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과 대결의 시대
[책소개] 『투게더-다른사람과 함께 살아가기』(리차드 세넷/ 현암사)
    2013년 03월 16일 01: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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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시대, 무한 경쟁과 자살, ‘격차사회’와 ‘피로사회’, 자기 계발과 힐링… 이웃집에 악마가 사는 ‘층간소음’의 시대에 ‘층간소통’을 상상할 수 있을까?

동정 없는 세상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구원 없는 사회에서 치유를 찾고, 혁명 없는 시대에 <레미제라블〉에 감동하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경제적·정치적·민족적·종교적·문화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과제다.

‘가족’과 ‘부족’의 이익만을 탐하는 1차원적 사회,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냉소적인 사회에서 ‘투게더’, 즉 ‘통합’이 아니라 ‘사회적 협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 지구에 사는 최고의 지성 중 하나인 리처드 세넷은 신작 『투게더』에서 사람들이 거리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지역에서, 정치에서, 온라인에서 어떻게 협력하고 대화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세넷이 찾은 협력의 역사적 사례는 길드의 작업장, 근대의 예술, 파리의 코뮌, 월스트리트의 노동자, LA의 코리아타운, 페이스북의 ‘친구 맺기’ 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하다. 세넷은 이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협력의 기술을 다시 배우고 공동체를 구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우리는 이 기술을 다시 살릴 수 있다.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 본성과 사회의 경험 속에 이미 스며 있기 때문이다!

‘비참한 사람들’의 힐링?〈레미제라블〉열광을 이해하는 인문적 성찰.

지난해 12월 19일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장기 흥행하며 6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한국사람 열 명 중 한 명이 영화를 본 셈이다.

이 ‘감동의 물결’에 대해 저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많은 매체들이 대선 패배로 인해 ‘멘붕’에 빠진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그들의 좌절과 분노를 영화를 보며 ‘힐링’한다고 진단했다. 지난 시절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의 반대말이 구원이라면, 실패한 혁명을 그린 이야기에서 ‘치유’를 찾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까?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은 분명 이전에 혁명도 이룩했고 심지어 왕도 갈아치웠다. 그랬음에도 이들이 다시 실패할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역시 거리의 기억과 정권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개개인은 먹고살기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태백’ ‘88만원 세대’는 여전한 장기침체와 승자독식 경쟁체제로 인해 30대가 되어서도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아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빚에 허덕이는 중산층 ‘하우스푸어’가 ‘서민’ 대다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두되었을 정도다. 또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율과 더불어 가장 빠른 노인 빈곤화율을 보이고 있다는 통계는 피할 수 없는 비참을 두렵게 한다.

지난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건 간에 ‘우리’는 오늘과 내일이 불안하다. 당장 나와 내 가족의 삶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답했던 건 아닐까?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 르상티망(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말했다. 이렇듯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향한 일종의 패배주의적 분노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소리에 언제라도 공명할 기회를 찾기 마련이다.

투게더

노동사회학과 도시사회학의 대가로서 르상티망을 주요 키워드로 연구한 리처드 세넷의 』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숨막히는 시장 경쟁 사회에서 세넷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고.

불통과 대결의 시대… 차이를 인정하고, 타인에게 반응하고, 서로 대화하라!

세넷은 ‘우리’와 ‘너희’라는 대립에 주목한다. 어느 날 세넷의 손자가 다니는 영국의 한 공립초등학교 교내 방송으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다. “엿 먹어, 엿이나 실컷 처먹어, 왜냐하면 네가 진짜 싫으니까, 너네 패거리 전부가 진짜 싫거든!”

이 노래가 그저 반항감을 표출한다고 환호한 아이들의 태도에 세넷은 기겁을 했다. 〈엿 먹어〉의 가수가 오히려 조롱하려 했던 ‘우리와 너희들의 대립’에 아이들이 무감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넷은 현대 사회에 팽배한 부족주의를 감지한다.

