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들과의 살림살이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8]북에서는 일본, 남에서는 미군 관련 일을 해
        2013년 03월 14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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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그러셨구나….아구 감사합니다. 이렇게 믿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아, 몸매도 좋으시고 춤도 잘추고 성격도 화끈하시니, 미군들이 따로 나가자구두 하구 같이 살자구두 하구, 그런 건 당연하지요. 게다가 서방이 있어 머가 있어, 어르신도 마다할 일이 없는거지….

    (김미숙) 댄스홀에서 돈 버는 거야 머 있어? 춤 한번 출 때마다 티켓받아서 돈으로 바꾸는 데 그건 얼마 안됐거든. 2차나 나가면 좀 돈이 되지만, 그것도 돈이 모이지는 않는거지. 돈있는 미군 만나 살림 차리고 재수 좋으면 결혼까지 해서 미국 가서 사는 게 홀에 오는 한국 여자들 꿈이지. 미군 너댓명하고 살림을 채려봤을 거야.

    첫 번째로 살림차린 미군은 총각인데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어. 걔는 “결혼하자, 결혼하자.“ 그러는데 내 속으로는 결혼까지 갈 맘은 없었어. 나이 차이가 많잖아. 안한다고 하면 안오고 생활비도 안주고 할까봐 나도 예스는 했지만 속으로는 딴 생각이었지. 결혼을 할려면 미국으로 서류 보내고 어쩌고 시간이 많이 걸려.

    그렇게 시간 끌다가 미국 복귀하는 날짜가 돼서 가버렸어. 가자마자 서류 마쳐서 다시 오겠다고 하더니 연락도 없더만 멀. 같이 산 미군 중 하나랑은 나도 정말 결혼할 생각을 했어. 나보다 나이도 두 살 많고 결혼했다 이혼한 사람이었어. 애 둘을 자기 엄마가 키우구 있다 그러더라구. 생긴 것도 좋고 매너도 좋구 직업군인에다 여섯 개짜리 싸진(sergeant 사관급의 직업군인)이었어.

    미국사람들은 여자한테 매너 좋은 건 최고야. 어디가든 여자 앉을 의자 챙겨주고, 코트 벗겨주고 입혀주고. 그 남자는 특히 깍듯하게 잘해서 사람들이 모두 정식 결혼한 부인인 줄 알고 그랬지.

    나도 그 사람이랑은 꼭 결혼할려고 내쪽에서도 잘했어. 돈 달란 말도 내 입으로는 안하고, 그 사람이 알아서 주면 그걸루 알뜰하게 살림하면서 저엉 필요하면 내가 모아논 돈을 쓰고 그랬지. 댓 달 살면서 좋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큰 병이 났다고 갑자기 들어가더니 연락이 끊겼어. 세상 일이 마음대로 안풀리더라구.

    댄스홀 나가면서랑 미군들이랑 살면서, 애를 수도 없이 띠었어. 낳지는 않았어. 생긴 거 같으면 병원가서 진찰해서 띠구 띠구 그랬지. 하나 있는 아들 키우기도 그렇게 힘든데, 아닌 말루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데 어떻게 애를 또 나? 더구나 혼혈아를. 살림하는 미군한테 말도 안하구 혼자 가서 띠었어.

    하긴 결혼할 작정 했던 그 싸진하구는 애를 낳을 생각을 했었어. 근데 그 사람이 원래 자식이 둘 있어서 그런가 좀 피하더라구. 그루구 같이 산 게 길지 않아서 그런가 안생겼어. 뱃속에서 죽은 것들한테야 그것도 생명인데 생각하면 불쌍하다 싶지만, 길게 보면 안낳는게 훨씬 나은거지. 난 좀 거기 여자들로는 나이가 들은 축이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나중 일이 걱정되더라구. 그 때 애 많이 띠어서 몸이 많이 축났을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도 한약을, 전에는 일년에 두 번 이제는 일년에 네 번을 먹어. 글구 밥두 흰밥 안먹구 열가지 곡식을 섞어 먹구.(이 부분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 최근 김미숙을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출근했다. 필자는 사전에 요양보호사가 오는 시간이 아님을 어르신을 통해 확인했었는데, 아마 어르신이 깜박 착각을 하셨던 듯하다. 김미숙은 출근한 요양보호사에게 “오늘은 일을 안해도 출근 한 것으로 하겠으니 돌아가라.”고 이야기했고, 요양보호사는 곧 돌아갔다.)

