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민주화와 파렴치 대기업 총수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박경리 『토지』 1부의 한 측면
        2013년 03월 19일 1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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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경제민주화는 이제 회피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과제가 된 듯하다. 정부여당마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있으니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판단이 가능할 테고, 다소 무책임하게 문두에 ‘어쨌든’이라고 갖다 붙이는 까닭은 실상이 이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봄이 왔어도 변치 않는 서울시청 앞 대한문 근처의 풍경이 그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대기업 총수들이 모여 가진 자를 존경할 줄 모르고 오히려 문제집단 바라보듯 한다고 사회 분위기를 한탄하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대기업 총수들이 자신들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할 때 나는 실소를 지으면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1부의 몇 장면을 떠올렸더랬다(이하 인용은 나남출판사 판본).

    토지

    소설에 따르면 개항기의 혼란을 파악하는 관점은 민중과 양반이 아주 달랐다. 민중들은 이야기한다.

    “개멩이라는 기 별것 아니더마. 한 말로 사람 직이는 연장이 좋더라 그것이고 남으 것 마구잡이로 뺏아묵는 짓이 개멩인가 본데, 강약이 부동하기는 하다마는 그 도적눔을 업고 지고 하는 양반나리, 내야 무식한 놈이라서 다른 거는 다 모르지마네도 옛 말에 질이 아니믄 가지 말라캤고, 제몸 낳아주고 길러준 강산을 남 줄 수 있는 일가?”(1부 1권, 133) 나라 팔아먹는 양반님네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민중들의 목소리에 실려 있다.

    그런데 양반들은 이를 계급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굶주린 이리떼를 잡아 가둘 생각은 않고 막아놓은 울타리 터주는 격이지. 갈 데 없어요, 이젠 양반들 내장까지 파먹으려 들 터이니. 배고프고 헐벗었기 때문에 민란이 난 줄 아시오? 언제는 상놈들이 호의호식 했었소? 울타리만 높고 튼튼했더라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는 한이 있어도 팔자거니 생각했을 게요. 허한 구석이 있어야, 기어들 구멍이 있어야 소리를 질러보고 연장도 휘둘러보고 그러다 막는 힘이 약할 것 같으면 밀고 나오는 게요, 아우성을 치면서.”(1부 1권 209) 양반과 민중 사이의 벽을 공고히 해야만 안정이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니 민중과 양반 사이의 대화가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토지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인식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참판 집에서 마름이 소작인을 찾아와 약정한 만큼 채우지 못했다며 “약정대로 할 사람한테 땅을 맽길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자 농부가 응수한다. “조상 대대로 부치온 땅을, 내 눈에 흙이 안 들어갔는데 어느 놈이 부치묵어? 어림없다! 어림없는 소리다! 냉수 마시고 속 차리서 들으소! 내 막마음 한분 묵으믄, 어느 시래비자식이 땅을 내놔? 어느 시래비자식이 그 땅을 부치묵어? 어림없다! 대갈통이 가리가 될 기다!”(1부 3권, 210) 조상대대로 부쳐온 땅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소작인도 소작인이지만, 마름의 으름장도 그 소작인이 워낙 약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겁이나 주려고 쏟아낸 말일 따름이다.

    그 시절 아무리 지주라고 한들 소작인에게 줬던 경작권을 함부로 빼앗지는 못했다. 이는 일종의 관습법으로 통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른 데서도 이러한 양상은 더러 드러난다.

    다른 농부는 “증조부 때부터 부치묵던 땅”이라고 설명하며 ‘김 훈장’에게 최 참판네 종에게서 들은 다음과 같은 소문을 전한다. “머 앞으로 변동이 있일 기라는 둥, 옛날 식으로는 안 할 기라는 둥, 그래 변동이 있이믄 조상 때부텀 부치온 땅을 거둬간다, 설마 그 말은 아니겄지요? 옛날식으로는 안 하다 카지마는 어떻게 옛날식으로 안 한다 말입니까.”

