, 협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협동조합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이 협동을 위해 모인 결사체의 형태 중 특히 ‘경제활동’에 적합하게 발달해온 조직형태입니다. 그리고 경제활동은 현실적으로 기본적인 시장에서의 거래활동을 병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협동조합이라는 틀을 사용할 필요가 없겠지요.

    시장에서의 거래활동에 관련되는 경제활동 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이라면 최소한 그에 걸맞는 경제적 타당성과 진지함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적인 검토를 통해 타당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가급적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계산(또는 외부의 잘못된 조언)으로 일단 창업을 해놓고, 잘 안되면 “협동조합이라서 안 되는 거야”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책임을 묻거나, 정부가 홍보하는 협동조합을 했으니까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배째라’식의 접근은 어렵게 태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부문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엄1-1

     

    엄1-2

    [사진설명] 영국 커뮤니티 샵 – 영국 농촌지역에 인구가 줄어들면서 많은 소매점포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함께 사라지는 동네 사랑방 기능과 최소한의 물품구매 기능을 살리고자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운영하는 커뮤니티 샵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커뮤니티 샵이 고용까지 창출하면 멋지겠지만, 수익이 부족해서 자원활동가들에 의해서 파트타임으로만 운영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협동조합이 아니면 어떻고, 고용창출이 안 되면 어떻습니까? 동네사람들이 함께 협동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2.

    개별 협동조합의 성공은 상당부분 좋은 팀웤과 좋은 리더십, 좋은 업종선택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사실, 이는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이 발달한 나라들의 경험을 보면, 개별 협동조합이 아닌 협동조합 운동 전반의 발전이 다른 일반 기업들이 가질 수 없는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운동을 대표하고 개별 협동조합들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연합체의 존재가 협동조합이 발달한 나라들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협동조합 연합체들은 내부적으로 협동조합의 원칙을 공고하게 다짐으로서 개별 협동조합들이 취하기 쉬운 기회주의적 일탈을 통제, 감독하고, 이를 통해 얻어진 정당성을 바탕으로 협동조합들에 보다 우호적인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을 위해 다방면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합적으로 이루어지는 협동조합 운동의 존재는 한 국가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고, 경제에 대한 대안적인 사고와 실험을 가능케 하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합회들이 개별 협동조합들의 연대와 협동을 바탕으로 회원 협동조합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도 협동조합 부문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 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나, 이탈리아 협동조합 전국연합체들이 회원 협동조합들의 기여금을 바탕으로 조성/운용하고 있는 개발기금은 일반 은행권에서 중소기업들에 대한 대출을 줄이고 있는 최근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협동조합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고유의 금융시스템으로 중요한 역할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연합회 이외에도 경제활동의 규모를 갖추면서도, 지역의 밀착하는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협동조합들 간의 컨소시엄이나 그룹방식의 사업연합체도 주목할 만한 실험들입니다.

    일반적인 기업그룹들이 갖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민주적인 방식으로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으로서 기능을 하는 이러한 컨소시엄과 그룹 모델에 대해서는 이미 이탈리아 컨소시엄들과 몬드라곤 그룹의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령, 몬드라곤 그룹이 가지고 있는 연대기금 시스템은 120여 회원 협동조합들이 매년 결산잉여의 2%를 그룹차원의 연대기금으로 조성함으로서, 해당 년도에 적자가 발생한 협동조합의 적자액 50%에 대해 대출의 방식으로 보전해줍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용유지가 어려운 협동조합의 노동자들은 그룹 시스템을 통해 다른 여유 있는 협동조합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룹차원 협력시스템을 위해 개별 협동조합들은 결산잉여의 28%~54%를 그룹을 통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협동조합 운영모델을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평을 열어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2-1

    엄2-2

    [사진 설명] 스페인의 한 노동자협동조합 그룹 –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노동자협동조합 그룹입니다. 오늘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20여년의 시간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체들의 노력과 우호적인 제도환경을 통해 꾸준히 발전해올 수 있었고, 방문했을 때도 어려움과 희망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협동조합 운동도 이런 어려움과 희망, 그리고 시간을 통해 성장하겠지요.

