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허가 집에서 공장하던 때
    [어머니 이야기 10] 계 타는 날은 갈비탕 먹는 날
        2013년 03월 11일 0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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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음력 8월 10일 내 동생 은영일이 태어났다. 어머니가 9만 원을 주고 산 판잣집 터에 벽돌집을 짓고 일주일 뒤였다. 동생은 네 살이 되도록 잘 걷지도 못 했고 말도 또렷하게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초등학교도 일반 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 벽돌집 지하실에서 공장을 했다. 그 동네에 살던 송씨 아저씨가 공장을 하다 가 망해서 그것을 아버지가 맡아서 했다. 책상이나 책장을 만들 때 끝부분에 들어가는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물건을 만들다 잘못 된 것을 다시 갈아서 써야 했다. 그것을 가는 분쇄기를 우리 집 앞에 있는 언덕에 흙을 파서 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땅을 깊게 팠다. 그래도 소리가 시끄럽다고 동네 사람이 신고를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큰형이 초등학교에 갔는데 필통을 안 가지고 가서 갖다 주고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가 막내 동생을 업고 있다가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야야, 철거반원들이 분쇄기를 다 부수고 저리 가고 있다.” 어머니는 그 철거반원들이 타고 있는 화물차를 가로 막고 그 차에 올라탔다.

    어머니는 그 차를 타고 가다가 생각했다. ‘아기를 업고 있는 시어머니가 걱정을 하겠다. 그냥 내려야겠다.’ 어머니가 다시 차에서 내리겠다고 하니 차를 세워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어머니는 찻길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철거반원들은 놀라서 어머니를 태우고 제기동에 있는 동부시립병원에 데리고 갔다.

    철거반원들은 어머니가 깨어나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아주머니, 어서 깨어나세요. 앞으로 분쇄기를 더 크게 짓고 더 많이 지어도 좋으니 깨어나기만 하세요.” 어머니는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살짝 눈을 떴다. 철거반원들은 과일과 마실거리를 한 상자씩 사 놓았다. 어머니는 그때 차에서 뛰어내리며 다리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렇게 지킨 공장이었지만 얼마 못 가서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곗돈을 붓고 세를 놓아서 재산을 불렸다. 어머니는 당신 입에 들어가는 것은 사 본 적이 없다. 아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곗돈을 주는 날은 우리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날은 모두가 갈비탕을 배불리 먹었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먹을 때면 이웃집에 자주 갔다. 그 집에서 소일거리를 해 주고 밥을 얻어먹고 버리는 푸성귀를 가져왔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해 주었다.

    한번은 큰형이 어머니에게 계란프라이를 해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건 하숙생한테만 해 준다고 하니, “그럼 엄마, 나도 하숙생 될래. 그러니까 나도 계란프라이 해 주라.” 며 떼를 썼다.

    우리 집엔 시골에 살던 친척 형들이 자주 와서 살았다. 은종목, 장희순, 은종욱 형들이다. 모두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느라 몇 년씩 우리 집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이지만 조카들에게 먹을거리와 잠잘거리를 주었다. 어머니는 조카들에게 잘 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친척 형들은 어머니가 당신 아들과는 차별을 했다고 말을 한다. 그래도 어느 누가 조카들을 그렇게 데리고 살 수 있겠냐고 어머니에게 고마워한다.

    어머니는 벽돌집에서 한 집 건너에 살고 있는 솜 공장을 하는 최사장 집에 돈을 많이 빌려 주었다. 달마다 이자를 잘 받았다. 어느 날 그 집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솜 공장 사장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내다 빚더미에 앉았다. 빚잔치를 한다고 모이라고 했다.

    사장들 열 댓 명이 모였다. 어머니는 말을 했다. “내가 이 집을 잡겠다(가지겠다). 그러면 최사장이 집을 얻을 때까지 이 집에서 그냥 살게 해 주겠다.” 모두들 어머니 말에 놀랐다.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사람이 통 크게 말하는 것에도 놀랐고, 무허가 판잣집을 사서 무엇 하겠나 싶었다. 어머니가 집을 사겠다고 하니 너도나도 그 집을 가지겠다고 했다.

