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토 속에 얼어버린
    북-일 민중연대의 기원
    [잃어버린 북일 민중연대의 기억] 소련 점령 하의 만주지역 관동군의 경험
        2013년 03월 18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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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도발을 낳는 토양과 비료

    2012년 12월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2013년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안 채택, 2월의 3차 핵실험, 3월의 안보리 추가 제재안 채택,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한미연합훈련 등, 북한의 도발과 한미일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제재 및 위협이 숨가쁘게 교차하며 한반도는 급속도로 전운에 휩싸인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적인 입장에 관계없이 일단 이러한 위기상황을 초래한 일차적인 책임을, 끊임없이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북한 측에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자세가 결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긴장관계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가 북한의 도발을 싹 틔우는 토양과 비료를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자기 자신의 허물을 찾아내서 먼저 소거해 가는 것은 소통과 연대의 시작이다.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있는 북한을 도발하는 가장 생명력 넘치는 토양과 비료는 아마도, ‘한미일’ 등의 극우세력일 것이다.

    이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공격한다면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는 등, 예상되는 ‘적’의 공격에 대해 훨씬 세고 훨씬 강한 응징을 호소하며 ‘인류의 의지’조차 대변하는 ‘애국자’연 한다.

    연평도 항의 일본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뒤이어 대규모로 진행된 한미, 일미 합동 군사훈련에 반대하여 일미한, 일중북 노동자 단결을 외치며 데모행진하고 있는 일본 시민들(2010.12.3, 『前進』 2467호에서)

    하지만 반도의 불안이나 군사적 긴장 고조는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구미 불산 누출 등 잇단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극우세력들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이러한 체제 모순이나 사회 불만을 ‘안보 이슈’로 바꿔치기해 봉합할 수도 있으니, 북한의 도발-‘국제사회’의 압력의 연쇄적 격화를 핵심으로 하는 반도의 불안으로 그들이 챙기는 이득은 막대하다.

    미국, 일본, 한국은 모두 장기적 경기침체로 재정 적자에 허덕이고 중산층 몰락과 빈부격차가 심화일로에 있는 나라들임에도 불구하고 국방비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반도의 불안이 없다면 국가 재정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정치가, 군부, 기업, 언론 등의 온갖 이권이 걸려 있는 국방비 예산은 서민들의 고용을 지키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산 무기 최대 수입국인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국방비 삭감을 막고 지출의 증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도발은 필수불가결하다.

    원전사고 수습이라는 심각한 국가적 난제를 끌어안고 있음에도 북한의 핵 위협이나 중국의 해양진출 등을 이유로 11년만에 방위비를 증액하고 무기수출 규제마저 완화하려는 일본도 ‘북조선 위협론’이 절실한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미국에게도 반도의 불안은 냉전 종식 후 아시아에서의 미군의 존재의의를 확고히 다지는 절호의 구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 GDP의 약 25배, 2배, 1배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는 미국, 일본, 한국이 현기증 날 정도로 터무니 없는 불균형 상태에 놓여있는 약자를 적대시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이들 반도의 긴장완화를 반기지 않는 세력들을 계속해서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극우 세력을 대표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나 박근혜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제의 침략전쟁을 주도하거나 이에 동원된 일본군 출신으로 패전을 맞았다가 친미반공이라는 견고한 갑옷으로 갈아입고 재등장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나 박정희의 정신적 계보를 중시하는 세력임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북한 도발(‘북조선 위협론’)이 먼저인지 ‘국제사회’의 위협이 먼저인지 도대체 알 수 없어진다.

    이 연재의 테마인 북일 관계에만 한정해 보아도, 일본의 패전 이후에 이들 구세력들이 그 어떤 역사적인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다시 권력 속으로 ‘귀환’한 것은, 그만큼 북일 적대를 낳는 토양과 비료이자 북일 민중 연대의 가능성에 심대한 균열을 가하는 쐐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쉴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배시킨 미국은 황국사관으로 무장한 군국주의 세력을 해체시키기 위해 ‘민주화, 비군사화, 전범 처리’을 기조로 한 점령정책을 개시한다.

