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가 차베스를 생각하며
        2013년 03월 06일 04: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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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차베스를 한국에 소개해왔던 임승수씨가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고글을 보내왔다. 임승수씨는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국가의 거짓말>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몇 권의 책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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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사회주의 혁명가, 혹은 21세기 독재자로 세간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길고 긴 암 투병 끝에 서거했다.

    필자가 2007년에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한국과 13시간이나 차이나는 시차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바뀐 시차 때문에 고질병인 지루성 피부염이 심해져 본의 아니게 베네수엘라 무상의료의 혜택이 외국인에게도 제공된다는 것을 직접 내 몸으로 경험했다.

    어쨌든 낮과 밤이 정반대로 바뀐 시차만큼이나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국제문제를 다루는 국내언론의 방식을 보면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의 문제를 다룰 때 국내 언론은 보수와 개혁 및 진보를 막론하고 미국이나 서방의 언론을 인용해서 보도를 한다. 그러다보니 소위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조중동을 중심으로하는 보수언론과 한겨레, 경향 등의 개혁적 언론에서 논조의 차이가 나지만, 국제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중남미 국가들이 이런 왜곡된 미디어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힘을 합쳐 텔레수르Telesur라는 방송국을 만들어 전 세계로 전파를 쏘지만, 국내 주류 언론에서 텔레수르의 소식을 인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차

    차베스 대통령의 모습

    세계를 뒤흔든 혁명가의 죽음 앞에서 필자가 자판이나 두들기며 그 무슨 논평이니 전망이니 하는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2004년에 체 게바라의 딸이자 쿠바의 소아과 의사인 알레이다 게바라가 차베스를 만났을 때, 차베스가 했던 얘기 몇 가지를 이 기회에 전하고 싶다.

    혁명가 차베스가 역시 혁명가인 체 게바라의 딸에게 토로하는 진심을 들을 기회는 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차베스라는 지도자는 떠났지만 베네수엘라의 민중들은 더욱 단결해서 현재의 혁명 과정을 더욱 심화시켜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차베스가 알레이다 게바라에게 혁명의 기원에 대해 얘기하며

    나는 고등학교 때 야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가 되거나 마가야네스 팀에서 뛰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군인이 되려고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되는 것이 수도인 카라카스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고, 아버지는 학비를 댈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1년만 있다가 야구를 하러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하고 독서를 하면서 선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라스 및 다른 역사책들을 읽은 후, 진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스페인 제국주의) 우리를 학살했습니다.

    볼리바르기념관

    남미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기념관(사진=손호철)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자신의 삶과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사관생도 시절에 병원 앞에 있는 콜롬버스의 동상을 지나면서 행진을 했습니다. 나는 동료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저 침략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 거지?”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민중들이 권력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는 30년이 걸렸습니다. 콜롬버스 동상이요? 우리는 콜롬버스 동상을 끌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주민 저항군 지도자인 과이카이푸로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과이카이푸로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후 그를 죽이기 직전에 과이카이푸로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스페인 놈들아! 와서 이 땅의 자유인, 인디언 과이카이푸로가 어떻게 죽어가는지 봐라.” 우리는 선주민 추장인 마나우, 아이마르, 타마카레스, 카리브 해의 인디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차베스의 석유산업 국유화 조치에 반대하는 자본파업 때를 회상하며

    작년(2003년)에 한창 우리가 ‘석유 테러’라 불렀던 석유파업이 있을 때, 베네수엘라의 기득권층과 그들의 국제 동맹세력(미 제국주의)이 석유 정제소들을 파괴하고, 수백만 리터의 우유를 버리고, 가축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사회 붕괴, 혼란 등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을 했음에도, 석유도 없고 천연가스도 없고 음식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피델(카스트로)이 우리에게 콩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주면서 전화로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갚아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다른 물품들은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콜롬비아로부터 우유, 고기, 석유들을 구입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몇 리터의 연료를 사기위해 사흘 나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힘든 어느 날 오후에 나는 몇몇 동지들에게 저 산골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산골마을로 갔습니다. 거리는 분주했죠. 사람들은 쌀, 바나나 등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차베스와 석유노동자

    석유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차베스(사진=레프트21)

    우리가 근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는데요. 그러던 중 강한 인상의 흑인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면서 “차베스, 이리 와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할머니와 다툰 것은 아닙니다. “차베스, 이리 와 봐요. 나를 따라와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와보면 좋겠어요.” 우리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장작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쌀, 감자, 파초 등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나의 눈을 지그시 보더니 양복저고리를 잡고 말했습니다.

