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대와 진보정당, 그리고 죽음들
    [아빠의 현대사 60]앞으로의 현대사는 너희들과 함께 만들어가야
        2013년 03월 07일 10: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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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정은임의 [영화음악], 2003년 10월22일 오프닝 멘트 중에서)

    또 10년이 지나갔다. 불나비라는 노래 중에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처음 그 노래를 배울 때 그 구절을 “다행히도 우린 아직 이십대라네.”라고 바꿔 노래했는데 어느 새 오십대가 되어 버렸다. 여의도 농성장에서 맞이한 새로운 천년이라는 2000년대다. 민주노동당을 만들면서 노동자 정치가 꽃 피우는가 했더니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뿐이다.

    위에 인용한 말은 1995년 진행하던 FM 방송에서 하차했던 정은임이라는 여자 아나운서가 8년 만에 자신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복귀하면서 한 방송이다. 영화음악을 진행하면서 따뜻한 가슴으로 노동자를 이해한 사람이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아까운 일이다.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서 더욱 안타깝다.

    이명박 대통령, “노조와 타협하지 마라”

    2010년 4월 1일 내가 일하는 공공운수연맹은 공공운수노조 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기업별노조에서 산업별 노조로 합치기 위한 방안이다. 나는 또 다시 조직팀장이 된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노골적인 노조탄압으로 인해 발전, 철도, 국민연금, 가스, 서울도시철도공사, 공공연구노조 등이 개별적으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를 하나로 모아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9월초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천막을 치고, 이상무 위원장과 이운복 공공연구노조 위원장이 단식 투쟁을 하기도 한다. 광화문은 특히 차가 많이 지나다녀서 잠을 자기가 힘들다. 시끄럽고 매연도 장난이 아니다. 이어 10월에는 여의도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이어 간다. 그런 곳에서 투쟁을 해야 할 만큼 이명박 정부의 노조탄압이 심했다. 단적으로 철도노조의 경우만 보자.

    철도노조는 2009년 11월 24일 ‘단체협약 해지’를 일방적으로 통보받는다. 서로 신의를 가지고 약속한 것을 일방적으로 깨는 행위다.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서다. 나중에 밝혀진 것에 의하면 일부러 파업을 유도하기 위해 그랬단다.

    언론은 1999년 조폐공사에서의 파업 유도사건과 유사하다는 보도를 한다. 조폐공사의 파업유도 사건이란 당시 대검찰청 공안부장이던 진형구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1998년 11월에 발생한 조폐공사의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의 전범으로 삼아 공안당국이 유도한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당시 조폐공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파업이 발생하면 검찰이 강력하게 대처할테니 조폐창 통폐합을 밀어붙이라.”고 권하고 이에 조폐사장이 직장폐쇄 등 초강경책으로 노조원들의 파업을 유도한 사건이다. 정부가 일부러 투쟁을 하도록 만든 파렴치한 사건이다.

    이와 유사한 행위가 10년 뒤에 철도노조에서 반복된 것이다. 철도노조는 일방적인 단체협약 파기에 반발하여 11월 26일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합법적인 파업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끼어들면서 갑자기 정부의 강경대응이 시작된다.

    철도노조파업

    철도노조 파업 집회 모습(사진=철도노조)

    이명박 대통령은 “적당히 타협하고 가서는 안 된다. 공기업 노조가 파업을 하는 것을 국민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라고 한다. 이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정부는 강경 모드로 전환한다.

    노조는 9일만인 12월 4일 조건 없이 업무에 복귀한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노조 간부 169명을 해고 처분하고, 단순 파업참가 만으로 모두 11,588명을 징계한다. 직위해제자만 980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파업돌입 5일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중이던 사람도 있고, 심장병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조합원도 있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셈이다. 또 직위해제처분 통지서를 집으로 보내 가족들이 놀라게 하고,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상당히 악의적이다. 수억원의 손해배상도 청구한다.

    현장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대전으로

    이런 투쟁을 모아서 공동대응도 하고, 김도환 연맹 위원장과 전국을 순회하기고 한다. 하나의 노조로 만들자는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다. 공공운수노조 준비위원회가 2011년 4월 30일까지 산별노조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후 나는 산별전환을 위한 ‘100일 행동’을 제안하고, 지방근무를 자청한다. 강원, 대전충남, 충북지역의 노조를 총괄하는 중부권추진팀장이 되어 대전으로 내려간다. 은지 네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빤 일요일에도 나갈 때도 있다. 아빤 내가 전에 일요일 토요일 인형극 봐야 된다고 했는데…. 아빤 한번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그렇지만 아빤 좋다.” 네가 일곱 살 때 쓴 일기다.

