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애...미국인네 파출부 이야기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9] 이성과 아들...남자들 이야기
        2013년 03월 25일 11:5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성애 / 남자 / 가부장적 가족에 대하여,

    (필자) 근데 어르신은 다른 깝깝한 여자들에 비해 자유롭고 당당하셔서, 성적인 면에서도 다르셨을 거 같아요. 더군다나 젊어 혼자 되신데다, 몸매도 좋으시고 성격도 활달하여서 어르신을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았을테고. 미군들 빼놓고 그 전이나 후에 남자들과도 사귄 경험이 있으시면 이야기 좀 해주셔요. 그리고 성에 대해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도 말씀해 주시고.

    (김미숙) (약간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활짝 웃으시며) 아~ 젊어서 혼자 되갔고 남자 안사겨봤겠어? 아닌게 아니라 살아오면서 한국 남자들도 여럿 사겨 봤어. 가만 보니까 내가 머 절개지키든 말든 누가 머 어쩔 사람두 없었구.

    캬바레 다니구 할 때 주로 만났는데, 대체루 유부남들이었어. 근데 맻을 사겨도 나한테 아무것도 이익이 없는 거야. 사겨봐서 괜찮으면 생활비라도 좀 대줄려나 싶기두 했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자 혼자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든 세상이잖아. 그 때는 더 그랬구.

    영화 에서 양공주로 일하는 여동생이 나오는 장면

    영화 ‘오발탄’에서 양공주로 일하는 여동생이 직업을 들키는 장면

    근데 생활비 대주긴 커녕 밥 한 때라도 얻어먹을려구만 그래. 누구 하나 십원 한장 도와주는 사내두 없더라구. 게다가 동네 망신당할까봐 조심스럽기도 하구. 본마누라가 알면 대가리 끄들구 머리 끄뎅이 잡아땡기며 싸우게 될 거 아냐. 집에 와서 자구 가구두 했으니까. 그르니 동네 망신할까봐 겁두 나구 그랬지. 그걸 또 때버릴려면 힘들거든.

    한국 남자들은 싫다 그래도 계속 쫓아오구 그러더라구. 여러 날을 친구네 집가서 자구 집에 안들어오구 그러면서 겨우 때버리구 그랬어.

    한번은 피엑스 미국인 책임자였는데, 사귀자며 집에 오고 싶다는 걸 거절했었어. 근데 그 사람들은 한번 노 하면 그걸루 딱 끝나. 절대 두 번 다시 귀찮게를 안해. 한국 사람들하구는 아주 딴판이더라구.

    (필자) 한번 거절에 끝나버려서 좀 아쉬우셨겠네요.

    (김미숙) 아닌게 아니라 좀 아쉬웠어. 그 사람하구 사겼으면 양키 물건이라도 더 싸게 많이 사구 해서 돈두 많이 벌구 했을 텐데. 모르지, 집 맻채 샀을지….ㅎㅎ

    내가 성, 섹스 머 그런거는 여엉 발달이 안됐는지 별 취미가 없었어. 남편 만나서두 내가 머 나무대기 같아서 지가 바람핀다는 둥 그러더라구. 그러니 남자 사귀는 게 아무 필요가 없는 거지. 돈이나 좀 도움을 받을까 하는 건데 그렇게 만나는 한국 놈들은 다 건달들이더라구. 성이 발달됐다구 하더라두, 내가 거기 미쳐서 살 수는 없는 거지. 그걸루 세상을 사는게 아니잖아. 여자 혼자 자식새끼 키울려면 정신 차리구 살아야 하는 데. 난 그런 사람은 아냐.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루 딱 한번 제대로 맛을 느껴본 적이 있었어. 캬바레 댕기면서 만난 한국인 대위였는데, 정말 잘 하더라구. 근데 그거루만 사는 거 아니니까 더 미칠까봐 빨리 때 뻐렸어. 더 미치면 못때잖아. ‘정들기 전에 저기 허자‘ 허구, 오지 말라구 그랬어. 알아듣게 여러 번 얘기해도 자꾸 집으로 쫓아오더라구.