물론 사회적 동물에게 부족주의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계급과 종교와 인종이 섞인 오늘날의 복잡 사회에서는 자칫 폭력적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부족주의는 자신과 같은 사람과의 연대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격과 짝을 지우기 마련이다. 폐쇄적인 유대감을 기초로 하는 적대적인 집단의식은 20세기에 이미 인류를 파멸시킬 뻔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너무도 다른 ‘우리’와 ‘너희’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세넷은 오히려 이 차이에서 ‘함께’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삶에서 욕구와 의지의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고 서로가 평등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세넷은 인간이 놓인 이와 같은 상황을 몽테뉴의 말로 대신 전한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무엇이 오가는지 우리는 대체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양이로 빗댄 것이다. 그리곤 세넷은 덧붙인다. “그런데도 몽테뉴가 그 수수께끼 같은 고양이와 계속 놀았던 것처럼 상호 이해의 부족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그저 각자 자신의 기준에 따라 타인에게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투게더』에서 말하는 세넷의 협력이란 타인에 대한 우리의 반응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또는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겐 서로를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넷은 타인에게 반응하는 의미의 협력을 하나의 실제적인 기술, 즉 실기(實技, craft)로 바라본다. 그렇다. 협력은 단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도덕적 의무나 이상적 개념이 아니다.

분열적인 연대를 넘어 사회를 재발견하라! 21세기적 협력 개념, 투게더?

『투게더』에서 중세의 길드에서 근대의 작업장, 현대의 구글까지 협력의 변화를 탐사하는 세넷은 ‘함께하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다름 아닌 ‘대화의 기술’인데 이는 곧 잘 듣는 기술을 의미한다.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를 잘할 수 없다”는 영국의 한 변호사의 말에 세넷은 귀를 기울이며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잘 듣는 데는 다른 종류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하는 기술, 발언만이 아니라 동작과 침묵까지 파악하는 기술 말이다. 잘 듣는 사람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고 추정하는 것 속에서 의도와 맥락을 집어내어 공통의 토대를 찾아낸다.

이 숙련된 청자를 두고 탐정과 닮았다고 한 몽테뉴의 비유에 동의하며 버나드 윌리엄스가 지적한 ‘소신의 물신숭배(fetish of assertion)’를 경계했다. 오로지 자기의 말만 해대는 귀머거리 대화에서 ‘대화적 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년 만에 서비스를 폐쇄했던 ‘구글 웨이브’의 사례를 들어 온라인상의 협력 중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여하지 못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아마 그 프로그램이 정보 공유를 소통이라고 착각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인지도 모른다. 정보 공유는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는 훈련인 반면, 소통은 말로 표현된 것 못지않게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에도 관련된다. … 이메일을 쓸 때 으레 그렇듯이, 서두르다 보면 답장은 최소한의 사실만 남아 앙상해진 형태가 되는 경향이 있다.(본문 61쪽)

첼리스트로 활동했던 세넷은 대화적 대화를 리허설에 비유한다.

슈베르트 8중주에서 작곡가는 여덟 명의 연주자가 처음에는 공유하던 선율을 조각조각 부순다. … 각 연주자는 자신이 맡은 조각의 연주를 마치면서,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호들갑을 떨지 않고 그냥 “난 여기서 기차에서 내릴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슈베르트가 원한 바가 바로 이런 것이지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작업을 해야 하고, 그들이 내는 소리와 다른 내 소리가 그들의 소리와 통합되어야 한다. 악보와 음향 사이에 이런 간극이 있기 때문에, 내 지휘 선생인 위대한 피에르 몽퇴는 학생들에게 “읽지 말고 들어!”라고 명령하곤 했다. (본문 41~42쪽)

아니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화려하게 펼치는 ‘재진술’ 기술은 어떨까? 소크라테스가 교묘하게 ‘다른 말로’ 변주하는 오해와 엇갈린 의도는 상대방의 관심을 자극한다.

간혹 재치 있는 반문은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적응할 기회를 준다.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인식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게 된다. 세넷식의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는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의 기술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의 고통을 느낍니다” 대신 “나는 당신이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넷은 동일시를 통해 차이를 지우는 ‘자기’에 방점을 찍기보다 나의 밖에 있는 ‘너(의 고통)’로 나가는 것이 더 강력한 실천일 수 있음에 주목한다. 서양 철학과 역사의 은밀한 욕망인 ‘동일화’를 뛰어넘는 섬세한 사회학적 상상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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