    항상 바쁘게 돌아다니고, 집에는 거의 늦게 오거나 안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은지 너는 물론 네 동생 은수와도 같이 놀아주지도 못한다. 언젠가 “아빠가 일찍 집에 들어와서 좋았다.”는 네 일기를 보고 그러려고 결심도 했다. 그러나 못했다. 그만큼 가정에 소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짐을 싸서 집을 나온 셈이다.

    그 후 1년은 대전에서, 그리고 1년은 청주에서 자취방을 얻어 생활한다. 나이 오십이 넘어 다시 자취를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 나를 봐 준 네 엄마도 대단하다. 너희들과 네 엄마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덕분에 어렸을 때는 곧잘 나를 따르던 은수와도 거리가 생겼다. 가장 민감하게 성장할 시기에 같이 하지 못했으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아쉽지만 말이다.

    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라는 게 있다. 2011년은 희망버스의 해라고 해도 좋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너와 같이 부산에 가보고 싶었다.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너희 학교 학생들도 많이 만난다. 내가 대전과 청주에 있는 바람에 같이 가자는 말도 못했다. 촛불 때처럼 또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김진숙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있다. 그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후 트위터 등을 통해 지상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바람에 나도 트위터 등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크레인 위에서 조위금을 보낸다고 해서 놀란 기억도 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다. 그 한진중공업의 기막힌 얘기를 하자.

    2003년 10월 17일, 한진중공업 김주익은 85호 크레인 농성에 올라가 투쟁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 노조대표인 지회장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6월 11일, 혼자 35미터 상공으로 올라간 지 129일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10월 30일 곽재규라는 또 한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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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익 곽재규 열사 1주기 추모제(사진=부울경 열사회)

    김주익 열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한진중공업이 꿈쩍도 하지 않자 부서 동료 3명과 함께 85호 크레인을 찾아 마지막 조문을 한 후 “우리가 죄인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도크에 몸을 던진다. 앞서 얘기했던 1991년 5월 6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박창수 열사에 이어 한진중공업에서만 세 번째 죽음이다. 김진숙의 말대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1년 1월 6일, 이번에는 새벽 살을 에는 추위 속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같은 크레인을 오른다. “85호 크레인 위로 오르던 저는 직각으로 이어지는 계단 하나를 탁 잡았습니다.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쓱 베며 지나갔습니다. 세상을 향해 처절히 절규했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 단절의 공간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노동자의 대표였던 김주익 지회장이 그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았던 그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저는 지금 주익씨가 앉았던 자리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간 세상의 풍경을 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김주익 열사가 죽은 이후 죄책감에 방에 보일러를 켜지도 않고 지냈다고 한다. “김주익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겠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김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라는 편지를 남긴다. 2010년 12월 15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한진중공업이 생산직 근로자 400명을 희망퇴직 시키기로 결정한 것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소금꽃 나무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김진숙이 쓴 [소금꽃 나무]라는 책의 한 구절이다. 땀에 절어 소금꽃이 피어있는 작업복 얘기다.

    그렇게 열심히 일만하는 노동자들을 한진중공업은 걸핏하면 구조조정을 핑계로 정리해고 한다. 2000년에 600여명, 2010년에 다시 400여명이다. 노조간부에 대해 손해배상가압류로 반복한다. 그러나 어디 그게 한진중공업만일까?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한참 뒤인 6월에야 ‘희망버스’라는 게 시작된다. “벌써 세 차례 계절이 지나도록 우리는 가끔씩 풍편에 흘려듣고 지나쳐버리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정보와 기사의 홍수 속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기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트위터를 통해서 세상을 향하여 구조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것이 태풍의 눈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김진숙

    크레인 위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사진=민주노총)

    ‘희망버스’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하고 당신의 주장에 동감한다는 작은 행동이었다.”라고 소설가 황석영은 말한다.

    희망버스는 민주노조운동이 힘에 겨워하고, 진보정당도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희망’이 되었다. 이래저래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물어 온다. “혹시 내일 부산와요?” 많은 사람들을 거기서 본다. 한 때 노조위원장이었다가 현직으로 돌아간 사람들, 지방에 있어서 자주 못 보던 사람들을 김진숙 지도위원 때문에 만난다. 비도 맞고, 먼 길을 걷고, 경찰을 피해 낯모르는 골목길을 헤매고, 밤을 새워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즐거웠다.

    끽해야 김진숙 지도위원의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핸드폰을 통해 음성을 듣는 것이 다였지만 그래도 거기엔 사람이 있었다. “올라갑니다. 그래도 목소리 두 번 듣고. 손 흔드는 것도 보고해서 지난번 보다는 다행! 다음에는 또 조금 나아지겠지요?” 당시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보낸 트위터다.

    “부산가는 길은 무슨 순례 가는 그런 느낌. 옛 친구들도 거기서 보잔 사람이 많다.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만날 수 있으려나?”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어서야! 그래도 이 새벽에 선언동지들이 율동도 하고, 이 새벽 온 나라의 양심은 잠을 못자야 한다는 목사님! 이별이 너무 길어서 더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직녀에게’라는 노래를 불러서 더 그랬다.