    경기도 어디 미군부대 근처 시골서 셋방살 땐데, 밤에 와서 문 뚜들기구 하니 안집두 있는데 안열어줄 수가 없잖아. 더구나 동지섣달이어서 무지 춥기도 했구. 그래서 문 열어 주구는, ’나 젊어서 돈벌어야지, 당신하구 이렇게 엔조이나 하면서 살 여유가 없다. 날 먹여 살릴거냐? 속채려라.‘ 그러면서 그냥 한 구석에서 자구 가게만 했어.

    겨우 때어내구 한참 지났는데 한번은 그 대위 여편네가 어린애를 업고 찾아 왔더라구. 그래서 ’벌써 오래 전 이야기고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때뻐린 지 옛날‘이라구 하면서 아무게 집으로 가보라구 알려줬어. 또 딴데 여자를 뒸다구 소문이 쫘악 퍼졌었거든. 그 남자가 여엉 바람둥이였어. 잘생겼다구 난리들인데, 난 우리 애 에비가 워낙에 잘 생겼어서 그런가 잘 생긴 줄은 모르겠구, 육체관계는 정말 잘하더라구. 그 때 딱 한번 느껴봤어.

    그루구 미군들하고 살림한 거 말구 다른 한국 남자들은 없었어. 먹구 살기 힘들어서 그럴 겨를두 없었지. 눈만 뜨면 물건 사다 팔아야 된대는 그 생각, 머릿 속에 그것밖에 없었어. ‘젊어서 벌어야 늙어서 고생 안한다.’ 그 목적은 그래두 좀 이룬 거지.

    남자, 섹스, 가정, 그런 거가 나한테 중요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 그저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한다….거러구 산거야. 철 없을 때 평양서 서울로 친구랑 놀러 내려와서 우연히 모든 줄이 끊어져 깜깜할 때 겨우 잡은 동아줄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든 썩은 동아줄이었던 거지.

    가난한 무능력자에 계집질과 아편질까지 일삼는 남자. 그 새끼와의 인연 때문에 내 인생이 뒤집힌거구. 그런데 그 새끼 자살로 그 연을 끊고서야 다시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야. 그르구, 이전 평양에서의 나는 이미 없었어. 다시 혼자가 돼서 부닥치며 살아야 했던 거야. 여자가 혼자 벌어먹고 사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평생 죽어라고 일을 해도 겨우 밥만 안굶고 사는 거야.

    남자에 기대보려고 했지만 누구 하나 기댈게 되지 못하는 게 남자들이었어. 순결 정조 머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한 거는 아닌 데, 남자들 만나고 관계를 맺어봤자 오히려 나 살기만 더 복잡하고 힘들어지고, 얻는 것도 없이 시끄럽게 말려든다는 생각에 그냥 별 관심이 없어지더라구.

    딱 한번 잠자리의 진짜 맛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거에 빠져봤자 나만 더 손해보고 망가질거라는 두려움에 오히려 도망치게 되더라고. 남의 남잔데 내가 못빠져나오면 나만 망치는거지 내가 멀 어쩌겠어?

    그런 남자들 천지에 한번 결혼할래다 포기하고 나서는[이 부분은 뒤에 상세히 구술], 남자구 가정이구가 나한테는 허깨비루 여겨지더라구. 남편 덕에 잘 사는 여자들 보면 겉이 아닌 속내는 내가 알 수 없으니 머라구 못하는 거겠지만, 하여튼 나한테는 그런 팔자가 영 가당치도 않구, 사느라구 바빠서 부럽지도 않구 그랬어.

    지금도 그래, 성질이 더러워서 내가 누구한테 미안한 짓이야 했겠지만, 큰 죄 안짓구 남 안돌라먹구, 내 인생 뼈빠지게 기를 쓰구 내가 산건데 미안하구 주눅들구, 후회되구 할 게 머있어?

    그래서 그런가 노인 우울증 머 그런 거가 나는 없어. 딱 하나, 죽을 때 시간 끌지말구 얼른 죽었으면 싶어. 그러구는 천당을 가든가 어딜 가든가, 지옥 갈 일은 안한거 같으니까 죽고나서 걱정도 없구. 내가 어릴 때구 이제는 그냥 배짱으루 사는거야. ㅎㅎㅎ

    댁 보기에 잘 살았다니, 나도 한번 생각을 해봐야겠네.