    “차베스, 내 집에는 의자가 남아있지 않아요.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장작이 침대 다리에요. 우리는 가구, 지붕을 뜯어서 불을 피울 겁니다. 우리는 문도 떼어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할 거에요. 하지만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차베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인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 베네수엘라의 무상의료 무상교육에 대해 얘기하며

    이전에 베네수엘라에서 능숙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사람들은 많아야 연간 15000명 정도 증가했습니다. 2003년에 단 6개월만에 우리는 100만 명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 한 해만에 15000명에서 10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중략)…

    예를 들면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도 없는 102세의 노인이 7주 동안에 글을 배우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85세의 할머니도 보았고요. 아버지가 없는 8살, 10살 그리고 12살 먹은 형제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통령 아저씨,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지금은 글을 배우고 있어요.” 그 아이들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고 정규교육 체계의 보호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이 교육 분야의 초기 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에는 한계가 없으니 우리는 더 나아가 미션 수크레(대학 무상교육)를 출범시켰습니다. 우리는 문맹퇴치 프로그램에 등록되어 있는 150만 문맹자들에 대한 교육사업이 성공한 것에 대해 평가했습니다. 그런 후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미션 수크레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일요일에 미션 수크레를 출범했는데, 열풍이 일어난 것처럼 60만 명이 넘는 어쩌면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중략)

    차베스와 교육

    차베스 지지를 밝히는 어린이들과 주민들

    카터 전 미 대통령이 최근 방문해서 카라카스 시의 지역 지도인사를 만났을 때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카터는 나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TV 기자회견에서 재차 발언해서 과두지배 세력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지역 지도자들과의 만남은 내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만남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말했어요. 그 지역 모임에서 만난 한 사람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20만 명의 주민들이 예전에는 의사를 구경도 못했다는 말을 카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쿠바 의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무상의료)에 대해 말했지요.(쿠바는 의사를 파견해 베네수엘라의 무상의료 시스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거의 40년 동안 그 지역의 20만 명이 넘는 주민들에게 의사는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응급치료를 기다리다 죽기도 했고, 임산부는 마룻바닥에서 출산을 하고 아이들은 천식과 설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사가 있습니다. 이제 한 시간 내에 의사에게 신속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의사들이 약품도 비치하고 있어서 더 이상 약을 사지 않아도 됩니다. 카터는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카터에게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춤추고 술 한 잔 할 시간이 일요일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죠. 왜냐고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일 5시 이후에는 학습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민들이 공부하고 글을 배우고 학교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피델(카스트로)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혹자는 나에게 “당신, 제정신입니까? 한 해 동안 이 모든 미션들을 시작한다니요?” 지금 물론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로 모든 미션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되풀이 말하지만 쿠바의 놀라운 지원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내가 쿠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화가 나서 길길이 뛰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세계포럼에서 연설을 하든지 간에 쿠바에 대한 감사를 공식적으로 상기시키고 부각시킬 것이며 이를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 보수세력의 쿠데타 시도로 죽임을 당할 뻔 했던 때를 회상하며

    나는 지금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알레이다,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쿠데타가 있었던 2002년 4월 12일 자정에 그들은 사형집행을 하기 위해 나를 해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일출에 기해서 사형을 집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손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 그리스도와 체 게바라를 떠올렸습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용병들이 주위를 에워쌌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등 뒤로 다가오자 뒤에서 날 쏠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뒤를 돌아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순간 마음 속에서 체 게바라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체는 그가 죽은 라 이게라마을의 작은학교에 있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체 동지처럼 죽게 될 것이다. 당당히 맞서자.”