    하지만, ‘전후개혁’이라 일컬어지는 이 정책 자체는 미국의 국익과 세계전략에 철저하게 입각해 있었고, 따라서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지 달라지는 유동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식민지화나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조선이나 아시아의 탈식민 과제, 반제·평화에 대한 요구와 결코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전범 처리에 있어서 애초에 점령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일본군 최고지휘자인 대원수였던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거나, 생체실험 등 생화학병기 연구를 행했던 731부대가 전쟁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에 정보를 제공한 것 등은 알기 쉬운 사례로, 이것이 반제와 반전·평화를 외치는 아시아의 목소리를 외면한 것임은 자명하다.

    일본교과서

    중학교 사회과 1학년 새 교과서『새로운 헌법 이야기』(1948) 삽화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점령정책의 본질을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군국주의 세력의 추방으로 개시된 점령정책이, 일찍이 친미반공의 아군으로서 그들의 복귀를 허용하고 6년 반 동안의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결국에 패전 이전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저항하고 식민지 지배에 반대한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추방으로 끝났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같은 패전국인 독일이 일단 국가의 소멸과 연합국에 의한 직접통치를 받는 과정을 거친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미군이 내린 명령을 일본의 정권이 대신 실행하는 이른바 간접통치가 실시되었던 관계로 처음부터 패전 이전과 연속성이 강한 국가가 준비된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실질적인 권한이 없어지긴 했지만 천황도 존속했고 내각제나 기타 통치기구들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남한은 미군정기에 영어가 공용어였지만 일본은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흔히 패전국들이 경험하는 사회혼란이나 혁명 발발이 일본에는 없었던 이유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렇긴 해도 대일 점령의 목표를 ‘군국주의 세력 일소’로 내걸었던 점령 초기에는 일본군은 곧바로 해체되었고, 전쟁 추진 세력들도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공직추방령 등에 의해 배제되었으며, 신헌법에는 전쟁포기 조항(제9조)이 명기되었다. 경제구조도 군사력 강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중화학공업은 억제되고 민간 수요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 민정국을 중심으로 민주화도 추진되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좌파세력들을 석방하고(1945년 10월) 남녀평등, 노동운동 장려, 교육 자유화, 비밀경찰 폐지 등의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패전 후 재건된 일본공산당이나 일본사회당 등은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노선을 지지, 협조하면서 정치운동을 개시하게 된다.

    하지만, 점령군과 좌파세력의 ‘밀월’은 머지않아 종언을 고한다. 냉전의 개시로 미군의 점령정책이 ‘전후 개혁’에서 ‘반공의 방파제로서의 기지국가화’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무장화에 적극 나섰고, 그로 인해 패전 이전의 일본의 경제력, 군사력, 사회 리더들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생겼다. 일본사회를 오랫동안 주박해 온 ‘친미반공=경제부흥’ 신화는 미 군정기에 미국에 의해 이때 심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민주화, 비군사화, 전범처리’의 종료를 의미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점령 초기의 용공정책으로 ‘과도하게’ 주체화된 시민들의 정치운동, 노동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1949년)을 계기로 동아시아에 혁명 열기가 달아오르자 그 강도도 극도로 심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좌파세력의 추방은 피크에 달했다.

    血のメーデー

    피의 메이데이 사건(1952, 도쿄)
    단독강화 등에 반대하는 데모대에 경찰이 발포, 참가자 2명이 사망, 1500명 이상이 부상당한 사건.

    반면, 군국주의 세력들은 친미반공의 탈을 쓰고 너도나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냉전의 추이는 스가모에 있던 우리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것이 악화되기만 하면 목은 안 잘릴 거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냉전에 돌입하기만 하면, 미군은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전후 일본 권력구조의 핵심에 귀환한 것은, 미군정이 끝나고 처음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1952년 10월)에서 중의원 의석의 42%를 이들 추방 해제자들이 차지한 것이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경제부흥과 재무장 프로그램은 한국전쟁과 그에 따른 ‘조선특수’, 경찰예비대(자위대의 전신) 창설(1950년 8월) 등으로 일단의 완료를 본다.