    여기에 대한 김 훈장의 훈계가 단호하다. “공연한 걱정이야. 종놈이 뭘 안다고.(중략) 상것들 소견이란 노상 그렇지, 체통 차릴 신분이 어찌 감히 그따위로 파렴치한 생각을 하겠나. 그보다 날씨 걱정이나 하게.”(1부 3권, 337)

    양반이란 ‘체통 차릴 신분’이니 마땅히 ‘그따위로 파렴치한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당시 최소한의 도덕률은 이렇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 1부 마지막 권에 가서 이를 여지없이 깨버리는 몰염치한 양반이 등장한다. 최 참판 댁의 재산을 날로 집어삼킨, 개화물을 배부르게 먹은 조준구다.

    “옛날에는 없었던 새 법이 생깄는가. 조상 대대로 그런 문서 없이도 아무 탈 없이 땅을 부칬는데.”

    혼잣말같이 뇐다. 그새 밖에서 영산댁이 고추장 뚝배기를 들고 들어온다.

    “새 법? 그기이 조 참판네 법 아니가. 요새 도장 찍는 기이 시풍인 모양인데 나라를 팔아묵을 적에도 다섯 놈이 들어서 도장을 찍었다 카고 그놈들은 백성들 허락 없이 도적질해서 팔아묵은 기지마는 우리네사 몸뚱아리 팔아묵었는 기라. 몸뚱아리 팔아묵은 기나 진배없지. 문서에다 한분 약정을 했이믄 나라도 고만인데 이 내 겉은 불쌍한 농사치기.”

    “청승은 늘어지고 팔자는 옹그러진다.”

    영산댁이 핀잔을 준다.

    “아무튼지간에 꼼짝 못하게 생깄는 기라. 약정된 수를 못 내믄은 곡가(穀價)를 따지서 돈으로 내야 하고 그것도 못 내믄은 장리빚 이자가 또 장리빚이 되고 또 되고 또 되고 눈사람이 되고 그, 그러고는 자손 만대까지 빚이 안고 넘어가는 기라.”(1권 4부 326)

    드라마 의 조준구(오른쪽)

    드라마 <토지>의 조준구(오른쪽)

    싸잡아서 얘기해서는 언제나 무리가 따르기 법이지만, 내가 보기에 현재 대부분의 대기업 운영자들은 조준구 계열로 이해해도 괜찮을 듯싶다.

    돈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골목 상권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들에게서 조준구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장 몇 개 찍으면 다 돈 아닌가. 조준구처럼 친일파로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법을 어기면서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박대하는 것을 보면 나라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은 매일반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휠체어만 타면 죄질이야 어떠하든 ‘상당 부분’ 용납되는데 굳이 법을 지킬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네들은 절대 체통 차릴 신분이 아니다. 체통이 뭔지, 염치가 뭔지 모르는 부류이다. 돈맛에 눈이 먼 중인 나부랭이 정도나 될까.

    그런데도 자신들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한다. 글쎄, 그네들이 노동자를 위시한 민중들을 ‘굶주린 이리떼’로 여기는 한편, 굶주린 이리떼가 ‘울타리만 높고 튼튼했더라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는 한이 있어도 팔자거니 생각’하는 존재라고 판단하는 것은 옛날 양반들과 상통하는 바 있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옛 양반들은 스스로 마을공동체의 수호자이기를 자임했던 반면, 현재 대기업 운영자들은 이윤을 위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노동자들과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따름이다. 그러면서 존경 운운하다니, 김 훈장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건대, ‘그따위로 파렴치한 생각’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양반의 의식이 중인보다 낫다느니 못하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먼저 우리 모두가 낱낱의 존재가 아니라는 공동체의식부터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논의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터이다. 공(公)과 사(私)를 대립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소유 관계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넘어서는 공동체 복원이란 사상 위에서 어떻게 새롭게 추구할 수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받는 존경에도 수준을 나눌 수 있다면 아마 이러한 물음은 아주 중요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으리라.

    필자소개
    가톨릭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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