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에서 타올랐던 불꽃
    [산하의 오역] 1960년 2월 28일 그날 대구의 고등학생들
        2013년 02월 28일 02:43 오후

    Print Friendly

    ‘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별명이었다. 1946년 10월의 민중봉기부터 대구경북지역의 좌익세는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한바탕 싹쓸이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 분위기는 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거니와 대구는 어디에 내놔도 그 반골 기질이 뒤지지 않는 고장이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하필이면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가서 급서하자 이승만에 반대하던 많은 국민들은 실의에 찼다. 신익희도 호남선에서 배를 쥐고 쓰러졌고 조봉암은 이승만이 죽여 버렸다. 그나마 야당의 거목이라 할 조병옥마저 저렇게 됐으니 어쩌면 이승만 박사란 양반은 어쩌면 운이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전직 가카를 우러러 그렇게 말하듯이.

    그런데 희망은 작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여든을 넘었으니 아니할 말로 어느 날 화장실 가다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통령에라도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다면 그래도 위안이 될 터였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치를 정권이 깨닫지 않을 리도 만무. 그들은 막대한 부정선거는 물론 치졸한 선거 개입에 나선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시내 고교들에 일제히 등교령이 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많았던 섬유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출근령이 전달됐다.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전날 토요일에 급작스럽게 단축수업을 실시하거나 조기퇴근을 시키더니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토요일은 자유당 대구 유세였고 일요일은 민주당 대구 유세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 유세장에 갈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놓으려는 정권의 얄팍한 술책.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는 찌질함의 극치는 그때의 이 대통령 정권도 마찬가지로 발휘했다.

    경북고등학교는 갑자기 시험을 앞당겼고 대구상고에서는 난데없는 졸업식 송별회 연습이 거행됐다. 대구여고에서는 어설픈 무용대회가 펼쳐졌고 별안간 떨어진 소집령에 학생들이 반발하자 그럼 영화라도 보자고 애걸하는 곳도 있었다. 어떤 경북고등학교 재학생의 추억에 따르면 영화 단체 관람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서 영화 <철도원> (추억의 이탈리아 명화)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가운데 으뜸은 대구고등학교였다.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유달리 자연친화적이었던지 이 날 ‘토끼사냥’을 핑계로 제자들을 불러냈다. 몽둥이 하나씩 들고 산자락을 뛰어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한 정권의 행동에 학생들은 불똥이 튄 듯 분노한다. 이기 뭐고?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 손진흥 등 대구 시내 학교 대표 7-8명이 이대우 학생의 집에 모였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 않은 ‘고딩’들. 그러나 그들의 각오는 사뭇 비장했다. “이거 하고 나면 우리는 퇴학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낀데 감옥 갔다 와서 취직은 우예 하고 뭐하고 먹고 사노.” 그러던 그들은 뜻밖의 노래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유정천리’. (대구일보 김풍삼 고문 증언)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즉 감옥도 가고 취직도 안되고 인생 조질 거 같으면 까짓거 두메 산골에 들어가 감자라도 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경상도 특유의 확인 구호도 있었으리라. “댔나?” “댔다!”

    대구228

    사진출처 blog.daum.net/ho2994/16817962

    다음날 손진흥은 진창밭이 된 길을 자전거를 낑낑거리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시위 결정을 재확인했다. 교사들의 만류가 완강해 시위가 무산된 곳도 있었지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 진출에 성공했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선언문 중) 대구 중앙로를 내달리면서 그들은 부르짖었다. “일어서라 동방의 횃불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경찰이 가장 곤욕을 치른 것은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때였다. 경찰은 곤봉을 들었지만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쓰려던 작대기를 쳐들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대구고등학생들을 겨우 진압한 경찰들은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무지하게 욕했을 것이다. “언넘이 토끼사냥 한다 캐가꼬!!!!” 그렇게 2.28 시위가 대구를 진동했다.

    이 시위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그 두 달 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시위의 전초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후 반세기 가까이 한국 사회를 진동했던 학생 시위의 시발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한국 ‘청년학도’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린 것은 시대를 고뇌하던 명문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시위는 다른 시위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시민들이 그 시위에 뛰어들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을 여전히 강고해 보였고 학생들은 무더기로 잡혀가고 징계를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정말로 “가련다 떠나련다”를 불러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소해 보이는 불똥들은 이미 바짝 말라 버린 들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불똥들은 3.15 부정선거라는 기름 세례를 받으며 불길로 화했고 불길은 들불로 타올라 이승만으로 하여금 “가련다 떠나련다 프란체스카 손을 잡고~~~”를 부르며 하와이로 가게 만들게 된다. 2월 28일의 대구가 없었으면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고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으면 4월 19일의 서울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 2월 28일의 대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 자격을 갖춘 도시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권력에 저항하던 그 앳된 의지들이 어느 세월엔가 “한 집 건너면 청와대와 연결되는” 환상들로 둔갑했는지. 2.28 데모에 나섰던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우리 나라 현대사를 어떻게 아도를 쳤는지.

    그렇게 역사는 가끔 어처구니없는 역설과 황당하리만큼의 역전을 즐긴다. 그래도 2월 28일 ‘유정천리’를 부르며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하겠노라고 종주먹을 내밀고 눈을 빛내던 까까머리 검은 교복의 고등학생들은 여전히 우리 역사의 희망이고 자산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는 위대했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