    (필자) 우리나라 여자들 성에 대해서 갑갑하자나요. 남자들은 더하구. 여자는 남자 하나만 알구 일부종사해야 한다느니….근데 어머니는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완전히 다르신 거지. 어머니 스스로 자신의 그런 성적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신 거에요? 더구나 아들도 있고 했으니 마음 한 쪽이 좀 걸리적거리고 그랬을 수도 있고.

    (김미숙) 아, 남자새끼가 재주도 없고 사람구실도 못하다가 그렇게 죽고 없는데, 머가 어때?

    글구 전쟁 끝나고 난 자리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자가 자식 키우기 위해 해먹을 게 머가 있어? 안굶구 살자는 거면, 도둑질만 빼놓으면 다 괜찮은거야. 청상과부니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라 그래. 난 그렇게는 안살아. 그럴 이유가 머가 있어?

    아들도 나 미군들하고 살림 산거 웬만큼 알거야. 살림할 때 데리구 살지는 않고 따로 큰집에 맡기거나 하숙을 시키거나 그랬지만, 벌써 크구 했으니 눈치가 있구 말들도 듣구 그랬겠지. 그 때 어린 아들한테야 떳떳하게 내 입으로 말할 거야 아니었지만, 지금은 당당해. 저 목사를 무슨 돈으로 만든 건데? 그 미군부대 근처서 번 돈으로 집을 사놨었기에, 지 학비를 댄 건데….

    사십 줄 넘어서 한동안 신나게 놀러 다녀본 적도 있기는 했어. 그 땐 살림 살 때는 아니구 댄스 홀이나 나가면서 양키물건 장사도 하고 할 때지. 그러다가 만난 친구 중에 돈 많은 미군 장교랑 몇 년을 사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 덕에 그렇게 매일 놀러 다닌 거지.

    그 여자도 이쁘게 생겼었는데, ‘애도 좋다, 어른도 좋다’ 사람들을 맨 날 자기 집으로 불러대. 한 끼에 교잣상 두 개 세 개 씩을 채워서, 사람들 밥 먹이고 밤에는 재우는 게 그 여자 일이야. 미용사 하나하고 별명이 박물이라는 여자하고 그렇게 둘이는 노상 그 집에서 먹고 자고 아예 사는 거야.

    나야 집이 가까우니 잠은 보통 집에 와서 잤거든, 근처에 얻어 논 방. 그 여자가 결혼인지 첩인지는 모르지만 미군 장교하구 살고 있으니 피엑스 물건을 맘대로 사잖아. 그럼 그 물건을 아침에 나까지 세 여자한테 나눠주는 거지. “언니 언니, 이거 팔아다 오늘 밤에 놀자.” 하면서. 그거 나눠가서 팔아서는 그 돈으로 그 날 저녁에 미장원부터 가고, 택시 타고 캬바레니 극장이니 돌아다니며 쓰고 먹고 놀고, 맨날 그러는 거야. 40줄에 한바탕 그렇게 놀았던 적이 있어. 그 때 나이는 있어도 남자들이 나를 많이 따라 다녔어.

    YongjuGol, we were greated

    미군이 지나가자 꼬마가 거수 경례를 하는 모습. 화투를 하고 있는 두 여인은 양색시이다.(사진: Myles Sampson, 67/69)

    양색시-이응노

    이응노 작 수묵담채 1946. 거리의 풍경-양색시

    집에까지 쫓아오면 동네 챙피하자나. 그래서 저 멀리서 떼 놓구 오느라구 진땀을 빼구 그랬대니깐. 내 인생에 딱 한번 참 신나게 놀았어. 그 여자가 그때도 무슨 암인가가 걸렸었다는 데 나중에 그거로 죽었어.

    생각해보면 내가 미국 덕에 산거 아냐? 양색시 옷장사니, 양키물건 장사니, 미군댄스홀 댄서니, 미군들하구 살림도 살고, 나중에 미군 집 파출부도 그렇고, 모두 미군부대 하구 관련이 있는거자나….

    (필자) 글쎄요….미군부대 근처에서 밥을 벌어먹고 사시기는 한 거지만, 그렇다구 제 생각에는 미국이니 미군부대 덕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네요. 어르신 몸으로 일해서 번 돈이고, 지네는 오히려 어르신 노동 덕에 편하게 살거나 어르신 노동으로 더 큰 이득을 얻은 거 아닐까요?