    최사장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친구들이니 너희들이 양보하라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집을 팔았다. 그 뒤로 최사장은 날마다 산에 갔다. 그러다 한 날을 죽을 만큼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는 집에 오겠다는 것을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아 있는 최사장 식구들은 이사를 갔다.

    그때가 1974년쯤 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평생 대통령을 하려 했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살라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고 외치며 죽었다. 아침마다 새마을운동을 하자는 방송을 크게 틀었다.

    무허가 판자집 철거

    960년 10월 29일 청계천변에 있던 무허가 판자집 162동이 철거되었다. 1천여 명이 동원된 이 철거작업은 청계천 덮개공사 및 도로건설을 위해 추진되었다.(사진=서울역사편찬위)

    어머니는 이런 속에서도 당신 아들들만 잘 키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하지만 어머니도 법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구청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허가 판잣집이니 이곳에서 나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구청 사람들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었다. 이 집을 철거하려면 여기 있는 아이들 넷을 다 데리고 가라고 울고불고 했다. 구청 직원은 세상에 이런 아줌마는 처음 보겠다며 이곳에서 살고 싶으면 건물을 새로 지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돈이 하나도 없으니 집을 새로 지을 수 없었다. 그 집에서 공장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그 집을 맡으라고 했더니 100평 가까이 되는 집과 땅을 거저 가지려고 했다.

    어머니는 건축 자재를 데는 사람을 찾아갔다. 청량리 전곡시장 가까이에서 건축업을 하는 뚱뚱한 할아버지였다. 그 사람은 어머니를 보더니, “니는 내 물건 떼먹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다. 집을 짓고 세를 놓고 나중에 돈을 줘라.” 하면서 집을 지을 재료를 돈 한 푼 받지 않고 대 주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건축 재료를 날랐고 어머니는 지난 번 벽돌집을 지은 경험을 살려 집을 지었다. 집을 다 짓고 세를 놓으니 바로 사람들이 들어와서 집을 지을 때 빌린 재료비를 싹 갚았다. 어머니는 그 때 도와준 건축 재료 할아버지가 고마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소개해 주었다.

    어머니는 넓은 땅에 먼저 반만 집을 지었다. 나머지 반쪽은 전에 살던 사람이 그대로 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사장은 집을 사라고 했을 때 거저 가지려 했던 사람이다. 어머니는 집을 다 짓고 나서 공장세를 올리겠다고 하니 나갔다. 어머니는 속이 후련했다.

    나중에 어떤 젊은 사람들이 세 들어 왔다. 그 집 남자는 월세로 집을 얻었는데 아내는 전세로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 우리 집 전세예요, 사글세예요?” “아니 전세면 어떻고 사글세면 어때. 애 하나 있고 남편이랑 살러 왔는데 이사 가려고~”

    어머니는 어쩌면 어머니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좀 야박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신다. “남은 남이다.” 아무리 잘해 주어도 다른 사람이 내 살 길을 열어 주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로지 어머니는 아들만이 잘 되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못 배운 한을 아들이 풀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안하면 때리기도 했다. 큰형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과외를 시켰다. 하지만 큰형은 공부 머리는 아니었다. 막내 동생도 마찬가지고. 나와 둘째형만 공부를 잘했다. 과외 한 번 하지 않았지만 반에서 우등생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그만 얘기하자고 한다. 지금부턴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다고. 어쩌면 앞으로 나오는 얘기는 내가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앞으로 얘기는 어머니 아들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벌어지는 일들이 나온다. 잘 읽어 주기를 바란다. 아니 다음엔 어머니는 싫어하지만 어머니 친정집 얘기를 해야겠다.

    어머니가 먼저 서울에 올라오고 몇 해 뒤에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새기터에 살던 친정 식구들이 모두 서울에 올라왔다. 큰외삼촌과 작은외삼촌 식구들 얘기를 들려주겠다.

    2013년 3월 10일 오늘도 나 혼자 집에서 쓸쓸하게 글을 쓰는 날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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