    만약 소련이 일본을 점령했다면…

    미국이 미군정기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전략의 하위 파트너로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들을 끌어안은 것은, 그들의 식민지 지배 책임, 전쟁 책임을 면책했다는 점에서, 아시아와 일본의 연대를 가로막은 견고한 벽을 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 일본의 우익들이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거나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기원은 이미 이 시기에 튼튼히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본이 소련에 의해 점령 당해 패전을 맞고, 친소 정권으로서 일본공산당이 간접통치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전쟁에 휘말려 고통받은 일본의 주민들에게 또 한번 심적으로 고통을 주는 개연성도 없는 상상을 굳이 해 보는 이유는, 일부이긴 하나 실제로 그와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로 구 만주 지역에서 패전을 맞고 소련군에 투항한 관동군이 그들이다. 약 60여 만 명에 달하는 그들은 시베리아 등지로 보내져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짧게는 1947년, 길게는 1956년 무렵까지 수용소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일본에서 후일 ‘시베리아 억류(문제)’로 명명된 이 사태는 전쟁포로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근대 국제법을 무시한 채 전승국이라는 미명하에 소련에 의해 자행된 비인도적인 포로학대가 아닐 수 없다. 전쟁으로 약 2,7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소련은 추축국의 전쟁포로를 최대한 활용하여 전후 복구에 필요한 노동력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시베리아의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는 열악한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일본의 포로들은 혹한과 기아로 6만 명 이상이 사망하게 되는데, 그 중 약 80%가 첫 해 겨울에 일어났다. 포로들 중에는 당시 일본 국적으로 전장에 보내진 1만 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경우는 종주국 일본에게도 점령군 소련에게도 이용당하는 이중착취에 시달렸던 셈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양쪽 국가에 의해 이용당하다 처분되었던 ‘버림받은 존재’라는 점에서는 일본인 병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전쟁의 패배를 예측한 일본의 지배세력들은 소련에 천황제 유지를 인정받는 대신에 관동군을 노무제공하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따라 소련도 도쿄재판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즉 소련에 의한 전쟁포로의 인권착취와 일본에 의한 ‘인신매매’적 기민(棄民)정책은 한 쌍을 이루며 그들을 모든 제도의 보호 밖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언제 귀환할지 기약도 없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절망적 포로 생활만은 아니었다. 수용소에서는 처음부터 구 일본군의 계급질서가 온존되어 있어서 위로부터의 억압과 착취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 강도를 더해 갔는데, 그 구체적인 실상은 시베리아 억류 사망자의 압도적 다수가 일반 사병이었고 장교나 하사관은 극히 소수였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전하고 있다.

    같은 시베리아 억류라는 상황 속에서도 그 희생은 일반 사병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기 대신 연장을 들었을 뿐 ‘천황의 군대’ 생활은 끝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에게 아직 ‘전후’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독했던 첫 해 겨울을 나고 1946년 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차 전시와 단절된 ‘전후’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민주운동’이라 불리는, 수용소 내의 일반 사병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군투쟁이 그것이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희생이 계급적 약자에게 몰리는 내부 모순을 자각하고 반군·민주화 운동에 나선 것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일각에서 ‘집중적인 세뇌교육’이라고까지 일컫고 있는, 당시 소련군에 의한 사회주의 정치사상교육이 크게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소련군은 노동력 활용이라는 당초의 목적에 더하여, 일본어로 된 신문(『일본신문』)이나 책자 등을 일본인 포로들한테 발행하게 하거나 강연이나 학습 등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여, 귀환 후 일본 내 친소 공산세력의 조직자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결국에 계급 붕괴로 특권을 잃은 사람들이 생기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세력이 수용소 내의 주도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소군정기 북한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관리와 기획 하에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용소 내 민주세력들은 인간과 노동 해방을 외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강제노동이 자행되는 모순을, 수용소 내 반파시즘 열기를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각성에까지 고양시켜 수용소 자주관리 운동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해소하려고 했다.

