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무지에서 살아남기
    - 좌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동북아의 평화, 통일, 세습반대, 녹색사회주의를 위해
        2013년 03월 08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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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선 이후 황폐한 토대 위에서 서 있는 황폐한 한국의 진보정치, 좌파운동의 과제와 고민점들에 대해 서영표 제주대 교수가 기고글을 보내왔다. 많은 고민꺼리를 담고 있기도 하고,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한 의견을 담고 있다. 이 글은 <문화과학> 최근호에 기고한 글을 요약한 내용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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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

    한국의 좌파는 황무지에 서 있다. 풀 몇 포기가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미 좌파는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머릿속의 사회주의는 대중과 소통하기에는 너무 낡았지만 새로운 이념과 실천전략은 아직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는 스스로를 소수로 고립시켰다. 그래서 좌파에게 던져진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어야 하는가’이다. 즉 생존 자체가 걸린 자기 정체성을 확립을 우선되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좌파의 첫 번째 과제는 ‘사이비’ 보수-진보전선(혹은 민주-반민주전선)과 명확한 선을 긋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87년 이후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았다. 민주-반민주 전선을 둘러싼 논란은 운동세력 분화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분화과정 속에서 ‘민중대통령후보’가 출현했고 마침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민주-반민주 전선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보수전선을 그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더 이상 자유주의정당의 들러리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따라서 ‘진보 대 보수’라는 논쟁틀은 상당한 정치적 진전을 의미했다.

    하지만 진보 대 보수의 구도는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프레임(frame)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진보의 중심을 진보 대 보수 구도 속에서 극복되고 청산되어야 했을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사이비 진보는 더 이상 좌파의 연대 대상이 아니다. 이제 분명한 분리의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사이비 진보인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만을 진보정치라고 생각하는 진보세력과 대결해야 한다. 강남좌파 등의 소위 명망가들의 담론이 그것이다. 소위 ‘강남좌파’의 존재는 어쩌면 한국 진보좌파운동의 현실적 수준을 드러내 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강남좌파라’라는 범주 자체가 좌파의 무능을 드러내주는 치욕스러운 호칭이기 때문이다.

    강남좌파

    강남좌파 담론을 다룬 책 ‘강남좌파’

    물론 새로운 좌파는 지식인과 전통적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도시에 기반을 둔 신좌파로부터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에라도 새롭게 호명되는 좌파는 ‘내용’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저명한 개인 명망가들의 역할을 과장하고 그들이 마치 새로운 좌파를 대변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현재 좌파운동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강남좌파로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아마도 박원순과 같은 시민운동 스타를 서울시장으로 대통령후보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셋째, 이런 조건에서 좌파는 분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분열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가 무엇인가? 원칙도 내용도 없는 문재인 지지를 통해 좌파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물론 이 주장을 구체적인 정치일정 속에서 협상과 협력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선택은 소수만의 동아리로 자기 고립을 자초할 뿐이다.

    하지만 역으로 정치공학적인 협상과 연합만이 존재한다면? 좌파의 분열과 몰락은 그런 원칙 없는 공학적 협상과 연합의 결과였다. 내용도 없고 원칙도 없는, 아니 내용과 원칙에 대한 토론과 논쟁 없는 단결은 좌파가 그렇게도 비판해 왔던 통합진보당 당권파들의 패권주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버릴 것은 버리는’ 과정은 지금껏 억눌려 왔던 (진보) 좌파 내의 소통을 복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통의 복원과 공개적인 토론은 지금까지 강요되었던 무원칙한 ‘대동단결’이 아닌 원칙과 내용이 있는 통합과 연대로 가는 출발지점이 되어야 한다. 좌파는 민주주의자이어야 하며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며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네 번째 과제는 좌파운동의 다수파임을 자임해 왔던 통합진보당 당권파들과의 분리선을 긋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다른 표현인 자주파는 지금까지 한국 좌파운동의 다수를 형성해 왔다. 넓은 좌파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대중의 눈에 좌파는 자주파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자주파는 한국 좌파 운동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해악을 끼치기 시작했다. 북한노선에 대한 맹목적 추종, 자신들만이 좌파의 대표라는 오만한 태도, 좌파의 독자적인 정립보다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을 확대유지하려는 정치노선. 이 모든 것이 한국의 좌파가 나갈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어 보자. 좌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부당한 권력과 부의 세습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고 민중을 정치와 권력의 주체로 만드는 정치기획을 제시해야 하는 대안적 세력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주파는 이 모든 것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만이 진보정치의 주체라고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부르주아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실천과 상상력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통합진보당은 민주당이 그런 것처럼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부분적 연대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좌파 정치의 주체일 수는 없다. 그들 스스로는 여전히 좌파임을 주장하겠지만 그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 좌파가 ‘좌파’일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보다 적극적으로 친북적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인 정당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과거 학생운동 경력을 앞세워 민주당에 입성했지만 국회의원 뱃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3(4)86 정치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제 이들 모두는 좌파의 투쟁대상이어야 한다.

