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불’을 가리지 않은 이명박 정부
    [아빠의 현대사 59] 이명박 정권과 촛불 그리고 노동자들
        2013년 03월 04일 10: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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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데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명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꽃다지 노래 ‘민들레처럼’ 전문)

    가사도 좋지만 노래도 아주 잔잔한 게 아주 좋다. 언제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박종태라는 화물노동자가 좋아했던 노래다. 그에 대한 추모를 하면서 참 많이도 부른다. 그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자.

    진보정당이 분열되는 사이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다. 이명박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이라면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개혁을 비판하면서 들어선다. 그리고 그 10년만큼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안이 어려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냥, 김밥, 밀가루 떡을 팔러 다녔고, 대학생활도 이태원 시장에서 매일 새벽이면 쓰레기 치우는 일을 통해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대학 때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개념’이 있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런 사람이 왜 그리도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을까?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아주 나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렵게 성장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과 비교해서 남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자수성가한 사용자들이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노력을 덜하고, 요구가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말한 이유다. “내가 장사를 해 봐서 아는 데 열심히, 끈질기게 하면 된다.”라고 장사가 안된다는 재래시장 주인에게 말하기도 하고, 천안함 사태가 터지자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 데 파도에도 그리 될 수 있다.”라고 한다. 그러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부자 정권의 시작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이명박 대통령은 747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7% 성장, 4만불 소득, 세계 7대 선진국”이라는 거창한 목표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약이었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 5년간 평균 성장률은 2.88%로, 역대 정권 중 최저 수준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4.3%보다도 크게 낮다. 국민소득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에 사상 처음으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는데 이명박 정부도 그 수준에 머무른다. 세계 7대 선진국이라는 목표는 노무현 정부 때의 14위에서 15위로 밀려난다. 사람들은 ‘747이 아니라 447’이라는 얘기도 한다. 400만 실업, 400조 국가부채, 700조 가계부채가 그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러질 못한다.

    2008년 2월 25일 취임식에 “함께 가요, 국민 성공시대!” 라는 표어를 내걸지만 함께 가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내각은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 부른다. 연예인들의 이름을 빗대어 부자만을 위한 정권임을 풍자한 것이다. 고소영은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권을 말하는 것이었고, 강부자는 강남의 땅 부자를 말한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줄여 준 것만 해도 기획재정부 추산으로 63조 8000억 원 정도나 된다. 국가부채는 146조원이나 증가하는 데 말이다. 아예 노골적으로 ‘비지니스 프렌들리’라 하여 친 기업 정부임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다. “정치노조, 강성노조, 불법 파업을 없애겠다.” “우리나라처럼 비효율적이고 불법적이고 극렬한 노동운동을 하는 곳은 없다.”라는 것이 대통령의 인식이었다.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투쟁을 해야 했다. 현재도 100개가 넘는 사업장이 투쟁 중에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라는 이름아래 진행된 노동법개악이다. 노사자율에 맡겨야 할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등 악법으로 인해 민주노조운동은 큰 타격을 받는다. 역사의 시계바퀴가 거꾸로 가고 있다. 쌍용자동차를 비롯 유성기업, 발레오공조, 보쉬전장, 철도, KEC, 한진중공업 둥 수많은 곳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해야만 한다.

    ‘불’을 부르는 정권

    이명박 정부는 유독 ‘불’과 관련이 깊었다. 출범 직전 숭례문이 불탄다. 임기 1년 후에는 촛불 시위가 벌어진다. 다음해인 2009년에는 용산에서 철거반대 투쟁을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하다가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한다. 진압과정에서 신나 등에 의해 크게 불이 나서 희생자가 많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 더 있다. 노동자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다. 이병렬 열사에 대해서는 뒤에서 말하자.

    촛불이 타오르다

    2008년은 촛불의 해다. 너희들도 많이 참가했으니까 기억하겠지? 그 해 4월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 정책에 따른 0교시 수업 허용’ 등 교육정책에 반발한 고등학생 100여명이 주말마다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등에서 다양한 명목으로 ‘촛불문화제’를 연다. 당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해가 진 뒤에는 집회를 전면 금지한다. 집회신고를 하려면 신문을 보고 일몰시간을 알아봐야할 정도였다. 대신 문화제는 허용한다. 이 점을 이용하여 촛불문화제를 시작한다.

    기록을 보니 “5월 2일 인터넷 카페인 ‘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의 주최 하에 오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 광장 일대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조치에 반발해 촛불 집회가 열린다. 당초 주최 측은 경찰에 이 집회를 참여 인원 300여 명 정도의 문화제로 예상하였으나, 실제 참석 인원은 이를 크게 상회하여 최소한 1만 명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다. 광범한 촛불의 시작이다.

