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법의 사망신고?
    적와 우리의 이분법....군사주의의 심화, 힘의 위계 질서만 남게 돼
        2013년 03월 15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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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 같은 느낌 때문일까요? 저는 옛날의 사회주의 운동의 문헌들을 시간 날 때마다 뒤지곤 합니다. 한 세기 이전에 쓴 문헌이라 해도,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들을 너무나 잘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애호하는 문서 중의 하나는 1891년의 에어푸르트 강령, 즉 제2차인터내셔널 시대의 사민주의 운동의 핵심적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독일사민당의 제2차 강령입니다(관련 글)

    그 강령의 안보/외교 부분을 보면, 지금까지도 전혀 해결되어지지 못한 두 가지 핵심적 과제들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상비군을 철폐하여 그 대신 전민 (全民)에 대한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군사제도 민주화”안이었고, 또 하나는 “모든 국제 갈등들의 법적 조절을 통한 평화적 해결” 요구입니다.

    한 세기 전의 사민주의자들은, 모병제든 징병제든 특권층에 속하는 장교들이 위계서열적으로 지휘하는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으로서의 상비군 그 자체를 극도로 불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서는 “모든 인민들의 무장 가능성”, 즉 유사시의 일종의 인민전쟁을 가능케 하는 “무력의 민주화”를 추구한 셈이죠.

    이와 약간 유사한 “노동자, 농민 군사 교육 제도” (Всевобуч)는 스딸린화 이전의 초기 쏘련에서 부분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사실상의 상비군 부활에 의해서 형해화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옛날 사민주의자들이 극단적인 경우에 한해서 “인민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공유했지만, 원칙상 민중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전쟁 그 자체를 폐지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전쟁의 대안으로 생각된 것은 바로 “국제법에 의거한 갈등의 해결”이었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칼 카우츠키나 빌헬름 리브크네크트 등 그 당시의 사민당 지도자들이 사실상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계승,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가 민주화된 사회들 사이의 전쟁이 불필요할 것이라고 보고 어떤 연방제적인 국제적인 조직이 갈등 해결의 기능을 담당하리라고 예상했는데, 사민당의 지도자들도 “국제사회”를 상식과 법이 통하는, 비폭력화된 공동체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꿈의 연장선 상에는 제1차 대전 이후의 국제연맹이나 제2차 대전 이후의 유엔 등이 있지만, 계몽가와 사민주의자들의 “국제법적 세계 공동체”의 꿈은 안타깝게도 여태까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철저하게 불평등한 세계체제 안에서의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관계들이 다 자국 지배계급 실리 추구나 강국-약소국 사이의 주종 관계, 그리고 최강대국의 패권 등에 의해서 규정지어지게 돼 있기에, 여기에서 칸트나 카우츠키의 평화주의적 꿈이 설 자리라고 없습니다.

    국제연맹은 파시즘의 횡행을 전혀 억제하지 못했듯이, 유엔이 미국의 북조선 융단폭격이나 북월남 폭격, 캄보디야나 라오스에 대한 폭격, 니카라과에 대한 무장간섭, 그리고 쿠바나 북조선에 대한 무역제재 등 명쾌하게 불법적이고 범죄적인 성격의 패권 행사를 전혀 막지 못해왔습니다.

    막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6.25 때 같으면 북조선을 완전한 폐허로 만들고 적어도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을 사망케 한 융단폭격이 바로 유엔의 깃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1990년대에 백만 명 이상의 이라크 아동들을 죽이고 만 이라크에 대한 범죄적인 무역제재도 명색상 “유엔의 제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 적어도 제3세계의 민중의 시각에서 본다면 – 국제법은 멀고 주먹의 법, 즉 패권세계의 약육강식적 “법칙”이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늘상 그래왔지만, 쏘련의 망국과 미국 패권의 절대화,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보조를 같이 맞추어온 핵심부 언론들의 시각의 획일화 등으로 특징지어진 1990년대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나토의 깡패적인 공습으로 끝맺은 이후로는 국제법의 파괴 과정은 과거에 비해서 다소 고속화된 듯합니다.

    2003년의 미국 등이 주도하고 일본과 남한 등이 종범으로 나선 이라크 침략을 보시죠. 국제법적인 차원에서 “세계의 헌법”에 해당돼야 할 유엔 헌장에서는 침략 전쟁은 분명하게 불법화돼 있습니다 (무력사용금지 원칙, 1장2조4항).

    켈로그 브리앙 조약

    켈로그 브리앙 조약 체결 장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쇼 독일 및 일본 전범 처리시에도 그들에 대해 적용된 가장 큰 죄목은 “평화에 대한 범죄”, 즉 침략 전쟁 발발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독일 파쇼와 일본 군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고발의 법적인 근거는 전쟁 금지 관련의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의 조약 (전쟁금지조약)이었습니다.

