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은 선한 제국주의 나라"?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우리’ 영국인의 야만성—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
        2013년 03월 25일 10: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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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가 점령하여 지배하는 폴란드에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고국을 떠나 뱃사람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영국에 정착하여 영국을 대표적인 작가가 된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 중에 <어둠의 심연>이란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말로우라는 영국인 화자가 벨기에가 지배하는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에서 선장으로 일한 경험담을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콩고 식민지를 경영하는 벨기에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콩고에서 상아를 모아오는 일을 주로 하는 벨기에의 무역회사에 선장으로 취직한 말로우는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멀리서 무리지어 움직이는 그 지역의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사슬에 묶여 있는 모습에는 익숙해 있잖아. 그런데 그곳에는, 그곳에서는 어떤 흉악한 것이 자유롭게 설치는 것을 볼 수 있었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그들은 · · · · · 아니야,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 실은 그런 생각이 제일 끔찍한 일이었어. 그들도 어쩌면 인간일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실해졌어. 그들은 소리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고, 빙빙 돌며 무시무시한 인상을 썼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도—우리들과 똑같은—인간이라는 생각, 즉 이 야성적이고도 격렬한 소란이 우리와 아무 관련 없진 않다는 생각이었지.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중)

    말로우는 사슬에 묶여 있는 아프리카 사람은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고 이럴 때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람이 사슬로 묶여 있다면 겁먹을 것 없이 구경거리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슬로 묶어 놓지 않더라도 일정 지역에 가두어 놓고 총과 같은 무기로 감독을 하면서 일을 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문제될 것 없다.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짐승을 사냥하듯이 생포하여 아메리카의 식민지 농장에 갖다 놓고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아프리카 사람들이라는 괴물들에게 족쇄를 채워놓아서 그들의 야만성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우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서 끔찍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슬로 묶어 놓지 않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야수성이나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암흑의 힘을 가지고 유럽 사람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우는 여기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연장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럽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럽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정신적 물질적 문명을 이들이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는, 반은 야수이고 반은 인간인 종족이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이라고 말로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인인 말로우가 볼 때 이런 반인반수인 아프리카 사람들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 사명이 유럽인에게는 있으며 이런 사명이 바로 하느님이 백인에게 부여한 문명화의 사명인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백인이 수행하여 할 문명화의 사명은 아프리카적 삶의 방식을 벗어나게 하여 백인과 같이 백인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길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백인이 원하는 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개량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로우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하여 말할 때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야수와 같은 괴물이라고 말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하는 유럽 사람들에 대하여 말할 때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과 별 차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사람이긴 하지만 이들을 문명세계로 이끄는 일은 영국인만이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 표지

    ‘어둠의 심연’ 표지

    다음은 이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유럽 밖의 세계를 정복하고 경영하는 문제는 단지 힘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문제라는 말로우의 주장이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들이 아니야. 나는 그들의 경영이 단지 착취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들은 정복자들이지. 그리고 정복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무력만이 필요하지. 이걸 이루었다고 해도 그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지. 이런 무력이란 것이 사실 다른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만 생겨난 우연에 불과하니 말이야. 그들은 뺏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빼앗았던 거야. 이것은 폭력을 쓰는 강도짓이고 끔찍한 살육이지. 그들은 이런 짓들을 마치 어둠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같이 앞뒤 안 가리고 저질렀던 것이야. 땅덩어리를 정복한다는 것은 대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거나 코가 좀 낮은 사람들에게서 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기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멋진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런 추악한 일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념이야. 이런 일을 뒤받쳐주는 이념 말이야. 감상적인 허식이 아닌, 바로 이념 말이야.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 말이야.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중)

    말로우는 여기에서 식민행위와 정복을 구분하면서 이 두 행위가 다른 지역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찬탈한다는 점에서는 구분되지 않지만 이념에 근거하여 행동하면 식민 행위가 되고 이념을 갖추지 않으면 정복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말로우는 이 소설에서 콩고를 정복하여 상아를 찬탈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벨기에 사람들을 정복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말로우가 만나는 중요 인물인 커츠는 무역회사에서 가장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간부 사원인데 그는 상아를 더 많이 모으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을 살육하고 아프리카인들의 잘린 머리를 자기 집 울타리에 꽂아 놓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런 벨기에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영국의 방식임을 말로우는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즉 제대로 된 식민지 경영 방식으로 영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여야 하는 것은, 식민지를 경영할 때 단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념을 갖추고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우가 말하는 이념이 무엇인지 이 소설에서는 명시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소설과 짝을 이루는 콘래드의 다른 소설 <로드 짐>을 읽어 보면 영국인이 갖춘 이념이 무질서의 세계를 질서의 세계로 이끄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로드 짐>에서 영국인 짐은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에 해당하는 파투산이라는 지역에서 스스로 질서를 구현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을 위하여 원주민 사회 내부의 반란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시켜 준다. 여기에서 말로우가 언급하는 이념이이란 문명과 거리가 먼 야만적인 삶을 살아가는 미개인들에게 문명의 빛을 전달하여 인간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우는 여기에서 문명화의 사명이 영국인들만이 실천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영국은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다른 유럽인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우월한 식민지 경영인들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이 정복한 지역의 자원들을 약탈하는 데 골몰한 것과는 달리 영국인들은 정복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곳을 문명이 꽃피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람직한 식민 정책으로서의 정착 식민주의가 실현되었던 지역으로 영국인이 이주하여 그곳 주민이 되었던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을 예로 든다.

    그러나 영국인들이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정복이나 약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따져보면 사실과 어긋날 뿐 아니라 정복이나 약탈이라고 비난하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 경영 방식보다도 더 악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인들이 나이지리아, 수단, 남아프리카 등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현재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그리고 인도를 망라하는 인도 대륙 지역, 남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 지역을 경영할 때는 다른 나라의 약탈 식민주의의 경영방식과 다를 바 없었다.

    영국이 더욱 악랄한 것은 그들이 자랑하는 정착 식민주의가 사실은 그 곳의 원주민들을 완전히 몰살 시키고 나서 그곳에 정착하여 사는 것을 바람직한 식민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영국인이 자랑하는 정착 식민주의가 실현된 미국,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는 원래 그 곳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곳에 정착하는 과정은 원주민들을 몰살시키는 과정이었다. 이제 그곳의 원주민이 거의 멸종 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 소설에서 말로우는 이러한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콘래드는 폴란드 출신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의 세계정세에서 영국이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영국에 정착하고 결국 영국의 신민이 되었다. <어둠의 심연>에서 말로우는 작가 콘래드의 대변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폴란드를 점령한 러시아를 혐오하였던 콘래드는 당시의 최강대국인 영국만이 러시아를 제어할 수 있는 국가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영국을 자신의 제2의 고국으로 선택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콘래드가 옹호하는 영국은 당시의 최강대국으로서의 영국이지 역사적이거나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가치를 수행하고 있던 영국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영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영문학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실에서 다루는 영문학 작품이 사실은 영국 사회 내부에서는 지배계층이 주도하는 질서를 옹호하는 역할을 하고 영국 사회 외부에 대해서는 영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가치를 주입하는 역할을 해왔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작가나 주인공의 가치가 옳은 가치라고 믿으면서 읽는 것은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는 태도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해당 사회에서 그가 갖게 되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산으로 인하여 그 사회의 주류에 속한다. 이런 주류 작가의 가치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는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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