    미군들 없었어도 어르신은 어디 가서든 몸으로 일해서 생활을 하셨을 테니까요. 어르신 젊어서 일제시대 때도 평양의 전매국이나 피복공장 고무공장에서 일하셨는데, 그게 대부분 일제가 군수물자나 전쟁자금 만들려고 운영한 공장들이지만, 어르신이 그걸 일제 덕에 돈 번거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시잖아요. 그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리구 어르신은 다행히 급하게라도 결혼을 해서 정신대에 안끌려가셨었지만, 그 때 끌려간 어린 처자들도 다 같은 피해자지요.

    (김미숙) 맞어. 내가 그 할머니들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하면서, 내 처지랑 많이 비슷한 거구나….하구 생각이 되더라니까. 어려서는 그런 생각 못했는데 내가 이렇게 살고 나서 보니까 비슷하단 생각이 들더라구. 근데 그렇게 그 할머니들이 많이 모여서 데모도 하고 자기들 당한 거를 알리구 하는 걸 보면서 참 용기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 사람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어? 더구나 벌어먹고 살자고 제 발로 간 거도 아니고 그저 강제로 끌려간거잖아.

    (필자) 강제로 끌려갔다는 면에서 좀 다르기는 하지만 약소국의 가난한 여성들이 당한 피해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요. 그런데 정신대 문제는 많이 알려지고 할머니들의 인권이나 명예회복, 일본 정부의 배상 문제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지만, 미군부대 인근에서 성매매를 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사회가 아무 대책을 안 만들고 있는 건 아직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일제시대의 북한이든 해방되고 미군 들어온 남한이든, 가난한 나라 백성들이야 몸으로 밥벌어 먹기 바쁜 거고 특히 여성들은 더 많이 험한 꼴을 당하거나 더 험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거지요. 결국 큰 이익은 강대국들이 다 챙겨가는 거구요.

    양색시들도 몸으루 먹구 살기야 했다지만, 그 때 정부는 그게 가장 중요한 딸라벌이 중 하나였으니, 겉으로만 단속하는 척하구 속으로는 “벌어라 벌어라” 한거구요.(당시 정부는 미군 주변의 성매매여성들을 관이 주관하는 교육 자리에 모아, “여러분의 몸은 ‘달러박스’이며 여러분은 ‘달라벌이전사’”라며 교육시켰다. 1964년 국가총매출 1억불 중 절반 이상이 미군 상대 성매매여성들이 의해 달성되었다.)

    양색시 샵 운영한 사람들이야 일부 돈을 벌었겠지만, 양색시들 대부분은 젊어 한때 그렇게 먹고 살았지만 큰 돈 모은 것도 없고, 몸에는 병만 남거나 혼혈아 낳고 해서 두고두고 힘들고 멸시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어르신이야 다행히 돈을 알뜰하게 모으셔서 일찌감치 이 집이라도 사고 아들 목사라도 만드시고 하셨으니 보람이 있으신 거지요.

    미군부대 인근 대부분 성매매 여성들이나 미군하고 산 여성들은 미국가는 꿈에 속고, 돈은 제대로 못모은 채 몸 상하고, 어디가면 멸시받으니 그 주변에서 늙도록 못떠나고, 팸푸니 마마상이니도 하고 장사도 하며 살다가 나중에는 병들어 극빈층으로 겨우겨우 사시거든요. 정부는 전혀 책임도 안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닥치는 대로 살 수 밖에 없고 진짜 이익은 돈 있는 놈, 강대국, 양색시 앞세워 달라벌이한 한국 정부, 다 글루 간 거지요.

    (김미숙) 그러구보니 그렇네~ 근데 댁이 팸푸(팸푸 : pimp 뚜쟁이. 성매매 현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 성매매여성들을 관리 통제하는 사람들에게도 쓰임)니 마마상(마마상 : 기지촌 클럽의 웨이트리스이면서 실질적인 중간 포주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니 그런 걸 어떻게 알아?

    (필자) 제 후배나 친구들 중에 성매매지역이나 미군부대 근처 기지촌에서 성매매 여성들 인권과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성매매 하는 여성들도 친구가 몇 명 있고. 그 친구들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김미숙) 그렇구나~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니까. 배워두 제대로 배웠네. 배운 것들이 더 그런 사람들 무시하구 그러는 게 많거든. 댁은 제대로 배웠으니까 나 먹고 살은 거하고 일본이니 미국이니 한국이니 그런 걸 다 연관을 짓구, 그런 사람들두 이해하구 그런거지. 나는 평생 일본이랑 미국 연관되서 일을 하며 먹구 살았어도, 그렇게 생각은 못했었거든. 근데 댁 말을 들으니 딱 들어맞는 말이네. 젊어서 북에서는 일본한테 득되는 일을 한거고, 남쪽 와서는 미국한데 득되는 일을 한거고.

