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3월 3일 일송 김동삼 옥사
    [산하의 오역]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의 삶과 죽음
        2013년 03월 05일 10: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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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상해에서는 그 전에는 당연히 없었고 그 후로도 드물었을 행사 하나가 열린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그 내부의 파벌 다툼은 잦아들 줄을 몰랐고 어떤 이들은 임정의 미적지근함을 비판하여 떠나기도 했으며, 미국이다 러시아다 해외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입장들도 저마다 다 다른 상황, 어쨌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필요했다.

    1923년 1월 3일 그 꿈이 이루어진다. 국내와 중국 상하이, 북경,만주,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인 것이다. ‘국민대표회의’의 개막. 그럼 그 의장은 누구였을까. 각지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그 회의를 이끈 이로 추대된 이는? 그는 안창호를 비롯한 쟁쟁한 인사들의 추대를 받아 의장직을 맡은 이는 김동삼이라는 사람이었다.

    일송

    일송 김동삼 선생의 모습

    그는 퇴계의 수제자로 이름 높은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고 경북 안동 사람이다. 안동이라는 곳은 참 재미있는 고장이다. 꼬장꼬장하고 꽉 막힌 양반들의 근거지이면서 수백 명의 진취적인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수제자라 할 학봉 김성일의 후예인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앞(川前)마을 출신만 해도 독립유공자가 수십 명이 넘는다. 의성 김씨 종손이었던 김용환은 이른바 파락호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종손 재산을 노름판에 다 털어붇고 심지어 외동딸의 장롱까지도 노름판에 갖다잡히는 망나니로 소문났던 김용환은 사실상 노름판을 빙자해 독립 운동 자금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집안에 독립운동가도 많고 자신도 그 화를 입은 적이 있는 터라 철저한 위장으로 평생을 지샌 결과였다. 김동삼 역시 그 의성 김씨의 일원이었다.

    일찍이 신문화에 눈을 뜬 그는 이 보수의 고장 안동에서 개혁지향적인 동료들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우고 개화에 앞장선다. 그는 협동학교의 발기인이었다.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 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한가, 우리 안동 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협동학교 발기인)

    그러나 인습의 힘은 무서웠다. 위정척사 외치는 안동의 의병들은 ‘일본놈처럼’ 머리 깎은 신식학교를 공격, 교사 세 명이 죽는 참극을 빚었던 것이다.

    학교 교장을 맡은 유인식은 집안으로부터 절연을 당했고 안동 보수 유림의 반발은 학교를 폐교의 위기로까지 몰아갔지만 이 위기로부터 학교를 구한 것 또한 김동삼을 비롯한 청년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최고의 ‘꼴통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1911년 협동학교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김동삼은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고국을 떠난다. 석주 이상룡 등 안동의 진취적 유림들과 뜻을 함께 하고 아버지 김대락 이하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가장 고루한 고장의 진취적인 행렬. 안동에서 온 가족이 행랑 챙겨 만주로 떠나버린 것은 100가구를 넘었고 그 총원은 1천명을 헤아렸다. 김동삼의 고향 내앞마을, 한때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룬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만 150여명이었다.

    만주에서 김동삼은 안동에서 그가 하던 대로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길러 냈다. 그는 ‘남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무장투쟁론자였으며 좌우와 지방을 망라하는 단일한 민족 대오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김긍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 동삼성 즉 만주의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겠다는 뜻으로 김동삼이라는 이름을 지어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첫머리에 언급한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표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한 이래 그는 만주로 돌아와 무장투쟁에 골몰했다.

    두 번이나 상해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됐지만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사돈 이원일의 회고록에는 “담요 한 장을 메고 싸구려 좁쌀 떡으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도 싸이혜라는 여름신발을 신고 백여 리씩 걸으며”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일경에 체포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0년 형을 언도받은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는데 거기서도 의기를 잃지 않아 함께 수감돼 있던 사회주의자 김철수에 따르면 그의 위세는 당당했으며 수감자들의 지도자격이 되어 형무소장을 무릎꿇려 사과하게 만들었던 강골이었다고 한다.

    그가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8년만에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를 챙긴 것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한때의 동료 최린과 마주했을 때 “최린은 이미 죽었다!”고 일갈하고 최남선이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 주고 가자 그 돈을 들고 십리를 달려가 최남선에게 던져 주고 돌아올 만큼 서릿발같은 성격의 만해였지만 김동삼의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긴 뒤 하염없이 울었다.

    평생에 그렇게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만큼, 김동삼의 유언은 짤막하고 비장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무엇하느냐.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독립되는 것을 지켜보리라.” 그리고 한용운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 사람이 아니고 어찌 대사를 이룰 수 있으랴.

    1937년 3월 3일 김동삼이 죽었다. 그 후손들의 고생은 여전하고 오히려 더욱 비참했다. “ 일송의 아내는 만주로 간 후 남편을 만난 것이 두 번뿐이었다. 가족을 돌보던 동생은 1920년 독립군의 무력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맏손자 장생은 해방 후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만주에 남은 가족들은 마적 때문에 땅을 일군 취원창을 떠나야만 했고, 공산화 이후에는 취원창에서의 땅이 넓었다고 지주 계급으로 분류되어 고난을 당했다. 일송의 맏아들 정묵은 그때 맞아서 앓다가 195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일송의 부인이 역시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맏며느리 이해동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 후에 귀국을 했다. 일송의 손녀 덕생은 남편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신의주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 늦게 본 딸 영애는 58년이 지난 1989년에야 국립묘지에 있는 일송의 가묘에 성묘를 할 수 있었지만 국적 문제로 힘들어하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김희곤 저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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