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엄을 향한 탈출의 서사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슬라보미르 라비치 '얼어붙은 눈물'
    2013년 03월 11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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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탈출 서사’의 원형은 구약 성경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웅장하고 장엄한 탈주의 장면으로 기록될 이 사건은, 신의 뜻이 지상에서 이룬 위대한 성취이자, 고난의 노예 생활을 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보여주는 뚜렷한 실례이기도 하다.

물론 간헐적으로 터져나온 불만과 불신이 그들을 때때로 절망시키고 분열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의 물리적 힘도 그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가던 패배주의적 운명론도 자유와 해방을 향한 그들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기억을 풍요롭게 해주는 또 하나의 탈주 장면은 영화 「영광의 탈출」에 담겨 있다. 전후(戰後)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담은 이 오래된 영화는, 이스라엘로 귀국하려는 유대인들이 키프러스 섬의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그곳을 탈출하는 장엄한 광경을 그리고 있다.

수용소에 몰래 잠입한 주인공은 여객선 엑소더스(Exodus)호를 통해 섬에 유폐되어 있는 2천여 명의 동포를 탈출시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영국군이 엑소더스호에 정선(停船) 명령을 내려보지만, 엑소더스호의 모든 유대인들은 주인공의 지도 아래 일사불란한 단식 투쟁을 벌인다.

이러기를 며칠, 마침내 영국군은 들끓는 세계 여론에 무릎을 꿇고 정선 명령을 취소한다. 이때 모든 유대인의 자유와 해방의 꿈을 싣고 그들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을 향해 힘차게 출발하는 엑소더스호의 모습은, 자유와 뿌리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를 웅변해주는 출애굽의 현대적 재현이라고 할 만하다.

무고하게 범죄자로 몰린 한 사람의 치밀한 탈출 과정을 그린 영화 「쇼생크 탈출」이나 「도망자」 등도, 인간의 자유야말로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정체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처럼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여 자유와 존엄을 택하려는 사람들의 수많은 탈출 서사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명징하게 암시해준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슬라보미르 라비치(Slavomir Rawicz)의 <얼어붙은 눈물>(지호출판사, 박민규 옮김)은 제2차세계대전 중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가 그곳을 탈출한 저자의 극적 체험을 사실적으로 재구한 일종의 실록(實錄)이다.

얼어붙은 눈물

라비치는 다른 몇 명의 죄수들과 함께 수용소를 극적으로 빠져나와, 얼음으로 덮인 강을 건너고, 죽음의 사막을 지나, 눈보라 치는 히말라야를 넘는 험난하고도 오랜 탈출의 도정을 우리에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탈출 과정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던 모진 추위와 굶주림, 목마름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 책 내용의 주요한 근간을 이룬다.

결국 시베리아․고비 사막․히말라야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을 되찾은 이들의 탈출 서사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과 의지가 얼마나 강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들이 치러낸 공포의 실감이 얼마나 섬뜩하고 혹독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새삼스런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고, 나아가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2.

1939년 당시 라비치의 조국 폴란드는 나치 독일과 소련군에 의하여 양분된 상태였다. 폴란드 기병대의 중위였던 스물네 살의 라비치는 독일 침공과 동시에 동부로 쳐들어온 소련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는데, 그들은 라비치를 루비얀카 형무소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한다. 간첩임을 자백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항의 의지”를 잃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서명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마음의 조그만 이완이 자기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소련 연방법원에서 일사불란한 강압적 재판을 받은 끝에 25년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에 처해진다. 라비치를 포함한 수천 명의 죄수들은 이르쿠츠크까지 기차로 이동한 다음, 차디찬 쇠사슬에 묶여 동시베리아 야쿠츠크 제303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죄수들이 추위 때문에 죽게 되고, 그 주검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버려진다. 그런데 저자는 이 혹독한 행렬 가운데 있었던 인상적인 삽화 하나를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 바로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속삭였고, 그 소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죄수들 사이에 번져갔다. 그때 갑자기 “뒤쪽 멀리서 갑자기 가느다랗게 물결치며 웅성대는 소리가 있었다. 이상스럽고 놀라운 소리였다. 이 소리가 차차 높아지며 우리들한테 밀려왔다. 그것은 거대한 합창이었다.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에서 울려 퍼지는 힘찬 남성 합창이었다”.

차디찬 지상의 감옥 시베리아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을 부르는 죄수들의 힘찬 하모니는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풍경은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장엄한 탈출 과정을 미리 예견케 하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는 수용소로 가는 도중 순록을 탄 오스탸크 족 사람으로부터 수용소에서 언젠가 탈출을 감행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용소에 도착해보니 폴란드인이 특히 많았으며, 대부분 소련의 눈밖에 나서 누명을 쓰고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무계급의 사회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재빨리 노동자를 두 계급으로 나누어 놓고 한 계급에만 상당한 보수를 주어 명확한 차별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반어적 장면을 목격하고, 인간 해방을 기치로 내건 소련 사회주의의 허구성과 폭력성 곧 “소비에트가 가진 수많은 아이러니”를 실감 있게 경험한다.