    (필자) 가난한 백성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잘나고 많이 배운 놈들이 지도자네 정치인이네 하면서 나라 줏대는 안세우고 지들 이익 챙기느라 나라를 팔아먹으니까 문제지요. 어르신이야 그저 자식 키우며 먹고 사느라 열심히 사신거지. 그리고 다행히 돈을 알뜰히 모아 말년이라도 덜 고생하시면서 이렇게 사시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아이구 우리 넘 심각해진거 같네요. ㅎㅎ

    (김미숙) 아니야, 내가 헛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닌 말루 댁 만나서 나 살아온 이야기하면서 많은 걸 배운다니까. 참 그때 그 사람에게 못되게 굴었다….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도 관심없는 별 볼일 없는 인생 굽이굽이 혼자만 살다 혼자 싸질머지고 가는구나 생각했는데, 댁한테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머 그닥 잘못 산 것도 없고, 한편 또 참 열심히 살았구나 생각도 드는 거야.

    한국 사람들 하두 깝깝해서, 내가 미군들 곁에서 먹구산 거며 미군이랑 살림 산거며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하겠어? 자랑꺼리도 아니고 누가 듣자고 물었던 사람도 없고, 그냥 나 혼자 담고 죽는 거지. 이렇게 풀어놓으니까 남의 인생 같기도 해서 안쓰럽기도 하고, “잘살아냈다. 다행이다.” 하며 혼자서 내 위안도 한다니까….

    (필자) 그럼요~. 어르신은 내가 아는 여성 노인 중에 정말 당당하고 똑부러지는 분이셔요. 얼마나 당당해요. ‘내 인생 내가 산다’, 이거 말예요. (이야기 가닥을 다시 잡으며) 그래서 제가 어르신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글로도 남기고 싶었던 거잖아요.

    그런데 어르신 생각에는 어르신이 그 미군부대 지역을 나오시게 된 계기가 머라고 생각하셔요? 그 지역에서 먹고 살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지금 나이 80세가 다 돼서도 그 지역을 못떠나고 거기서 가난하게 살고 계시거든요. 폐휴지도 줍고 하면서 생활보호대상자로 보조금 받으시면서. 다른 데 가서 살 데도 없고, 사람들한테 애먼소리 들을까봐 못떠나기도 하고….

    (김미숙) 나는 집을 종로에다 사놨었잖아.(평양의 가족과 집을 떠나, 남편의 죽음으로 시댁과 가부장을 떠나, 그녀 스스로 고생고생하며 장만한 “그녀의 집“에 대한 김미숙의 애착과 자긍심은 대단하였다. ”아버지의 집“들을 떠나 마련한 ”그녀의 집“은 그녀 스스로 마련한 삶과 정서의 준거지이자, 독거여성노인의 불안한 경제적 미래를 담보할 밑천이며, 모든 간섭과 시선에서 독립할 수 있는 ”그녀의 천국“이었다. 그러니 이후 구술에서 나오지만, 그 집의 3/4을 뺏어간 국가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예 미국으로나 갔다면 모를까, 그거 말고는 그 미군부대 근처 생활은 나한텐 임시였어, 돈벌려고나 아니면 친한 사람들이 있어 같이 어울리기나 하려는. 친구년한테 집을 공짜로 빌려줬었지만, 언제라도 내가 들어올 수 있는 내 집이잖아. 내가 고생고생 해서 마련한 집.

    그루구 아들이 목사공부 하면서부터는 혹시라도 아들한테 걸림돌이 될까봐 그 동네를 딱 발을 끊은 거지. 나이가 많아서 팔리지야 않겠지만 그래두 거기서 먹고 사는 방법도 많이 있구, 친한 여자들두 거기에 많았지.

    그래두 발을 끊었어. 나는 한 번 끊으면 딱 그걸루 그만이거든. 거기 끊구 아들 목사만들 돈 대려니까 또 바빴지. 이태원 미국 집으로 파출부 다니구, 일 안나가는 날은 또 장사두 하구 하면서….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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