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전체주의' 사회에 산다
        2013년 03월 21일 01: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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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금 심한 폐통(肺痛)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직장에도 못가고 집에 남은 상태에서 제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저의 다소 슬픈 인상들을 하나하나씩 천천히 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13년 전에 노르웨이로 이주왔을 때에는 “일반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살기 편한 사민주의 국가”로 간다는 자부심을 대단히 많이 갖고 있습니다. “살기 편한” 것이야 여전히 사실이지만, 저는 지금 제 집 창문에서 줄줄이 내리고 있는 눈을 응시하면서 이 “편함” 속의 일종의 전체주의적인 실체를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전체주의같이 쏘련이나 북조선을 보통 지칭하는 말을 감히 이 세상에서 인간계발지수가 제일 높은 곳 (관련 링크) 에 대해서 쓰다니 망언이 아니냐는 반론이 아마도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통념과 달리 국가/자본이 피지배자들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피지배자들이 지배관계에 대한 반발 등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전체주의는 꼭 “높은 생활수준”과 충돌하지 않고, 그 반대로 오히려 “높은 생활수준”이야말로 진정한 전체주의의 굉장히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배가 하도 고팠던 30년대 말의 쏘련에서는 전지전능했다는 그 국가는 질 나쁜 가제 (家製) 보드카를 마시면서 “이 관료 새끼”들에 대한 온갖 육두문자를 쓰고 가능만 하면 공장이나 집단농장에서 뭔가를 훔치려 하는 말단 노동자나 농민의 “모든 것”을 지배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은, 그 만큼 말단 일꾼들의 직장에서의 각종 태업式 저항부터 지식인들의 비판, 저항까지 스딸린주의에 대한 반발이 꽤나 많았다는 점을 반증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전체주의”라기보다는 혁명을 계승했으면서도 그 혁명의 정신을 부정한, 민중의 신분상승을 가능케 하면서도 잔혹한 수단으로 공업화를 초고속으로 이루는 전형적인 “좌파적 권위주의”뿐이었습니다.

    “전체주의”를 실시하기에는 당시 스딸린 시대 쏘련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의 기초적 물질적 요구마저도 충족시킬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데다가, 혁명의 (좋은 의미에서의) 계몽주의적인, 해방적인 유산이 아직도 강하게 남았던 거죠.

    이와 달리 노르웨이 등의 후기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명실상부한 전체주의를 십분 실시할 좋은 위치에 놓여져 있습니다. 일단 항목 별로 제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선진형 전체주의”의 특징들을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영화 '에너미오브스테이트'의 한 모습

    영화 ‘에너미오브스테이트’의 한 모습

    국가/자본의 對民 통제 능력

    “초고속 공업화”를 당연히 필요하지 않는 후기 자본주의 핵심부 사회는 자원 총동원 차원에서 쏘련이나 북조선처럼 경제를 완전하게 국가화할 일도 없습니다.

    그 대신 – 과세 차원에서 필요하기도 하지만 – 각 개인의 모든 경제적 활동은 빠짐없이 국가에 의해서 포착됩니다. 세무서는 모든 주민들의 모든 은행계좌들을 다 파악하고 있으며, 예컨대 책을 써서 내는 등 주된 소득 이외의 그 어떤 “부업”을 할 경우에는 이에 대한 세무서 신고를 꼭 해야 합니다.

    계좌에 돌연히 일정한 액수 이상의 돈이 들어오거나 빠져나올 경우에는 대개 그 배경이나 용도에 대한 세무조사가 꼭 따릅니다.

    구쏘련이나 북조선처럼 집 옆의 텃밭에서 그저 오이를 가꾸었다가 시장 서는 날에 거기에 가서 팔아서 그 돈으로 새 옷 몇 벌을 사는 방식의 삶은, 노르웨이 같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농민시장도 없지만, 농업관련 관청에서 등록돼 있지 않은 농업생산이나 세무신고 없는 농산물 판매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디가 전체주의인가요?

    각자 소득 및 경제활동에 대한 완전한 파악 및 통제는 복지국가 운용에 필요한 것이라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국가 내지 자본이 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지 알 수 있는 것은 이외에도 천만 가지입니다. 개인 사회보장번호 (국내 주민번호 해당) 없이는 약국에서 아주 일상적인 약품 이외의 다른 약도 살 수 없기에, 그것과 다 전자화되어있는 제 주치의의 환자 상담 기록 및 저의 입원 치료 관련 기록 등으로 저의 신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 것입니다.

    혹시나 필요하기만 하면 은행의 데이타베이스에서 다 남아 있는 저의 카드 사용 내역이나 통신사가 온전히 다 갖고 있는 휴대폰 통화 내역 등으로는 관계망부터 여행 등 공간적 이동에 관한 모든 정보까지 다 입수가 가능합니다. “투명 인간”? 네, 사실 “투명인간”에 거의 가까운 것이죠.

    피지배자들의 지배체제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태도

    이건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투명 인간”보다 더 무서운 대목입니다. 우리 모두가 완전한 “투명인간”이 된 데에 대해서 다수가 경각심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몰라도, 이런 경각심 내지 우려 등을 노르웨이에서 찾기가 힘듭니다.

    여론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대체로 75-85%의 노르웨이 주민들이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신문들이 노르웨이를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지칭할 때에는 이를 보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재벌들이나 정부는 무엇을 해도 절대 다수는 “우리 민주 사회에서는 권력 악용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저 그런가 보다 싶어하면서 넘어갑니다.

    노르웨이판 삼성이라고 할 국영 석유회사 스타트오일이 알제리, 앙골라, 아제르바이잔 등 최악의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들과 손잡고 그 자원 약탈에 일익을 담당해도 거의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이고, 노르웨이 폭격기들이 지난 번에 리비아에서 수 만 명의 민간인들을 비참하게 살해했다는 뉴스보도가 나와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습니다.

    “우리 정부면 당연히 선한 정부다”! 아아, 스딸린이나 김일성이 이와 같은 무조건적인 “밑으로부터의 옹호”를 그저 꿈만 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병원 가야 해서 남은 이야기를 다음 기회에 하겠지만, 저의 결론은 확실합니다. 만약 이 구조는 어떤 위기적 상황에서 파쇼화된다면, 예컨대 이슬람 신자들을 죽음의 수용소에 보내는 데에 대한 민간으로부터의 반대 같은 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파쇼 독일에서 거의 아무도 유대인의 학살을 반대하지 않았듯이 말에요. 정말 소름 끼치지만, 사실입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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