    (필자) 경제적으로 힘들기는 하셨지만,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게, 정말 당당하게 어르신 삶의 주인으로 사신거네요. 정말 어르신은 제가 본 분들 중 드물게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 선배셔요. 어차피 인생이야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거구, 어르신 자신이 어떻게 느끼시느냐가 중요한 거잖아요.

    (김미숙) 글쎄….내가 남들보다 머 어쩐가는 모르겠고, 또 그런거는 상관도 없어. 그냥 ‘내 인생 내가 살아냈구나’ 그런 생각이야. 댁 보기에 잘 살았다니, 나도 한번 생각을 해봐야겠네. 머를 잘했고 머가 모자랐는가, 머를 더 하고 가야 좋은가…. 댁 생각에는 내가 머를 더 하면 좋겠어?

    (필자) 글쎄요. 어르신이야 어르신이 알아서 하시는 거지만, 저 같으면 죽기 전에 미운 사람이랑 푸는 거는 좀 하고 갈까….싶어요.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겠지만….

    (김미숙) 그르게… 나야 머 다른 미운 사람이 있을 게 머 있어. 아들 며느리 미운거야, 지네 잘되라고 미운거구…..

    (필자) 근데…. 제 나이 또래 여자들이랑 마음 터놓고 얘기하다보면 모두들 어렸을 때 크든 작든 성폭력 경험들이 있더라구요. 다들 말을 안해서 그렇지…. 특히 친척 오빠나 가까운 남자들한테서 사실은 많이 당하거든요. 어르신은 어렸을 때 성폭력 경험은 없었어요?

    (김미숙) 성폭력 그런거까지야 모르겠구, 열일곱 한참 성숙했을 때 외갓집 사촌 오빠가 우리 집에 잠깐 와있었거덩. 근데 그 놈이 자꾸 내 가슴이랑 엉덩이를 만질려구 하더라구. 난 그게 징그럽구 아주 싫었거든. 게다가 지가 사촌오빤데 누가 그러더라도 못하게 해야 하는 일가잖아. 그래서 내가 ‘이 새끼 왜 이러냐?, 저리 가지 못하냐?, 무슨 짓 하느냐?, 우리 아버지랑 니 아버지한테 말해버린다.’ 그러구 난리를 쳤지. 그러구 나니 그 짓을 안하더라구. 그러다가 곧 저의 집 가버리구.

    유부남과 사귀는 게 결국은 도둑질이자나, 남의 꺼니까. 그래서 여엉 찝집하기는 한데, 그래도 좀 경제적으로 실속이 있을라나 했는데 그런 것도 없구 하니까, 유부남들이랑 길게 연애를 하게 되지가 않더라구.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니까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사귀고는 싶더라구. 그러다가 결론은 에이 이깟 놈의 것, 실속은 없고 속곳밑만 닳는 짓이구나, 이렇게 된거지. 쌍말루 하자면 보지만 닳는다 그거야.

    외아들 키운 이야기 / 재혼의 기회 / 미국인네 집 파출부

    (필자) 아들 키운 이야기 좀 해주셔요.

    (김미숙) 한번은 본정 근처에서 살면서 아들 두 살 때나 됐을 땐데, 여기 이화동에서 저기 동대문 정도 되는 거리에 우리 친구가 있었거든. 내가 걔를 업고 그 친구네를 몇 번 갔었어. 근데 어느날 걔를 안데리구 집을 나서서 일을 보고는 친구네 집에 들렀는데 그 어린 게 글쎄 그 집 계단을 기어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걔를 데리고 집에 오니까 시어머니가, ‘아니 애를 데리고 나가면 그런다고 말을 해야지, 애 없어진 줄 알고 난리를 치고 찾았’데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애 안데리고 나갔었어요. 근데 친구네 가보니까 얘가 그 집 층층대를 기어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더라구요.” 그랬더니 우리 시어머니가 곧이 안들어. 말도 안되는 소릴 한다구 나를 더 야단치는 거야. 거짓말까지 한다구.