    더욱이 이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거의 대부분이 44, 45년에 징집된 일반 사병이었던 조선인들도 참여했던 조일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글 대자보 등을 만들어 조선인 수용소 내의 사상운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일본의 사병들과의 연대 속에서 민주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포로들이 발행했던 『일본신문』은 타스 통신 평양발 기사를 자주 보도하며 당시 북한에서 전개되고 있던 토지개혁이나 주요산업 국유화 같은 ‘민주개혁’에 관한 소식 등을 상세하게 전했다.

    일본에서는 GHQ의 검열로 통제되었던 북한 관련 소식을 시베리아의 포로들은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철의 연대성”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함께 대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건설 빛나는 조선

    일본공산당 청년공산동맹이 전개한 노래운동의 텍스트인 『청년가집』(1951)

    그때 만들어진 곡 중에는 <건설>이나 <빛나는 조선> 같은 노래가 있었다. 1950년대에 재일조선인과 일본공산당과의 연대투쟁에서 신생 사회주의 국가 북한을 축복하기 위해서 자주 불린 이 노래들은 실은 시베리아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그 중 <건설>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힘차게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노래다.

    1. 붉은 저고리 입고 일하는 처녀
    한가로운 밭에 노래소리 넘치네
    올해도 풍년 황금의 물결
    후렴)풍요로운 조선 자유로운 조선
    2. 요란한 사이렌 망치는 울리네
    도라지꽃 피는 우리네 공장
    어서 받아치라 평화의 강철
    3. 도시에서 농촌에서 바다에서 산으로
    서로를 부르는 동무들의 밝은 미소
    2개년계획 열심히 완수하자

    북일 민중연대의 얼어버린 기원

    사르트르는 식민지란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하는 체제이며, 그 체제를 파괴하지 않는 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을 항상 호소했다. 따라서 그 체제가 지속하는 한, 식민자의 체제에 속한 나는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식민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피식민자와 진정한 연대를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과 일본의 병사들이 시베리아에서 파시즘 체제를 상징하는 군대의 위계질서를 부수고 연대했던 경험은 비록 ‘컵 속의 폭풍’이었다 하더라도, 서로를 해방하며 식민지 체제를 극복한 하나의 기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저지른 전쟁의 책임을 떠맡고 본국과 격리된 채 인신을 구속당한 억류자들이 47년부터 본격화된 귀국사업으로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빨갱이’라는 의심에 찬 사회로부터의 시선이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귀국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실시된 빨갱이 색출작업(레드 퍼지)의 대상이 되어 상당한 기간 동안 공안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일본공산당

    패전 후 치러진 첫 총선 관련 영상(1946년 4월). 거리에 ‘일본공산당이 정치를 하면’이라는 제목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더욱이 그들 중의 적지 않은 수가 가입했던 일본공산당이 극심한 탄압 속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전개하다가 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에서 의회정책 노선이라는 평화혁명론으로 전환하여 패전 이전의 지배체제를 온존시키며 식민지주의를 극복할 계기를 잃은 ‘일본’을 수용했을 때 그들의 경험은 살려질 기회를 잃었다.

    한편, 북한으로 귀환한 조선인 병사들의 소식은 어느 것 하나 알려진 것이 없고, 남한으로 귀환한 조선인 병사들은 감시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죽음을 재촉하거나, 친미반공의 투사로 화려한 변신을 해야 했다. 관동군 조선·일본 병사들의 비극적인 소비에트 경험이 낳은 한줄기 희망의 빛은 그들이 ‘컵’을 벗어남과 동시에 얼어버렸다.

    [사진 출처]

    http://www.zenshin.org/f_zenshin/f_back_no10/f2467.htm

    http://www.youtube.com/watch?v=4sKTDZydyUk(패전 후 첫 총선 관련 미국 자료 영상 캡쳐-1946.4.10)

    필자소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진보신당 당원,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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