    반정립을 넘어선 스스로의 정체성

    여기서 멈춘다면 좌파는 여전히 ‘무엇’에 대한 반정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종북주의’에 대한 투쟁을 ‘선포’했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구민주노동당 탈당파들의 무능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스스로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무엇을 얘기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가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입장과 행동을 가진 진보좌파의 재건이다.

    동북아시아는 언제나 긴장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긴장 상태는 한국 진보좌파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선 중국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적 성장과 국제적 영향력 확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내적 모순을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의 정치구조는 공산당 일당독재이며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인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기형적 구조 안에서 중국식 개혁개방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 가리어져 있는 우려스러운 점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에 동반될 수밖에 없는 빈부격차의 문제이다. 지역 간(도시-농촌) 그리고 계급 간 빈부격차가 공산당이라는 정치적 틀 속에 고여 있는 물이 썩어가는 부정부패와 결합되면 내적인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부추기고 있는 파워게임에 휘둘리면서 과도한 군비지출과 함께 이데올로기적으로 중화주의적 국수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중국에 대한 한국 진보좌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한국 진보좌파의 태도가 중국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진보좌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적 스케일에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세습반대’와 관련하여 뒤에서 다시 언급)

    한국 진보좌파는 커져가는 빈부격차와 부패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공산당 내 분파가 권력분점에만 몰두하고 있는 중국 지도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져야만 한다.

    부정부패에 대한 엄단과 재산몰수 등의 급진적 정책이 추진되지 않는다면 서방세계가 시장자유주의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미국이 설정한 프레임 안에서 군비경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군축을 선도하고 그럼으로써 지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앞장서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일당 독재가 다당제 형태의 민주주의로의 이행도 고민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서방의 다당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는 중간경로로 간주되어야 한다. 중국정부가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고 말고는 두 번째 문제다. 한국의 좌파로서 이러한 입장을 천명하고 국제적인 연대의 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 민주당과 자민당 정부 모두 우경화와 보수화의 길로만 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주의적 정책의 유지는 평화헌법의 개정은 물론이고 자위대의 군으로의 승격까지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좌파는 이러한 흐름의 정치사상적 배후에 일왕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비판해야 한다. 동북아시아 진보좌파가 내세우는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일왕제의 폐지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좌표를 상실하고 존폐의 기로에 선 일본의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정당의 현실은 우리만큼이나 처참하다. 한국의 새로운 좌파가 일본 내의 양심세력, 반전 평화세력을 추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히로히토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사열하고 있는 히로히토 일왕

    물론 일왕제를 폐지하는 것이 모든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이해되며, 이에 동의하는 일본 내 모든 세력과 연대해야 할 것이다.

    세습 반대와 반자본주의적 투쟁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하지만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넘어서는 아시아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좌파기획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언급에서 드러났듯이 그것의 출발은 보다 깊고 넓은 민주주의와 평화일 것이다.

    여기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대중들의 정서와 접합시킬 수 있는 요소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것을 ‘세습 반대’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입장과 행동을 가진 진보좌파의 재건’에 이어지는 한국 좌파의 두 번째 과제는 경제적 부와 권력의 세습반대를 통해 넓은 연대의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습’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 경영인에게 기업을 물려준다고 해서 경쟁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습반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은 이 구호가 세 가지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① 세습은 자본주의적 구조적 모순과 체제에 대한 대중의 정서적 느낌이 만나는 지점일 수 있다. 이윤(잉여가치)만이 운동의 동기인 자본의 논리는 부의 편중과 대물림으로 드러난다. 대중의 적대감은 자본운동의 논리가 아닌 이러한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부와 권력의 세습을 향해 표출되는 것이다.