    3.

    협동조합의 지속가능성은 경제적 타당성과 함께 협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민주적인 시스템과 문화의 정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가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유럽의 많은 협동조합들도 능력 있는 리더에 의한 과두적 성격, 대형 협동조합의 경우 발생하는 관료주의 문제, 전문경영인과 평조합원과의 갈등 등 한국의 협동조합들에서 발견되고, 발견될 문제들을 고루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많은 협동조합들이 무너지고, 실패하곤 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는 분명해 보이는데,

    1) 작은 협동조합들의 경우, 정관이나 내부규칙이 결정적인 순간에 늘 중요하고, 이를 숙지하고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회의와 규칙에 포박당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은 협동조합들에서는 쉽게 그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문제는 중형 이상의 협동조합, 특히 노동자협동조합 유형에서 종종 발생하는 것인데, 업무분장이나 기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평등과 참여를 강조하는 문제(?)입니다.

    업종의 형태에 따라, 그리고 그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자협동조합들에서 업무를 위한 지휘체계와 총회/이사회로 대표되는 조합원들의 의결체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경영진으로서의 관점과 피고용인으로서의 관점의 충돌을 중재하기 위해 내부 구성원끼리 소꼽놀이 같기도 하지만, 선출된 임원진(이들도 노동자이지요)에 대한 균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직원평의회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위치는 그 다음해에 완전히 바뀌어 있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경제활동을 위한 효율성과 참여를 위한 민주성이 균형을 이루기 위한 구성원들의 노력이 일상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익숙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와 교육이 협동조합 운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참여민주주의 모델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영국 노동자협동조합에서 발견되는 평등주의적 모델은 평등임금(시간급 기준), 순환보직을 통한 다기능화, 소규모인 경우는 전체 모임, 대규모인 경우에는 상설 이사회가 아닌 팀별 모임과 팀별 의견을 교환하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한 의사결정 등 매우 높은 수준의 참여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운영형태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런 협동조합은 방문하여 인터뷰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상임대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3) 더 나아가, 최근 주목받는 추세는 하나의 기업으로서 협동조합이라기보다는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플랫폼으로서 협동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지역사회 주체들이 각자의 역할과 기여에 맞게 협동조합 지배구조에 참여하고, 서로 다른 역할과 기능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비전을 위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함께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의 구축이 중요합니다.

    이런 모델의 협동조합들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지역사회에서 협동의 문화를 확장시키고, 개별적인 활동에서 찾을 수 없는 지역순환경제 시스템의 상승효과를 높인다는 점에서 향후 협동조합 운동의 의미 있는 전망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입장과 역할을 협동조합이라는 하나의 조직틀 내부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는 하나하나의 사례를 통해 검토하고 답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러한 경험들의 축적을 통해 다양한 참여민주주의의 기제들이 발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3-1

    엄ㄴ3-2

    [사진 설명] 프랑스 공익협동조합 – 교통이 복잡하고 주차공간이 부족한 도심지역에서 단시간 수요를 위해 차량을 함께 사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입니다. 지역사회의 공익을 위해 지자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용자가 모두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공익협동조합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회가 닿으면, 현장과 운동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제 활동과 공부가 쓰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의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현장, 그리고 진보정치를 새롭게 일구는 현장에서 땀 흘리는 분들로부터 늘 배우고, 함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013년 3월 벨기에 리에쥬에서 엄형식 드림

    필자소개
    대학생시절부터 진보정당의 꿈을 갖고 지역활동에 참여하면서, 소속되었던 정치조직에서는 개량주의자로,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좌파꼴통으로 몰려 늘 소수파의 위치를 고수해옴. 노동자협동조합을 바탕으로 한 대안경제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활사업에 참여하였으나, 뭔가 잘 안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적기업과 사회적경제에 대한 실험에 참여함. 현재 벨기에 리에쥬 대학 사회적경제센터에서 박사과정연구원으로 있으며, 파트타임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국제노동자협동조합/사회적협동조합연맹에서 조사통계담당으로 일하고 있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