    참, 그 조약의 체결 및 비준을 이끈 공로로 그 조약 체결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미 국방장관 켈로그는 다음 해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습니다. 자, 이 정도면 침략 전쟁이 중대한 국제범죄이며, 그 범죄성을 미국 관료들이 십분 인식한다는 점은 명확해졌죠?

    그런데 켈로그-브리앙 조약, 그리고 유엔 헌장과 무관하게 미군이 이라크를 짓밟았을 때에는 과연 그 책임을 추궁하려는 나라나 국제기관은 존재했나요?

    유엔 헌장이나 국제조약들이 약간이라도 상징성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면 유엔 총회에서 미국이 유엔으로부터 제명, 추방당했을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지금 북조선이 당하고 있는 제재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제재의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미국이 제재를 당하기는커녕 지금 미국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다른 나라들을 오히려 그 죄로 제재하고 있는 것이죠. 적반하장도 유분수인데 말입니다.

    이라크 침략은 미국의 사실상의 패배와 미군 철수로 결말지어졌지만, 국제법의 파괴 과정은 그 후로는 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이제 열강들이 국제법을 노골적으로 깡그리 짓밟아도 그 어떤 자유주의적 매체도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주먹의 법에 익숙해진 모양이죠.

    예컨대 최근의 리비아 공습이나 오늘과 같은 시리아 반군에의 서방 열강들과 사우디나 카타르 등 걸프 군주국 정권들의 각종 군사적 지원을 보시죠. 유엔 헌장은 분명히 각국 주권의 존중 원칙을 그 기본으로 합니다 (1장2조1항: “The Organization is based on the principle of the sovereign equality of all its Members”).

    거기에다가 1970년의 유엔 총회의 “국제법에 대한 선언문” (“The Declaration on Principles of International Law concerning Friendly Relations and Co-operation among States in accordance with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 1970년10월24일 채택)은 매우 상세하게 타국의 내정에 대한 그 어떤 간섭, 특별히는 타국의 영토 내에서의 그 어떤 무장 집단에 대한 육성 내지 지원을 금지한다는 것을 명기합니다 (법의 전문)

    누가 봐도 명확하기 끝이 없죠? 국제법을 약간이라도 공부한 비전문가까지도 이와 같은 조항들을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 열강과 사우디 등이 이 국제법 조항들을 노골적으로 짓밟아서 시리아 반군을 육성하면서 시리아 내전을 장기화, 악화시킬 때에는 과연 서방 언론 중에서는 이에 대해 제대로 국제법적인 반대라도 한 신문이나 방송이 있나요? 하나도 없죠.

    다들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을 “폭군”이라고 부르면서, 사우디의 왕권이 시리아보다 백배 더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우디는 “우리” 우방이고 시리아는 이란의 동맹국이고 중국과 북조선의 광의의 우방이니까요. 국제법은 없고 그저 “우리”와 “너네”들의 논리, 저속한 패거리 논리밖에 남지 않았어요.

    아사드와 압둘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왼쪽)과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

    이번의 대북제재도 국제법 파괴 과정의 한 단계인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핵개발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가 있을 때에” 북조선 외교관들에 대한 선발검색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외교관 및 외교공관이 누리는 치외법관에 대한 빈 조약 (The Vienna Convention on Diplomatic Relations, 1961 )의 근본적인 정신을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북조선의 주권 및 외교권 행사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위축시키는 이와 같은 反국제법적인 제재들을 채택시키는 자들이 과연 국제조약들의 내용을 모르나요? 다 알면서 패권국가의 명령에 감히 반대하는 약소국에게는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보편적인 동등 주권”을 골자로 하는 국제법이 무너지고 강권주의가 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국제법 파괴는 군사주의의 심화를 의미하며 군비 증강, 군사적 갈등 분위기의 악화를 예고합니다. 법이 없어지면 힘의 위계만 남잖아요. 국제법 파괴 과정의 끝에는 제1,2차 세계대전과 같은 극도로 흉악한 대량 도살극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밟고 있는지를, 사람들이 왜 이토록 못보고 있고, 왜 이토록 무신경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제법 파괴 과정의 끝에 세계적인 무력 충돌이 생길 경우에는 한반도부터 최악의 전장이 될 것이 뻔한데도 말입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수한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대북 제재나 압력을 위시한 서방 열강들의 국제법 파괴적인 그 모든 행각들에 대해서 보편적인, 세계법적인 입장에서 비판부터 제대로 제기해야 합니다.

    현존의 국제법도 전혀 이상적이지 않지만, 거기에서 적어도 약소국들의 법적 평등이나 내정간섭의 금지, 무력행동 금지 등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제국주의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조항들이 들어있기에, 사회주의자들이 반제적인, 평화주의적인 차원에서는 분명히 국제법 파괴 행동에 대해서는 서방 열강들을 소리높이 규탄해야 합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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