    세습2

    이건희-이재용의 세습과 교회세습 토론회 모습

    그렇다고 세습이 자본의 논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불러 올 수밖에 없는 부의 집중은 부의 세습을 가져오고, 부는 곧 권력의 세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② 세습반대가 아시아를 관통하는 연대의 틀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북한의 3대 세습, 일본의 일왕제, 중국 부유층의 권력과 부의 독점뿐만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부와 권력 세습 문제를 총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세습은 재벌의 세습과 대형교회의 세습 등에서 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유일한 계급이동의 통로였던 교육마저도 세습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집단이 교육의 기회를 독점하고 나머지는 들러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의 붕괴와 천문학적 액수의 사교육 시장의 형성은 곧 중산층의 좌절과 절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시아가 겪고 있는 세습의 문제는 전통적인 신분의 세습과 함께 자본주의적 착취에 근거한 부의 독점이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반대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투쟁을 좌파적 관점에서 결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③ 세습반대는 일면 세습체제와는 정반대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이 규범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형식적 평등의 보장’을 사회적 투쟁의 매개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출발점 ‘형식적 평등의 보장’이다. 이념적으로 이 원리가 포기된 적은 없다.

    세습1

    김정일-김정은과 박정희-박근혜

    하지만 이 원리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체제 안에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모든 부분의 전근대적인 봉건적 세습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봉건적 세습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가 낳은 근대적 세습 또한 점점 강화되고 있다. ‘기회의 평등’과 ‘형식적 평등’은 이러한 세습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며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의 결합으로 존재하는 현 체제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 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현 체제의 지배계급은 형식적 평등과 민주주의의 원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세습반대 투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면서도 그것을 비판할 수 있게 할 것이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보통 사람들의 의식세계의 불만/저항과 접합할 수 있게 할 것이다.(내재적 비판)

    세습반대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 보자.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민중의 생활에 파고드나? 바로 양극화와 이에 따른 중산층의 몰락으로 대표된다. 고용의 불안정은 항상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제한된 일자리를 둘러 싼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노노갈등도 존재한다. 경쟁에서 탈락한 민중들은 어디로 가나? 바로 자영업이다.

    언론매체에서 연일 대박집의 비밀을 이야기하니 너도나도 미래는 자영업으로 생각한다. 해서 작금의 한국사회에는 중소자영업자(상인)들로 넘쳐난다. 정년은 단축되었고, 위기가 되면 가장 먼저 구조조정 카드가 등장한다.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에게는 비정규직으로 전락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40-50대 ‘가장’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파트 경비 정도의 직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텔레비전과 신문에선 성공한 자영업자의 뉴스가 계속 나온다. 소위 ‘대박집’들이 여기저기서 소개된다. 결과는 자영업의 홍수다. 경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성공한 소수의 자영업자 외의 대다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여기에 더해 대기업과 이들과 연계된 프랜차이즈 사업체들의 ‘골목상권’까지 잠식해 들어와 푼돈까지 긁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중소자영업자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자가 나타나서 은행에서 대출하고, 인테리어 공사 새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망한다. 이것이 GDP의 성장이다.

    결국 대부분의 중소자영업자들은 손쉬운 재산 강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강탈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소자영업자들의 불만은 쉽게 저항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싸워야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할지 분명하지 않다.

    사업실패는 개인의 능력 탓이 아닌가? 세습반대는 이렇듯 누적되고 있는 중소자영업자들의 불만을 저항의 정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통일세력으로서의 좌파-딜레마와 과제

    생존을 위한 한국 좌파의 세 번째 과제는 “동북아 평화세력”으로서 그리고 “세습 반대 운동”의 주체로서 한반도 통일을 위해 실천하는 통일세력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왜 필요한가? 분단이 한국사회의 모순을 은폐시키는 효과로 작용하고, 분단의 모순이 무엇보다 대중에게 전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분단을 이유로 억압적 통치체제를 정당화해 왔다. 북에서는 권력의 3대 세습마저도 용인되고 있으며 남에서는 여전히 냉전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극우파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 때문에 소요되는 천문학적 액수의 군비지출 또한 고스란히 대중들이 져야할 짐이다.

    하지만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민족 대단결’과 같은 이미 낡아버린 이념에 호소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통합진보당 자주파들이 여전히 이같은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과 갈라서야 하는 한국 좌파에게 통일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과정일 뿐이다. 분단 상황에서 배를 불리는 것은 북의 김씨 세습정권과 남의 지배계급이다. 이러한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 진보적 사회발전의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통일세력으로서의 좌파는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통일 없이는 한반도의 진보적 사회발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 가능한 통일의 경로는 자본주의적 방식일 것이다. 남쪽의 대자본을 포함한 국제 자본의 무대가 될 것이며 북한의 지배층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본가로 전화할 것이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예상 가능한 통일 경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처럼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은 순식간에 통일정부가 되었지만한반도의 통일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남한은 서독만큼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북한은 동독만큼 튼튼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60년을 이어온 인식과 행동의 단절이 무엇보다 크다.