    운이 좋게도 당시의 군사적인 상황 덕분에 그때 죽지 않을 수 있었죠. 그 순간에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날고 있었고 파도는 거칠게 몰아치고 밤하늘의 별들은 반짝이는 가운데 군인들은 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러나 갑자기 나를 감시하던 젊은 군인 하나가 손에 총을 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죽이는 순간 우리도 모두 죽게 될 거야. 저 사람은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야.” 갑작스럽게 혼란이 닥쳤고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해라. 모두 침착해라. 너희는 모두 내 편이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시작했고, 가까스로 협력을 얻어서 결국은 진정시켰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라. 나는 포로이니 포로로 대우해라. 그렇지만 내가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란 사실은 잊지 말아라.”

    그 후 그들은 나를 격리시켰고 거의 쉴 시간이 없던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되 침묵을 유지해라.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중략)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는 지도자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역사가 그들에게 부과한 조건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지요.

    지도자는 쿠바에서 피델이 그러하듯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쿠바에 피델이 없다면 쿠바라는 나라는 존속하겠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피델은 체 게바라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그러했듯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피델과 민중. 이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는 역사가 부여한 명령안에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부분적으로는 역사 그 자체와 역사적 조건에 매여 있는 포로라고 할 수 있지요.

    # 피델 카스트로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이러한 관계는 꽤 오래 전인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차베스는 1992년 좌익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 나는 『역사가 나를 사하리라History Will Absolve Me 』 『Face to Face with Fidel Castro』 프레이 베토의 『Fidel and Religion』, 지아니 미냐의 『An Encounter with Fidel』을 읽었습니다.

    피델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고 항상 이곳을 나오기만 하면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긴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를 만나보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쿠바에서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1994년 12월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곳에 갔습니다. 비행기 착륙 후에 보니 피델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그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정기항공 편을 이용했음에도 비행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피델과차베스3

    차베스와 카스트로의 대화

    피델과 차베스

    차베스,카스트로와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디아리오 그란마> 쿠바

    당시 우리는 포옹을 나눴는데 이미 말했듯이 베네수엘라의 과두세력은 신문 1면에 그 사진을 실었습니다. 신문 1면에 등장해 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신문 전면에 실리다니요? 악의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컬러 사진이 실렸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기사들도 실렸더군요. ‘피델이 차베스를 먹어 치우다’ ‘차베스, 피델에게 복종하다’ ‘악의 축’ 따위의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주문과도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지만 우리 민중들에게 공산주의, 피델 카스트로와 독재에 대한 공포를 주입하기 위해 악마적이고 사악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모두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중략)

    나는 그 무렵 어둑해진 카라카스 시내를 가게 되었습니다. 피델과 내가 나눈 포옹에 대해 사람들에게 쏟아진 악선전을 생각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시내 중심부에서 한 취객이 손에 술병을 들고 지그재그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히 취해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우리는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피하려고 길 반대쪽으로 가려했지만 그 사람이 술병을 든 채 갈지자로 걷는지라 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요. “당신 차베스처럼 생겼는데.”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차베스네. 괜찮은가?”하고 손을 뻗쳤는데 몇 마디 중얼거리면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요. 결코 그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차베스, 피델 만세!”

    그건 과두세력의 어리석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피델 만세! 피델과 나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내 개인적, 정치적 명성에 흠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자들은 1959년(쿠바혁명이 승리한 직후)에 피델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가장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최근 몇 십년간 내내 우리 민중들은 피델을 존경해왔습니다. 민중들은 그를 지지하고 그를 사랑합니다. (중략)

    선거기간 동안 그들은 다시 1994년도의 비디오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군에 피델과 내가 아바나에서 한 연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디오를 유포하기 위해 병영마다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일부 군사심리학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제기랄, 당장 이 짓을 그만두시오. 역효과만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비디오가 피델과 차베스에 대한 젊은 군인들의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장 그만두시오.”