    2008년6월

    2008년 6월 10일의 촛불집회

    “재판장!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그러면서도 해방되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재판장,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8시간 노동제를 위해 싸우다 1887년 사형을 당한 미국노동자 스파이즈의 최후진술처럼 사면팔방에서 들불이 번지듯 촛불이 일어난다. 촛불시위는 이후 100일 이상 계속되면서 쟁점이 교육 문제, 대운하·공기업 민영화 반대 및 정권퇴진 등으로 점차 확대된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는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 촛불 집회에 1만 명이 참석했다는 보고를 받고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는 등 생뚱맞은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촛불이 예상외로 번지자 5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가 국민들께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소홀했다는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은 잦아들기는커녕 더 번진다. 1987년 6월 항쟁 21주년을 기념한 6월 10일 촛불시위 이래 사상 최대인 70만 명이 참가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6월 항쟁이 재현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제야 “지난 6월 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내 자신을 자책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수없이 내 자신을 돌이켜보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책은 오래 가지 않는다.

    촛불시위 내내 경찰과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진다. 경찰은 방패로 사람들을 찍기도 하고, 물대포로 물을 발사하고, 소화기를 뿌리기도 한다. 그리고 행진을 막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하고 서로 용접한 후 바닥에 철심으로 고정시켜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한다. 이에 네티즌들은 “경축!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이라는 현수막을 컨테이너에 붙여 조롱한다. 명박산성의 탄생이다. 헌법재판소는 2009년 9월 24일 야간 집회 금지 조항에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린다. 촛불로 인해 야간집회도 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병렬 열사

    그렇게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던 2008년 5월 25일 오후 6시, 전주 코아백화점 앞에서 이병렬 열사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이명박 정권타도”를 주장하는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뿌리고 분신한다. 당시 마흔 한 살이었다. 우리 연맹 산하 전북평등노조의 조합원이었고, ‘이명박탄핵투쟁연대’라는 까페의 회원이기도 했다.

    “5월 3일 광우병 파동 다시 시작! 촛불집회가 지역에서도 5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전선은 불붙었다. 중고생부터 대학생까지 광범위하게 일게 방관만 할 것인가? 우리가 나서야 한다. 2선, 3선에서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2008년 5월 25일 오후 6시. 전주 코아백화점 앞에서 분신한 이병렬 열사 유서 중에서)

    이병렬3

    촛불집회에 참여중인 이병렬씨(왼쪽 두번째 양복 입은 이)

    환자는 긴급하게 전주에서 서울 영등포 성심병원으로 이송한다. 그 병원이 화상치료를 제일 잘하는 병원이다.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도, 한독택시의 허세욱 열사도 거기서 치료를 받았다. 우리는 이송과 동시에 병원 앞에는 천막을 치고, 쾌유를 비는 촛불집회를 이어간다.

    당시 연맹에 열사 투쟁을 해 본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하고 곽노충 국장이 담당하게 된다. 처음엔 수술 후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결국 6월 9일 한 많은 세상과 이별을 한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노제와 전주코아백화점 앞 추모제를 끝내고 광주영령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에 모신다.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건 힘든 일이다. 그 가족들을 보는 건 더욱 힘든 일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언제나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저희 학교 급식담당 아주머니에게 ‘이 쇠고기 미국산 아니죠?’하고 물어보고 먹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고3이 이렇게 나와서 촛불을 드는데 쇠고기와 학교자율화, 대운하와 민영화와 같은 나쁜 정책이 백지화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이 백지화 되지 않으면 고3이 공부해도 의미가 없다. 될 때까지 촛불을 들자!” 추모식에서 고3이라고 밝힌 여학생이 추모제에서 남긴 말이다. 노동자들은 이병렬 열사가 말한 대로 2선, 3선에서 너희들을 조심스럽게 보호하며 촛불을 이어간다. 처음에는 조끼를 벗고, 깃발은 가져가지 않는다.

    소고기 반입저지

    촛불 덕분에 은지 너를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당시 고등학생인 너는 친구들과 같이 시청 혹은 청계광장에 왔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집회에 참석도 하고, 무교동에 가서 맛있는 낙지도 먹는다. 아마도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 광주를 겪은 수많은 ‘518 세대’ 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할 일이다.