    벌어먹구 살려니까, 양색시들 옷장사 돌아다니면서는 아들은 큰어머니한테 맡겼었어. 근데 애들 큰어머니가 어른들한테는 그렇게 잘할 수가 없는 데 그 애한테는 그럴 수가 없이 구박을 하는거야. 서모도 그런 서모가 없게 독하게 한 거야.

    세 살에 맡겨서 열두 살에 데려왔는데, 그 집이 못살고 큰아버지가 배운 것도 없어서 멀리 왕십리까지 가서 밭을 세내서 시금치 김장배추 그런 거를 키워서 내다 팔았거든. 채소를 뽑으면 열두살짜리 애한테만 그걸 니아까에 싣게 해서 혼자서 시장으로 끌고 오라 그러고, 저그 두 내외는 차타구 갔대. 자기네 애들은 다섯인가 그랬는데, 시킬려구두 안한 거지. 걔가 그 집 오남매보다 컸었거든.

    난 몰랐지 그걸. 나중에사 아들이 얘기를 하니까 알았지. 우리 시어머니가 내가 데리고 나가려구 해도 못데려 나가게 해. 늘 장사 돌아다니느라 바쁜데 데려갔다가 어디 잃어버리고 죽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거지. 지네가 부려먹을려고 그런 걸 내가 몰랐던 거야.

    내가 보니까 나 혼자서 한달에 딱 쌀 한말을 먹더라구. 어린 게 나만큼이나 먹어? 그래도 내가 달마다 꼬박꼬박 쌀 한말을 보냈었어. 애미 애비 없는 자식이 옷마저 그러면 안되겠다 싶어 옷도 자주 사서 줬고. 근데 큰어머니가, 지새끼들 양말 한쪼가리 안사줬다고 불평을 하더라구. 아니 내가 밥값 지대로 내고 하는데 머하러 지 새끼들 양말이니 옷이니를 사주냐구.

    나 먹지 못하고 모은 돈으로 쌀하고 옷하고 사보내는 건데, 내가 무슨 무쇠 떵어리야? 더구나 시어머니가, 내 아들이 자기네 자식이니까 자기네가 키운다 그랬었거든. “너는 니가 알아서 시집을 가라. 애는 우리가 키우겠다. 명 길면 살고 명 짧으면 죽을테니 애 걱정은 말아라. 너 하나나 알아서 해라.” 그 소리를 자주 했었어. 그러니 저그네 새끼잖아, 박씨네 새끼. 그래두 에미라고 쌀주고 옷주면 됐지 멀 더 바래….

    애가 열두살이 되니까 우리 맏동서가 이젠 죽어두 애를 못키우겠대. 그 애 하나가 지네 애 다섯 키우는 거보다 더 힘들대나 머래나. 아, 나더러 애 놓고 시집 가라고 그랬으니, 나 없다고 생각하고 저그 박씨네 자식 저그네가 키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나 시집갔으면 어떡할거야? 저그가 키워야 될 거 아냐? 근데 그렇게 못키우겠니 힘드니 하고 난리를 치구 지랄을 하구 자빠졌더라구. 애가 열두살이 되도록 학교도 하나도 안보냈던 거야. 그래서 내가 걔를 데려다가 가평에 하숙을 시켰어.

    그루구는 그 박씨네 사람들하구는 딱 발을 끊었었어. 가평 하숙집 여자가 한 달에 쌀 너말 달래서 두말도 안고 그랬더니 밥도 배부르게 먹이고 옷도 깨끗이 빨아 입히고 그렇게 잘할 수가 없어. 그러니 애도 좋구 나도 신간이 편한 거지.

    그런데 어떤 남자가, ‘아, 자식을 공부를 안시키면 어쩌냐?’고 ‘더 늦기 전에 공부를 시키라’는 거야. 그래서 늦은 공부니까 우선 선생 하나를 붙여서 과외를 시켰어. 그랬더니 왜 그랬는가 애가 달아나 버렸어. 가출을 한 거지. 지 친가말고는 천지에 아는 데도 없는 애가 글루는 안갔데고, 어디 찾을 데도 없더라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와서 더 찾지를 않고 포기를 하고 있었어, 한 삼년을.