뜻하지 않은 수용소장 부인의 따뜻한 도움을 받아 그는 다른 죄수 여섯 명과 함께, 사전에 준비한 대로 폭설이 퍼붓는 날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다.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미국인 스미스, 리투아니아 출신의 건축가 마르친코바스, 폴란드 기병상사 출신의 팔루호비치, 폴란드 국경수비대 대위 마코프스키, 라트비아에서 온 거구(巨軀)의 콜레메노스, “가장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차로 등이었다.

웨이백

‘얼어붙은 눈물’을 원작으로 한 영화 ‘웨이백’의 한 장면

레나 강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크리스티나라는 어린 소녀까지 합쳐 탈주자의 인적 구성은 모두 여덟 명이 된다. 그들은 도끼와 칼 한 자루, 부족하기 짝이 없는 식량에 의지한 채 1년여 간 시베리아에서 몽골, 고비 사막, 티베트, 히말라야를 지나 인도까지 장장 7천km를 주파한 것이다.

가장 큰 시련과 위기를 그들은 고비 사막에서 만난다. “우리는 물도 없이 약간의 식량만 가지고 고비 사막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들 중의 누구도 앞으로 맞닥뜨릴 지옥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는 고백은 그들이 건너야 할 고비 사막이 얼마나 지독한 험로(險路)인가를 알려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살인적 더위와 갈증에 저절로 무릎이 무너지며 쓰러진다. 입 속에 자갈을 넣고 돌려 침을 만들어 삼켜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물도 없고 남은 힘도 없었다. “그 광대한 범위와 불모의 속성을 모른 채” 떠난 탓에 그들은 온갖 고통을 치른 후 죽음의 모래밭을 지나게 되지만 결국 크리스티나가 탈진과 고통 속에서 죽게 된다.

이 가녀린 소녀의 죽음을 두고 저자는 “신조차 버린 이 땅에서 우리 일곱 명은 목놓아 울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어 마코프스키도 극도의 피로에 휩싸여 죽게 되고, 아침이 밝아올 때마다 다음 차례는 누굴까 생각하며 그들은 절망과 공포에 빠진다. 이어서 마르친코바스와 팔루호비치가 차례로 죽게 되는데, “결국 이렇게, 결국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하는 스미스의 탄식은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유한자(有限者)인가를 알게 해준다.

그 “고통과 슬픔과 일 년에 걸친 모진 걸음 끝에” 그들은 “다시 삶을 얻게” 된다. 수용소를 탈출한 지 꼭 1년 만에 드디어 영국령 인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탈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속에서도 우리를 굳게 이어준 따뜻한 우정” 때문이었다고 라비치는 적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들의 탈출 과정에 결정적인 조력자로 등장하곤 하는 몽골인과 티베트인들의 친절과 헌신은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존엄의 한 극점이다.

그들이 보여준 우정과 친절과 존엄성은 20세기가 결코 타자를 죽이기만 했던 야만과 살육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것 같았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비참한 기억을 씻어줄 만큼 인간적인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일깨워준다. 인도의 캘커타로 후송된 그는 한 달 만에 깨어난다.

한 달 동안 의식을 잃었던 그는 밤이면 소리를 지른다거나 탈출 과정에서 반복했던 행위를 무의식적 관성으로 되풀이하는 등 거의 몽유(夢遊)에 가까운 병을 치른다. 퇴원 후 그는 폴란드 군으로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결국 조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소련치하의 폴란드에서 수많은 탈주자들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3.

이제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 20세기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광기에 찬 살육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 전쟁, 단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온 수많은 국지전과 내전, 잔인한 폭력과 대량 학살 등으로 인해 20세기는 피로 흥건한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인류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 파시스트들에 의해 저질러진 전체주의와 대량 학살과 인권 말살 행위일 것이다. 우리도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30년대말에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의해 얼마나 간난신고를 치렀던가 생각해보면, 폭력과 야만의 세계적 동시성을 절감하게 된다.

슬라보미르 라비치는 “우리 모두 지난 피투성이의 역사에 대한 생생한 기억 속에 살아왔다. 처형된 사람들, 굶어 죽은 사람들, 길에 널린 시체들, 치료받지 못한 부상자들. 수송 도중 태어난 아기를 트럭 밖으로 버리고 남겨진 그 어미를 강간하는 상황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나는 온 세계가 평화로 지속되는 이웃이 되기를 기도했다. 이 작은 책이 소련 통치 하의 폴란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내 소망은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고백한다.

20세기여, 그대가 대답하라. 폭력의 제국주의여, 전체주의여, 뭐라고 말 좀 하라.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지는 제국주의의 야만적 폭력이 창궐하고 있으니, 21세기도 야만과 존엄의 대결이 벌어지는 장이 되지는 않을까.

이 책의 원제는 ‘The long walking’이다. 그런데 왜 역자는 이 책의 제목을 “얼어붙은 눈물”이라 붙였을까. “기나긴 걸음”이라고 직역을 해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눈물마저 얼어붙은 극한 상황을 그들이 통과해왔음을 암유(暗喩)하려는 것일 터이다.

여하튼 인류의 가장 위대한 행진으로 기록될 이 사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욕망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때때로 가감 없는 역사의 재구는 이토록 인간을 겸허하게 하고 왜소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때때로 망각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인간의 양보할 수 없는 자유와 존엄임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필자소개
한양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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