    우리 연맹 산하에 ‘화물연대’라는 노조가 있다. 2002년 10월 27일 출범한 화물 운전사들의 노동조합이다. 트레일러, 카고, 탱크로리 등 대형차량은 물론 택배를 하는 1톤 트럭운전사들까지 가입해 있다. 컨테이너, 시멘트, 석회석, 유류, 곡물, 일반 짐 등 주로 화물을 운송하는 운전사들로 구성된 노조다, 촛불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국민생명을 위협하는 미국산 쇠고기의 운송을 거부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캐나다에 사는 교포가 고맙다며 연맹에 떡을 보내주기도 한다. 실제 물류창고에서 소고기가 나가는 것을 막기도 한다.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30일 용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강동냉장이라는 곳을 막고 집회를 하다가 연행되기도 한다. 일반교통방해 및 업무방해 혐의였다. 촛불 시위로 7월 1일까지 모두 1,045명이 연행되었다는데 거기에 나와 그 자리에 있던 24명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너무 오랜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다시 하루를 자보게 된다. 2년이 지나서야 재판 결과 무죄가 된다.

    촛불집회 때 인연을 맺은 네티즌들과는 ‘공감’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2009년과 2010년 함께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여름비, 깍지, 보라, 애기천사, 승주나무 등 모두 ID로 만난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공감’은 부드러운 이름이었지만 실은 ‘사회공공성 파괴 감시와 저지를 위한 공동행동’의 약칭이었다. 촛불이 준 감동은 노동조합의 집회 문화를 많이 바꾸게 한다.

    박종태 열사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년 5월 3일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야산에서 자결한 채 발견된 박종태 열사 유서 중에서)

    또 노동자가 죽는다. 메이데이를 앞두고 우리는 ‘박종태’라는 사람을 찾는다. 그가 4월 30일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홈페이지에 “투쟁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바쳐야지요. 함께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종적으로 감추기 때문이다.

    당시 수배 중이던 그를 경찰이 잡는 게 차라리 낫다 싶어 실종신고도 한다. 우리는 메이데이 당일 행사장에서 그의 사진을 들고 흩어져 찾기도 한다. 별 일이 없어서 안심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무엇이 가장으로서 어린 두 남매를 두고서 목숨을 끊게 만드는 것일까?

    대한통운이라는 회사가 있다. 유통업계 1위의 큰 회사다. 2009년 1분기에만 5,410억원을 번 회사다. 대한통운은 1월에 택배 물품 1개당 수수료를 30원 인상하기로 구두로 합의했다가 3월엔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일방통보를 한다, 당연히 노조는 반발한다.

    항의의 표시로 그 동안 해 왔던 분류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동안 회사가 할 일인데 편의를 위해 해 주던 것이다. 그러자 대한통운은 이를 빌미로 근무지 이탈이라며 78명의 조합원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달랑 문자 한통으로 말이다. 3월 16일의 일이다.

    이후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박종태는 수배되고, 조합원들은 광주에서 올라와서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투쟁을 한다. 매번 그렇지만 경찰들은 ‘법’을 앞세워 항상 사용자 편을 든다. 천막을 쳤다는 등의 이유로 4명의 조합원이 연행된다. 이 모든 것을 박종태는 수배중이기 때문에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전지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통운은 노동 탄압을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목에 걸고 자결한다. 발견된 것은 2009년 5월 3일이다.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대전중앙병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박종태 열사가 자결한 그 언덕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운다, 대한통운을 바라본다. “벚꽃이 지기 전에 이 싸움을 이기고 아이들과 놀러가고 싶다던 남편입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벚꽃이 모두 지고, 아카시아 꽃이 무리지어 필 때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매년 봄마다 벚꽃, 아카시아 꽃을 볼 여유가 없을 것 같고, 그 꽃과 그 나무들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라던 부인의 절규가 지금도 가슴을 친다.

    화물연대와의 인연

    처음 나보고 교섭을 맡아 달라고 할 때 나는 거절했다. 무엇보다 화물연대라는 조직을 잘 몰랐다. 교섭을 하려면 일단 노조를 잘 알아야 하고, 그들이 나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하나도 안 맞았다. 특히 사람이 죽은 가운데 열리는 교섭은 감당하기 어렵다. 설령 100%를 따내더라도 만족할 수 없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랜드 투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 있는 점포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이 있었고,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연행되어 서대문경찰서로 이송된다. 당시 연맹 대외협력실장이던 나는 당연히 면회를 하기 위해 가고, 이미 와 있던 화물연대 사람들을 만난다. 마침 민주노총에서 같이 일하던 심동진이 화물연대에 있어서 친하게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거기서 화물연대 본부장인 김달식과 처음 만난다. 개띠에 연대출신이라고 했다.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줄 알았다. 다부진 인상이 그랬다. 집에 오는 데 “형님 잘 들어가십시오.”라는 문자가 온다. “왜 이러십니까? 장난하지 마십시오.”하고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개띠이긴 한데 생각한 것보다 12살 어린 개띠였고, 연대 출신이라는 것은 화물‘연대’출신이라는 말이었다. 깨끗하게 속은 셈이다.