    그 노래는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로 시작된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과 들뜸이 있던 때였다. 때로는 최루액을 담은 물대포를 맞기도 하고, 꼬박 밤을 새운 채 아스팔트위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50여명이 연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때 거기엔 희망이 있었다. 거의 1년이라 할 309일을 혼자서 그 높은 곳에서 투쟁하다 2011년 11월 10일 노사 합의에 의해 내려온다. 약속대로 죽지 않고 살아서 내려온 것이다. 그가 내려오던 날 가슴에 있는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박근혜 시대의 개막과 다시 한진중공업

    그런데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이틀 뒤인 2012년 12월 21일 다시 또 한명의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자결한다. 최강서라는 젊은 노동자다. 네 번째 죽음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1년 가까운 투쟁 후에 한진중공업은 158억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그는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158억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대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라는 유서를 남긴다.

    최강서 유서

    최강서 열사의 유서(사진=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난 2013년 1월 5일 집회를 하러 간 부산 한진중공업 본사 건물에는 버젓이 “Build Your Dream!”이라고 붙어있다. 그들이 정말 꿈이 무엇인지나 아는 사람들일까?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을 철저히 짓밟고, 파괴한 그들이 말이다,

    투쟁 66일만인 2월 24일에야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직후 모두 5명의 노동자가 절망 끝에 목숨을 끊는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이 절망의 벽을 어떻게 해야 허물 수 있을까?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이제 성인이 되어 첫 투표를 하는 너와 같이 간다. 모두 6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당선된다. 노동자 후보는 두 명이 출마한다. 모두 여성이다. 기륭전자 출신으로 1,895일을 투쟁하고, 94일을 단식까지 했던 김소연 후보는 0.05%인 16,687표를 받는다. 청소노동자인 김순자 후보는 0.15%인 46,017표를 받는다.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는 도중에 사퇴한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두 후보를 합쳐도 10만표도 안된다. 아무튼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 첫 여성대통령이 나온다.

    그 시대는 어떨까? 노동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올까? 그러나 취임식도 하기 전 최강서 열사처럼 절망에 빠진 5명의 노동자들이 죽는다. 기대보다는 좌절이 더 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전국 5군데에 하늘사람들이 있다.

    울산에는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 인정을 위해 천의봉, 최병승 두명이 철탑에 있다.

    평택 쌍용자동차에는 한상균, 복거성, 문기주 3명이 마찬가지로 철탑위에서 국정조사 등 해결을 촉구중이다. 쌍용자동차는 정리해고 이후에 모두 24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전주에는 천일교통 김재주 분회장이 민주노조 인정, 해고철회 등을 요구하며 철탑위에 혼자 있다.

    충남 아산 유성기업 앞에는 33미터 굴다리 난간에 천막을 치고, 목에 밧줄을 걸고 농성중인 홍종인 지회장이 있다.

    서울 혜화동 성당위에는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여민희, 오수영이라는 두 여성 노동자가 종탑 고공농성 중이다. 정말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일까?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까운 848만명이다. 산업재해 피해자는 작년만 92,248명이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매긴 손해배상가압류 금액은 무려 1,383억원이다. 노동조합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가 1,622명이다.

    1990년 1,465명의 교사들이 해직되면서까지 지켜 온 전국교직원노조가 있다. 1997년 합법화된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법외노조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137명의 해고자가 있는 공무원노조는 여전히 노조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너무나도 슬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이 시대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김진숙과 학비

    김진숙 지도위원과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의 만남(사진=이근원)

    세상을 바꾸는 꿈은 가졌으나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10년이다. 민주노총은 바닥까지 추락해 있고, ‘진보’는 알맹이 없는 상표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현재 스스로 진보정당이라고 말하는 정당은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등이다. 현재 ‘통합진보당’은 당원 10만 4553명, 당권자 2만 9992명에 국회의원이 6명 기초단체장 2명, 광역 기초의원 118명이 있다고 한다. ‘진보정의당’은 당원 2만여명, 당권자 6천여명에 국회의원 6명, 기초단체장 2명 광역 기초의원 41명이다. ‘진보신당’은 당원 1만 5천여명, 당권자 6,889명이고 현재 국회의원과 기초단체장은 없이 광역 기초의원 13명이 있다. 물론 이들이 이름만 ‘진보’를 달고 있을 뿐이라고 보고 노동자 계급정당을 추진하거나 나처럼 아래로부터 새롭게 정치적 힘을 모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너에게 들려줄 얘기는 여기까지다. 좀 더 좋은 사회를 너희들에게 넘겨주고자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혁명가란 무엇보다도 낙천적이어야 하며,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라는 베트남 혁명가 호치민의 말대로 꿈이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의 현대사는 너희들과 함께 쓰게 될 것이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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