    애 가출하구 삼년 된 해에 내가, ‘이제 서방두 없구 자식도 없구 그러니 시집을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구 선을 봤어. 그 때 내가 양색시들 외상값 받으러 강원도 원주 한 여관에 여러 날을 있을 때야. 자구 일어나니까 부대가 싹 원주로 떠났고 그러니까 양색시들도 부대 따라서 원주로 갔던 거지. 그러니 어떻게?, 외상값 받으려면 원주까지 쫓아가야자나.

    그 원주 여관 주인이 나를 잘 보고 중매를 선거야. 남자는 아주 못났어. 그래도 애 아범은 얼굴도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그랬는데, 그 선본 남자는 아주 촌스럽구 못났구 베기 싫게 생겼던 거야. 키도 작고 거기에 내 아들만한 아들까지 하나 있고. 그른데 그 남자가 고등학교 선생이래.

    그르니 내가 그동안 벌어먹기 너무너무 힘들어서 마음이 쏠렸던 거야. ‘에이, 남편 낯짝 파먹구 사냐? 밥이나 편하게 얻어 먹구 살자….’ 싶어서 마음을 정하고 따악 살림 합할 약속을 했어. 살림을 여기 이 집에서 하기로 했어. 이 집은 양키물건 장사해서 사놓고 있었잖아. 가서 집 고쳐놓고 맻날 매칠까지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지.

    원주쪽 내 살림이야 여관방인데 정리하고 말 것도 없었어. 서방인지 남방인지 데려 올래믄 수리라도 해 놓구 데려오려구 한거야. 여기 와서 막 집을 고칠라고 공사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아 집 나간 아들 새끼가 떠억 하니 기어 들어오지 않았겠어.

    근데 참 사람 마음이 그렇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시집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철썩같이 약속까지 해놔 놓구서는, 자식이 들어오니까 마음이 싸악 뒤집어지는 거야. 머 어쩔까 고민을 하는게 아니구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싹 바뀐 거야. ‘아, 내가 남의 아들 키워줘서 머하겠느냐? 내 자식 들어왔으니 내 자식이나 키우구 살아야지….’ 그렇게 마음이 뒤집어지더라구.

    그래서 집수리하고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안간다 못간다 소리도 없이 연락을 딱 끊어 버린거야. 아들한테도 이런 저런 한마디도 안하구. 한 삼년 만에 들어왔으니 걔가 열아홉이나 스물이나 됐었어.

    그 때까지는 아들은 학교는 한번두 다닌 적이 없어. 평양서 같이 온 친구 그 년 있잖아, 그년이 내 집 여기서 살 때 좀 데리고 있으랬더니 오륙개월이나 데리구 있었어. 근데 공부시킬 생각도 안하고 전기 다마 만드는 공장을 보내서 손이 죄 베어 가지구 많이 다치구 그랬더라구. 왜 남의 자식 데리고 있으면서 그렇게 험한 일을 시켜? 그 여자가 평생 나를 이용해 먹었어, 내 인생에 오나가나 거머리처럼 붙어서 꼬여 놓는 거지….

    우리 아들 마흔 두 살까지 내가 데리고 먹구 입히구 하면서, 신학대학 4년 연구과 3년 목회학과 1년, 8년을 목사 공부를 시킨 거야. 일반 공부를 안해서 밑바닥 공부가 없으니까 목사되는 공부를 더 오래 한 거지. 저 마흔 두 살, 나 예순 네 살에 목사안수를 받은 거구.

    그 동안이고 그 다음이고 지가 나한테 돈 십원 한 푼을 안갖다 줬대니까. 누구 닮아서 그런지 몰라. 나는 열네살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평생 내 손으로 내 몸땡이루 먹구 산거자나. 습성이 지 애비를 닮았나….