    그는 처음에는 동화상운이라는 회사에서 노조에 반대하는 편에 서서 활동하다가 ‘막내’라 부르는 어린 노동자의 사고사에서 보여 준 회사의 기만적이고, 야비한 태도에 분노하여 180도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사실도 2003년 5월 포항에서 진행된 8일간의 영웅적 투쟁을 다룬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라는 책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된다. 아무튼 이런 인연으로 대한통운과 교섭을 하는 책임을 맡는다.

    대한통운이라는 거대한 자본은 교섭에 나오지 않는다. 한진중공업도, 쌍용자동차도, 재능교육도 그렇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화물연대 조합원들을 비롯한 택배 운전자들을 노동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차를 소유한 사장들이기 때문이고 화주와 1대1 관계를 맺어서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노동자인데, 법은 사장님이라는 거다. 정부는 파업 돌입을 하면 면허를 취소하고, 유류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한다.

    화물연대와 민주노총은 투쟁으로 그들을 교섭장소로 끌고 나온다. 크고 작은 마찰이 몇 번 있은 후 5월 16일 화물연대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총파업을 결의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 집회 후 거리행진을 한다. 열사가 모셔져 있는 대전중앙병원을 통해 대한통운까지 가려는 것을 경찰이 막는다. 가려는 사람과 그걸 막으려는 사람들의 충돌이 일어난다.

    박종태집회

    박종태 열사 장례 행진의 모습

    전국에서 동원된 110개 중대 1만6천여 명 중무장한 경찰병력은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아댄다. 이에 대항해 노동자들은 “열사정신 계승”, “원직복직”, “화물연대 인정” 라고 써 있던 검은 만장을 떼어낸다. 그리고 대나무로 경찰의 방패와 곤봉에 맞선다. 마침내 노동자들은 경찰을 몰아내고, 대한통운까지 1.4Km의 행진을 마치고 평화롭게 돌아온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뒤에서 폭력적으로 연행을 시도한다. 아파트 벽이 길게 서 있어 도망갈 곳도 없고, 가로등도 거의 없는 어둠 속에서 노동자들은 무수히 맞고 연행된다. 주변 아파트로 도망간 사람들까지 마구 짓밟기도 한다. 무차별 연행을 피해 나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조끼나 우비를 입은 사람은 무조건 연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경찰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차량을 일일이 검문검색하며 집회 참가자들이 탑승했는지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버스에서 연행한다. 금호타이어노동조합 경우 조합원들이 탄 버스가 통째로 연행되기도 한다. 경찰은 “시위대가 만장 깃대를 죽창으로 만들어 흉기로 사용하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발표한다. 이날 집회로 457명이 연행되고, 154명이 부상당한다. 방송차량도 압류된다. 그 중 20명이 구속된다. 투쟁이 끝난 후 김달식 본부장과 윤창호 사무국장 등도 구속된다.

    영안실에서 매번 잘 수는 없는 일이어서 서울로 올라간 연맹 상근자 집에서 출퇴근하며 그렇게 한 달여를 보내고, 52일 만인 6월 20일 열사를 망월동에 묻는다. 바로 전해 분신한 이병렬 열사와 옆에 말이다.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불렀던 박종태 열사는 그렇게 갔다.

    ‘물’길을 막는 정부

    촛불이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어느 날, “한반도 물길 잇기 및 4대강 정비 계획의 실체는 대운하입니다”라는 글이 다음 아고라에 실린다. 우리 연맹 산하 공공연구노조 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의 양심선언이었다. 그는 조합원이다. 김이태 박사의 양심선언은 촛불이 번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밀려 핵심 대선 공약이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오래 가지 않는다. 최초 대운하 공약이 나왔을 당시 국민의 혈세 한 푼 안들이고 민간인 투자로 유치하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운하 공약이 4대강 사업으로 바뀌면서 세금 22조원이 투입되도록 바뀌기도 한다.

    김이태

    김이태 박사에 대한 징계를 규탄하는 공공연구노조 기자회견

    양심선언 당시 “징계는 없다”고 하던 건설기술연구원은 여론이 잠잠해지자 김이태 박사에 대해 3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한다. 이를 막으려던 곽장영 등 노조 간부 3명에 대해서도 해고 등의 추가 징계를 한다. 400여 명이던 조합원 중 330여 명이 탈퇴하기도 한다. 물론 이후에 모두 부당해고로 판명되어 복직한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아픔은 복직이 된다고 풀어지는 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4대강을 모두 뒤집어 놓는다. 화물연대와 김이태 조합워 때문에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뀐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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