    그래서 통일은 북한에게 정치적 독립을 허용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하는 형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독일의 경우, 1900년 10월3일 통일 후 1990년 12월 2일 전독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 구성을 했다. 하지만, 통일 전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동독 경제의 회복과 동서독 주민간의 경제적 격차 해소, 사회주의 체제에서 빚어졌던 재산권 문제 등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런 의미에서의 독일식 통일 방식은 아닐 거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통일은 이미 진행 중이며 조만간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인 북한은 자본에게 새로운 약속의 땅이 될 것이며 북한 지배층에게 이 선택 말고는 생존의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극우파의 공격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지배계급에게도 중장기간의 정치적 공존과 북한의 자본주의적 변형은 나쁜 선택이 아니다.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의견의 일치가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인한 소란은 의견의 일치가 아닌 군사적 대결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확인되지도 않은 북한의 핵무기보유를 확인해주고 있는 미국 언론과 씽크탱크의 발언으로 미루어 보아 핵무기보유 인정이 북한을 협상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마치 1990년 구소련이 동독에 발을 빼면서 급작스럽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독일이 태어난 것처럼,

    다시 통일문제와 관련해 진보좌파가 직면한 딜레마로 돌아가 보자. 분명 가시권 안에 들어온 통일은 (자본이 주도권을 갖고 진행한다는 의미에서) 진보좌파가 원하는 통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도 할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좌파의 선택은 스스로를 통일세력으로 드러내지만 그 근거를 분단에 기생하고 있는 남북한 지배층에 대한 비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는 통일의 과정, 그리고 통일 이후 자본의 놀이판에 된 한반도에서 그 이후를 준비하는 탈자본주의적 기획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탈자본주의적 기획의 정치적 주체는 지금 기아로 죽어가고 있지만 북한 정권과 자주파에 의해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와 세습에 의해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남한의 민중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이 세습에 반대하고 동북아 평화를 옹호하는 진보좌파의 목소리와 결합했을 때 진보좌파는 중국, 일본, 북한에서 유사한 흐름을 찾아내고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 근거한 녹색사회주의-풀뿌리운동과 좌파정당

    지금까지의 과제는 거시적인 수준의 것이었다. 한국의 진보좌파가 스스로를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제시된 거시적인 과제를 미시적인 사회적 실천과 관련시킬 수 있는 공간을 가져야 한다.

    진보좌파의 재건은 시민운동-대중운동-지역운동을 통해 이루어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좌파는 이러한 운동을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를 아우르는 이념으로 녹색사회주의를 제시한다.

    녹색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녹색’가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는 흐름을 의미한다. 녹색사회주의는 현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전지구적 생태위기의 위험을 환기하면서,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장자본주의를 근본에서부터 비판한다. 비록 위기가 전지구적으로 경험되고 있지만 위기의 심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에 의해 촉진되고 있으며, 위기의 징후들은 빈곤국가의 빈곤계급에게 더욱 파국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녹색운동이 제기하는 생산, 소비,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과제는 자본주의체제의 변혁 없이는 불가능함을 주장한다. 개인의 결단이나 정신수양에 의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체제와 구조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녹색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시장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녹색사회주의 전략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지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급진정치다. 녹색사회주의는 지역정치를 통해 실험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켄

    1980년대 런던 사회주의 실험을 주도했던 켄 리빙스턴

    그리고 이러한 실험의 시작은 지역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충족되지 않은 ‘필요와 욕구’들이다. 앞에서 언급된 중소자영업자의 필요와 욕구는 거대자본들의 이해에 가려 충족되지 않는다. 또한 재개발 현장에서 지역거주민의 필요와 욕구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으며 따라서 충족되지 않는다. 개발의 결과는 곧 원주민 공동체의 파괴이며 종종 자연생태계의 파괴를 동반한다. 이것은 중대한 사회적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어떤 통로를 통해서도 대변되지 않는 것이다.

    진보좌파에게 민주주의는 이렇듯 공식적인 정치절차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리게’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실에 존재하는 관료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녹색이 좌파적 가치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녹색사회주의 전략은 그동안 좌파들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왔던 ‘소비의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적극 수용한다. 소비주의를 통한 욕망의 충족은 사회적 유대와 도덕적 통합을 붕괴시키고 생태적 조건을 파괴한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우리 모두는 시장에 의해 인식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승용차를 이용한 빠른 이동이 소비문화의 쾌락이라면 아이들의 안전, 소음과 대기오염으로부터의 자유, 걷기와 자전거 타기에 의한 건강한 생활 등은 그것을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억압된 욕구다.

