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만의 대법원' 아닌
    '우리들의 대법원' 만들기
    [책소개] 『기울어진 거울』(이춘재 김남일/ 한겨레출판)
        2013년 03월 16일 01: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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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의 사법은 정의와 진실 그리고 법치의 마지막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국민의 신뢰를 담보할 만한 민주사법의 지향점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될 생생한 법원 현장의 모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지난 10년 동안 대법원을 중심으로 한 사법개혁의 시도와 굴절을 이처럼 가감 없이 총체적으로 밝혀놓은 기록은 매우 드물다. 성역이라는 사법부의 실상과 허상을 예리한 시각으로 파헤친 두 기자의 이 역작은 국민을 위한 사법, 국민에 의한 사법을 구현하는 데 소중한 백서이자 지침서가 될 것이다. _한승헌(변호사, 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이 책은 법조팀 기자로 잔뼈가 굵은 두 저자가 발과 귀로 쓴 취재기로, 지난 10년간 사법개혁의 시도와 좌절을 정리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다. 특히 참여정부 초기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등용된 ‘독수리 5형제’라 불리는 개혁적 법관들은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은 독수리 5형제와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을 중심에 놓고 참여정부에서 시작된 대법원 개혁의 흐름이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무색해지는 모습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시대에 뒤떨어진 판결, 대법원의 기울어진 저울

    자유ㆍ평등ㆍ정의. 대법원 현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세 단어다. 이는 법과 정의의 전당인 대법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대법원이 지향하는 바를 나타낸다. 법관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정당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자유ㆍ평등ㆍ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법권을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행사하여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대법원은 지금 어떤가?

    최근 노회찬 의원의 의원직 상실형으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이 되었던 안기부 X파일 사건은 우리 사법부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의 핵심은 삼성이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대통령 선거와 검찰조직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한 정황이 관계자들의 대화를 통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이 일부 검사들에게 ‘떡값’을 제공하며 이들을 관리해왔는지에 대한 실체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이를 보도한 기자들과 이른바 ‘떡값 검사’들의 이름이 담긴 보도자료를 배포한 노회찬 의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노 의원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의 논리는 “전파성이 강한 인터넷을 통해 불법 녹음된 대화의 상세한 내용과 관련 당사자의 실명을 그대로 공개한 행위는 그 방법의 상당성도 결여되었으며 공개행위로 얻어지는 이익보다 통신비밀유지의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정당행위의 요건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좀 더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 서 있는 대법관, 독수리 5형제의 등장과 활약

    대법원 판결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과 통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그 가치, 그리고 이를 둘러싼 갈등의 최종적 판단을 하는 대법원이 국민 전체를 대변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대법관들의 면면을 보면 서울대-법대-남성-고위 법관 출신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인적 구성에서부터 폐쇄적인 틀에 갇혀 있다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기울어진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사법개혁과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를 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저울

    참여정부 출범 이후 보수 일색의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개혁 성향의 대법관들이 대거 대법원에 입성했다.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이 다섯 명의 대법관들은 인권, 소수자 보호 등을 지키기 위해 보수 대법관들에 맞서며 ‘독수리 5형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위험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1980년대 유명 만화영화 ‘독수리 5형제’의 주인공에 빗댄 것이다.

    송두율 사건, 강의석 사건 등의 판결은 독수리 5형제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 독수리 5형제의 임명을 제청했을 뿐 아니라,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처음으로 사법부 과거사 청산 작업을 추진하는 등 사법개혁의 다양한 시도들을 이어갔다.

    6:5의 아쉬운 패배, 삼성에버랜드 사건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있던 그날. 대법원에서는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삼성에버랜드의 헐값 전환사채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아들 이재용에게 물려주려 한 사건에 대한 공판이었다. 결국 이날 이 회장은 ‘무혐의’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렇다고 대법원이 일방적으로 이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6 대 5, 단 한 표 차이로 다수의견의 주인이 갈렸던 것이다. 애초 이 사건은 대법원 소부(대법관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만장일치로 판결을 내는 단위)에서 무혐의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해당 소부에 속했던 박시환 대법관이 강하게 요구하여 우여곡절 끝에 전원합의체에 이르게 되었다. 13인의 대법관(대법관은 14명이지만 이중 법원행정처장을 맡는 대법관은 재판을 맡지 않는다) 중, 삼성 측 변호사 경험이 있던 이용훈 대법원장과 삼성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안대희 대법관을 제외한 11명의 대법관이 이 사건의 판결을 맡았다.

    어렵게 얻어낸 전원합의체였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다. 독수리 5형제로 분류되던 김지형 대법관의 생각이 박시환 대법관과 달랐던 것이다. 김 대법관은 무죄추정의 대원칙에 따라 기소된 정황만으로는 이 회장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독수리 5형제 안에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이라 박 대법관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이 명확한 사건을 고집을 부려 전원합의체에 끌고 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6 대 5. 박 대법관의 전원합의체 제안이 무색하지 않은 결과였다.

    김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독수리 형제들은 모두 유죄 쪽에 섰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4표. 유죄 쪽에 선 나머지 한 표는 누구의 표였을까?

    바로 김능환 대법관이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나 경우에 따라 스윙보터(한 정당을 지속적으로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이슈에 따라 정당을 바꿔가며 투표하는 유권자) 역할을 해온 그였다. (김능환 대법관은 최근 퇴임 후 아내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을 거드는 소박한 모습이 언론에 소개되어 훈훈한 미담 기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이건희 회장에 대한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기는 하였으나, 김능환 대법관의 유죄 의견은 대법원이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로 남았고, 또한 이 판결은 전원합의체의 의미와 대법원 구성 다양화의 중요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사법개혁은 어떻게 좌절되었는가

    안타깝게도 이런 신선한 변화들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용훈 대법원장의 개혁의지가 한풀 꺾이고 만 것이다. 변호사 시절 론스타로부터 받은 보수에 대해 제대로 소득 신고가 되지 않은 점이 드러났고, 이를 계기로 이 대법원장의 권위가 심하게 실추되었다.

    이 사실이 드러난 과정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이 대법원장이 직접 “대법원장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며 공세에 나섰지만, 세금 누락만은 사실이었다. 세무사의 실수였다고 적극 해명하고 누락된 세금을 뒤늦게 냈지만, 그동안 도덕성을 내세워 사법부 과거사 청산 등을 강하게 추진해온 이 대법원장의 개혁 동력은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과거사 청산 작업이 흐지부지된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대법원장은 대법관 인사에 있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코드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촛불 재판 몰아주기로 문제를 일으켰던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을 대법관에 제청한 것이다. 이렇게 독수리 5형제가 임기를 마치고 대법원을 떠나면서 그 자리는 차례차례 다시 보수적인 법관들로 채워졌다.

    ‘그들만의 대법원’이 아닌, ‘우리들의 대법원’ 만들기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이명박 정부를 통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다. 사법정의가 가장 처절하게 무너진 때가 유신시절임을 상기해볼 때, 또한 인혁당 사건 등 유신시절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인식을 볼 때, 사법부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자진사퇴로 마무리되긴 했으나, 기존 헌법재판관 중 보수적인 성향이 가장 심해 극단에 가까웠던 이동흡 전 재판관을 헌법재판소 소장에 임명하려 했던 것만 보더라도 사법부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14명의 대법관 가운데 대법원장을 포함 무려 8명의 대법관이 교체된다. 대법원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 국민 개개인이 대법원과 대법관 인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할 것이다.

    지난 10년 대법원 개혁과 좌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책을 계기로 ‘그들만의 대법원’이 아닌 ‘우리들의 대법원’ 만들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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