    외국인 가정부

    한국가정에서 파출부, 가정부 일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한 모습

    아들 목사공부 하는 동안, 나 육십에서 육십 넷까지 딱 4년을, 미국 사람네 집 파출부를 다녔어. 그 사람들은 딱 4년을 계약하구 한국을 들어오니까 나도 딱 4년을 한 거지. 미국집에 들어가서 식모로 일하던 친구가 소개해 준 자리였어. 하루 걸러 컴 가서 아침 아홉시에서 저녁 여섯시까지 꼬박 아홉 시간을 서서 일만 하는 거야. 단 오초 일초도 앉았을 시간이 없어.

    근데 한국 사람 집에 들어가 살면서 한 달 내내 묶여있는 다른 파출부들보다 내가 더 받기는 했어. 현관문 닦기가 젤루 힘들어. 양짝이 열여섯 면인데 그걸 딱구 나면 땀으루 속 빤쓰까지 다 젖는다니까.

    그 사람들은 보통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오는데 내가 주변머리가 원체 없어. 원체 고지곧대루 여서 샤워 한 번을 못해. 남들이 그러는 거 하구 나하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저엉 땀이 많으면 물 한바가지 떠가지구 저 베란다 가서 씻구 말지.

    그런데 한번은 하도 땀나서 화장실 물 틀어서 좀 씻었더니 그 미국년이 머래는줄 알아? 너네집은 수돗물도 안나오냐는 거야. 그것들은 대대손손이 껌댕이들 부려먹던 게 있어서 우리같은 사람이 사람으로 안보이는거야, 불쌍한 생각 안하는거야. 그래서 그 후로는 저엉 땀 씻을 일 있어도 따로 그릇 하나를 두고 거기 물떠서 베란다에서 쓰고, 그 집 화장실도 안 쓰려고 집에서 미리 보고 가고, 가서도 참고 그랬어.

    내가 세상을 그렇게 살았어. 몸은 힘들어도 신간이 편했어, 파출부는. 뺏길 염려도 없고 잡혀갈 염려도 없고. 자기네 노는 날은 일하지 말래. 청소기랑 돌리면 소리가 시끄럽거든. 그러니까 자기네가 집에 있는 날은 쉬래. 내 사는 주인집 전화번호 줬으니 내가 집에 있을 때 전화해 주면 오죽 좋아? 막상 가야지 그때사 오늘 자기네 쉬는 날이니, 집에 가서 쉬라는 거야.

    그래도 그날 돈은 주고 쉬라고 하지. 원래는 일하는 날인데 자기네 사정으로 쉬니까. 계산은 분명한 사람들인 거지. 만일 내가 아파 쉬었다면, 돈을 안주는 거지. 근데 내가 하루라도 내 사정으루 쉬어본 적이 없어. 점심은 쌀 한말을 미리 사줘. 가루커피 한 통하구. 그래서 점심먹고 커피한잔 마시는 게 지금까지 습관이 돼 있어. 반찬은 딱 미군부대서 나온 깡통 하나야. 그게 우리한테는 반찬이 안되지.

    미국 사람 집에 들어간 게 너무 고마워서 혹시 마음에 안든다구 그만두라 할까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을 했어. 일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를 내가 안시켰어. 알아서 깔끔하게 미리 다 마음에 맞게 하는 거지. 청소하구 빨래하구 옷 대리구 그게 내 일인데, 그걸 아홉시간 꼬박 해두 시간이 모자라는 거야. 옷들은 물론이구 팬티부터 수건에 행주까지 다 빳빳하게 다리는 거야.

    (필자) 파출부 일 4년 하고서는 그 다음 다른 일은 어떤 걸 하신 거에요?

    (김미숙) 파출부 딱 4년 하구 그 사람들 미국 들어가고 나서는 나이도 그렇고 해서 다른 일을 찾기가 힘들더라고. 아들이 목사공부 하고 있는 중이니 전처럼 미군부대 근처로 들어가 양키물건 장사를 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사논 이 집에 딸린 가게방에다 과일장사를 시작했는데, 그게 앞으로 남고 뒤로 밑가는 장사더라고. 안팔리는 게 상하구 하니까 별 이문이 없는 거지. 그래서 곧 그만 두구는 이 집으로 내가 들어 온거지. 여기 살던 친구년 내쫓구는. 아들 목사공부 8년 동안을 파출부 할 때부터 시작해서 매일 산을 다니면서 기도를 한 거야.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