    승용차 이용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안전의 위협, 각종 오염, 운동 부족에 따른 비만 등 각종 질병의 발생을 초래한다. 여기서 걷기와 자전거 타기에 의한 안전한 공간의 확보와 쾌적한 생활조건, 그리고 건강한 신체의 연관은 인식되지 않는다. 저항의 계기는 억압되어 있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다른 방식의 즐거움에 대한 열망에 있는 것이다.

    물론 소비주의적 쾌락 속에 잊혀진 대안적 삶에 대한 자각으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목표로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일상으로부터 이러한 대안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이다.

    이러한 자각을 ‘실천적 지식’이라 불러 보자. 실천적 지식은 비록 그것이 시장의 힘에 의해, 그리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문화에 의해 억압됨에도 불구하고 맹아적 형태의 대안적 행위양식을 보여준다. 행위자들은 자본주의적 소비를 통해 충족할 수 없는 필요들에 대한 정식화되지 않는 어렴풋한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진보좌파는 이러한 어렴풋한 지식(암묵적 지식이라 해 봅시다)을 정치적 힘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대안적 삶에 대한 열망은 상품-소비사회의 구조적 조건의 무게에 짓눌려 체계적인 저항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대안적 삶의 추구마저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소비해야 하는, 그리고 돈을 주고 상품으로 구매해야 하는 조건은 화폐소득-소비의 악순환으로 사람들을 되돌려 넣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불만과 저항 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무리 지배적 논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완벽하게 자본주의화 또는 상품화할 수는 없다.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자본의 논리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에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원리는 상호이해와 존중 그리고 협동이기 때문이지요.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 자본의 힘에 의해 잠식되어 가고 있는 기존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대안적 공동체들도 존재한다. 생활공동체, 생활협동조합 같은 대안적 운동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데 앞장설 수 있다면 노동조합 또한 이러한 대안적(비시장적) 사회관계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의 과제는 대안적 생활, 실천의 공간을 지키고, 만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대안적 인간관계, 타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적 윤리와 더불어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진보좌파는 말로만 ‘노동’을 강조하고 관념적인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적 투쟁에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노동’을 강화하는 과정임을 주장하고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노동계급의 혁명성’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노동자운동의 힘이 사회주의 정치의 관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사회운동노조’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역에 근거하는 녹색사회주의의 풀뿌리 정치는 소수의 정치인과 활동가 그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이것들의 결집된 형태로서의 진보정당이라는 지역거점에 기초해야 한다.

    성공한 지역정치의 사례는 현장단위 노조운동, 평화운동, 여성해방운동, 환경운동 등이 좌파 정당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지방자치정부가 구성되었을 경우였다. 이 과정에서 관료사회의 벽, 중앙정부의 압박, 거대한 시장의 힘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에 맞서 진보좌파적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제도정치에서의 민주적 절차를 넘어선 민주주의의 급진화이다. 포루트 알레그레와 1980년대 초 런던에 존재했던 사회주의적 런던시의회가 긍정적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보통의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스스로의 요구를 정식화할 수 있을 때에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맞설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참여적 민주주의 실현은 장기적인 계획, 특히 산업정책과 노동정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계획은 참여적 민주주의와 결합되어야 한다. 대중교통, 주택, 의료, 교육, 상하수도, 에너지 등의 공적 영역에서 보통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을 정책수립과 집행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수립과정에서 시민들의 필요를 시민들 스스로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는, 그래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는 서두에게 언급되었던 한국의 진보좌파 정당운동의 위기에 관한 것이다. 현실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이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좌파적 진보정당은 지금까지 주장했던 과제를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한다. 즉 실천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진보정당’은 이미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다. 실천의 과정에서 이에 동의하고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사이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불신과 오해, 반목과 질시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때에 무작정 같이 하자고 주장은 공허하다. 미리 재단하고 연대의 틀을 제한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차이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차이에 대한 논쟁은 공유지점을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진보좌파에게 주어진 과제는 급변하는 한반도의 정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생물학적 목숨을 연장하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역사적 운동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상황을 인식하고 분석하는 데에서는 냉정하고 때로는 ‘비관적’이지만 미래를 상상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데에서는 ‘낙관적’이어야 한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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