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의 실험,
추첨제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기고]기대와 우려 속에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새 길을 가다
    2013년 03월 20일 03:32 오후

Print Friendly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겠지만, 나는 민주주의 원리 중에 ‘공평한 기회’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고 싶다. 돈이 많든 적든, 학력이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장애가 있든 없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개방성’도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높은 문턱을 넘으려면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게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소통’을 들고 싶다. 소통이 없다면 독단이나 독재에 다름 아니다. 지난 정부도 마찬가지였지만, 박근혜 정부가 우려스러운 이유 중에 하나는 소통의 부재에 있다. 귀를 닫아버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기회는 공평한데 문턱이 높다거나, 개방적인데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어딘가 삐끗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좋은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일은 난제다.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흔히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구성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관리위원회의 현수막을 눈에 박히도록 봐왔던 우리는, 마치 선거가 민주주의의 가장 최선의 절차라는 믿음을 당연한 진실로 여겨왔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듯이,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기구들이 다원화된 시민들의 생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히려 선거는 기성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버나드 마넹(<선거는 민주적인가>의 저자)의 지적처럼,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가 아니라 대중의 참여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지난 3월 16일은 세계 정당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공평한 기회와 개방성, 소통의 원리가 잘 반영된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행사가 용산역 바로 옆 철도회관에서 진행됐다.

녹색당이 창당 이후, 첫 대의원대회가 개최된 날이고, 전원 추첨으로 뽑힌 대의원들이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대의기구를 제비뽑기로 선출한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아이디어였지만, 그것을 한 정당이 현실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조금 더 자랑을 하자면, 140명의 대의원 중 88명이 참석하여 63%의 참석률을 보였고, 총 4시간 30여분 동안 10여명씩 나눈 모둠에서의 토론과 10개의 안건이 무리 없이 처리되었다. 1명의 의장 선출과 2명의 부의장, 1명의 서기 선출은 대의원들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이 행사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탄소제로’행사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개인 컵과 손수건을 지참하게 했으며, 쓰레기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음료나 다과는 준비하지 않았다.

식사대용으로 한 덩어리의 떡만 나눠주었다. 쓰레기는 각자의 호주머니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게 했다. 불편한 행사였음에 틀림없지만, 누구 하나 이를 두고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녹색당 대의원대회 모습(사진=녹색당)

녹색당 대의원대회 모습(사진=녹색당)

녹색당의 추첨제 대의원대회는 몇 가지 민주적 요소가 반영되었다. 당원 30명당 1명으로 계산하여 총수를 정하고, 이 총수에 10%를 소수자로 배정하였다. 소수자의 범주는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청소년 등 네 그룹이다.

대의원 추첨은 지역별, 성별, 연령별 할당을 두었으며, 광역 시․도별로 최소 2인 이상이 참여하도록 보장하였고, 특정한 광역 시․도 대의원의 정원은 전체 추첨제 대의원 정원의 20%를 넘을 수 없도록 했다. 실제로 서울녹색당과 경기녹색당이 당원수로 치면 60%가 넘었지만, 이 기준에 의해 40%를 넘지 못하게 했다. 비수도권을 배려한 원칙이다.

무엇보다 대의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위해 한 달 전부터 안건발의를 시작했다. 당규상으로는 5%의 대의원이 동의하면 안건을 발의할 수 있다. 5%이면 8명 정도의 수준이다. 이렇게 해서 발의된 안건은 모두 4가지였다.

선출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당일 행사에도 여러 요소가 가미되었다. 우선 서울, 경기, 인천을 제외하고 지역에서 올라오는 대의원들에게 교통비가 지급됐다. 교통비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한 것이다. 자녀를 데려오는 대의원들을 고려하여 ‘놀이방’을 운영하였다. 실제로 몇몇 대의원이 자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 대의원을 위해 자원봉사 1명이 기차역에서부터 행사장까지 전담했다. 최대한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대의원들 사이에서 가장 회자되었던 것은 모둠토론이었다. 10여명 정도가 1개 모둠을 구성하여 안건 심의․의결하기 전에 사전 토론을 했다. 1시간이 조금 넘게 10개 모둠에서 사전에 제출된 7개의 안건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물론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형식성을 탈피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전토론은 대의원들이 녹색당 활동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됐던 것 같다.

물론, 추첨제가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질을 담보한다고도 얘기할 수 없다. 녹색당원들이 합의하여 만들어진 당헌에 의해 진행된 첫 번째 대의원대회였고, 당헌이 개정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추첨제 대의원대회는 이어질 것이다.

다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추첨제 민주주의가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아주 작은 흔적일지라도 정당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번 대의원대회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과감하게 추첨제 대의원대회를 선택한 녹색당이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들의 정치집단’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여느 행사보다 사무처의 역량을 집중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여러 직접참여민주주의 제도를 살펴보면 통상적으로 3-4년의 시간이 지나야 안정화된다는 통계가 있다. 그래서 한 번의 대의원대회 경험만으로 추첨제 민주주의의 성공을 논하기는 분명 이르다. 그러나 이번 성공의 경험은 녹색당원들에게 큰 자산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대의원대회가 끝나고 참여했던 대의원들의 감상평들이 이곳저곳 온라인상에 올라온다. 나는 이번 대의원대회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자신감이다. 앞으로도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또 하나는 문화다. 녹색당만의 문화가 이런 행사를 통해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아래는 일면식이 없는 한 대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후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런 느낌들이 녹색당의 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라 믿는다.

“……….가장 아쉬운 점은 나 자신에게 있었다. 대의원은 당원의 뜻을 반영하는 역할인데, 지역 당원들과 만나본 적이나 있었나. 그래서 가장 마음에 새긴 것은 그런 것이었다. 더 움직여야겠구나. 더 많이 모여야겠구나… 추첨제 민주주의 정말 놀랍다. 나를 대의원 시켜준 녹색당 고맙다. 녹색당 당원이 되면 이런 기회가 모두에게 있다. 비록 30년에 한 번 있을 기회지만, 나처럼 바로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으니 주저 마시길!”

필자소개
녹색당 사무처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