    내가 대통령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치졸한 짓을 계속했습니다. 1999년 1월 말 취임하기 며칠 전에 여행을 가서 아바나에 잠시 체류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 브라질리아, 멕시코시티를 거친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드리드에 있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파리로 이동 후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로마를 떠나 베네수엘라로 잠시 간 뒤 아바나로 가고 마지막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장 가깝기 때문이죠. 취임 전에 방문해 보고 싶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보좌관이 오더니 워싱턴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마드리드에서 경제인들과 오찬을 함께하고 있던 중이라 나는 물었습니다. “워싱턴에서 전화가?” “네, 피터 로메로입니다.” 로메로는 이베로-아메리카 사무국의 차관이었습니다.

    그는 12월만 해도 클린턴 대통령이 보낸 워싱턴 방문 초청장을 가지고 베네수엘라에 왔었기 때문에 나는 즉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내가 비자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내게 비자를 내준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거절당하곤 했죠.

    내가 수화기를 들자 얘기하더군요. “대통령 각하, 우리가 듣기로 아바나를 방문하신다고요.” “그렇소, 며칠 후에 아바나에 갈 거요.” 그러자 그 즉시 말하더군요. “음… 우리는 아바나에 방문하지 말라는 권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그렇습니다. 만일 아바나에 방문한다면 클린턴 대통령과 접견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얘기했습니다. “잘 들으시오, 로메로. 당신은 전혀 잘못 짚은 거요. 당신은 독립국가의 대통령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소. 이 문제를 다시는 꺼내지 마시오.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면 보좌관에게 연락하시오.”

    다음날, 파리에서 언론인 몇에게 전날 있었던 일을 공개했습니다. 그날 밤 호텔에서 로메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통화를 나눴습니다. “대통령 각하. 제 말을 오해하신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접견을 원하고 있습니다.” “뭐, 좋소. 클린턴 대통령이 날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쨌든 난 아바나에 갈 것이고,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소. 누구도 다시는 그 문제를 꺼내선 안 됩니다. 당신 아니라 누가 말하든 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 (중략)

    미주정상회담이 있던 몬테레이에서 부시가 그의 개막연설 중 피델이 불참한 상황에서 쿠바와 피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내 연설 차례가 오자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정상회담의 주제가 균등한 성장임에도 2003년 베네수엘라에서 경제 성장은 없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경제성장은 (미국이 배후에서 사주한) 쿠데타와 석유업계의 사보타지로 인해 적어도 10퍼센트는 하락했습니다. 경제 후퇴였습니다.

    그럼에도 쿠바의 헤아릴 수도 없는 지원으로 베네수엘라는, 예를 들면 미션 로빈슨(무상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통해 사회복지, 평등, 사회정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부시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 그를 보진 못했지만 나중에 부시가 얼굴을 붉힌 채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있더란 말을 들었습니다. 난 쿠바에 대해 3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쿠바 인민과 피델이 보내준 지원에 대해서 감사를 표명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전혀 후회가 없지만 다른 몇 가지 점에서는 용서를 표명합니다.

    몬테레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카다피와 전화 통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쿠바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전 국가가 참석하는 회담에 참가하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아! 그건, 미국이 쿠바를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우고, 잘 듣게. 우리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보게. 영국이 유럽연합 회담에 짐바브웨 무가베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을 막은 적이 있네. 그때 우리는 무가베가 갈 수 없다면 우리 누구도 참석할 수 없다고 했네.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그렇게 해야 하네.”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고 교묘하게 조종하는지 한 번 보세요.

    우리는 나름대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피델의 우정에 경의를 표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합니다. 그에게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국민을 대신해서 사의를 표합니다. 우리와 협력하기로 한 피델의 결정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지도자와 자국의 민중들이 아닌 다른 나라의 민중들과의 사이에 이러한 전례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의 협력은 영원하고 굳건하며 갈수록 증대되고 있습니다.

    필자소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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