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 부근서 벌어먹기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7]과일장사에서 양색시 옷장사로
        2013년 02월 28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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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색시 옷장사, 양키물건 장사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우선 피난가기 전에 하던 과일 장사를 다시 했어. 근데 가만 생각하니까 이렇게 해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더라구. 하루 종일 무거운 거 이고 애 업고 하니, 힘만 들고 돈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시장을 돌아다니는 데 어떤 여자 하나가 아주 멋쟁이가 지나가는 거야. ‘참 멋쟁이다….‘하고 나도 넋을 놓고 보고 있었어.

    내가 성격이 괄괄하긴 해두 또 첨보는 사람한텐 말도 못걸구 그러거든. 근데 그 여자가 나한테 먼저 다가왔어. ‘가만 보니까 시장바닥서 고생할 여자 같지 않은데 어째 이렇게 시장바닥을 도냐?’

    그래. 그래서 ‘내가 할 말이 바로 당신이 한 말이다. 어째 이렇게 멋쟁이 여자가 이런 시장 구석을 돌아다니느냐?’ 그랬지, 그래서 둘이 서로 사정 얘기를 하면서 친해진 거야. 그 여자도 애 둘 낳고 남편이 먼저 죽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나보다 한 살 아래야. 남자 애는 이쁜데 여자 애는 지질이 못생겼어.

    그 여자가 그래. ‘과일 장사 같은 거는 하지 말고 나 따라서 양색시들 상대루 옷장사를 하자. 그러면 돈이 된다.’구. 그래서 ‘나는 그런 거 모른다. 어디 가서 옷을 살지도 모르고 어디가야 양색시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랬지.

    그랬더니 그 여자가 그저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하래. 어느 시장 어디 가서 옷 사는 거부터 다 그 여자 따라 다니면서 하라는 데로만 했어. 양색시들 한테 팔러도 같이 다니구. 근데 그 여자랑 나랑 똑같은 옷을, 똑같은 보따리에 싸서 들고, 양색시들 집을 같이 들어가서, 같은 값에 물건을 팔아도, 그 여자는 나보다 세배는 더 팔아. 허다 못해 양말까지도 똑같은 거 가져가는 데 말이야.

    그 여자가 장사 수완이 좋은 것도 아닌데 그러대. 외상도 그 여자 꺼는 빨리 갚고 내 꺼는 안갚아. 아마 내가 무뚝뚝하고 곧이곧대로여서 그런가봐. 글구 그 여자가 너무 멋쟁이로 생겼으니까 같은 여자들도 다 반하구 그 여자한테만 꼬이는 거야. 남자들두 그냥 침을 질질 흘려. 그러니 맨날 남자들이 따라 붙고 해서 내가 그 여자 덕에 한동안 밥도 많이 얻어 먹었어. 성격도 좋아서 나랑두 잘 지냈어. 그러니 내가 그 집 애들 많이 돌봐주고. 월세 똑같이 내고 그 여자는 세 식구고 나는 한 식구니까 내가 손해보는 건데도 그런 거 안따지고 서로 잘 했어.

    그 때는 뺑뺑 돌아 장이거든, 어디든지 늘 돌아가면서 장이 서는 거지. 그러니 이십리 거리에 장이 서면 오구가구 사십리 아냐? 그 길을 걸어서 물건을 사서는 양색시들 있는 동네면 어디구 가서 파는 거지. 미군부대들이 있는 데면 평택 의정부 춘천 머 어디든지 가는 거지.

    가서 셋방하나 얻어서 같이 사는 거야. 나는 혼자구, 그 집 애들은 같이 있기도 하고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하는 거고. 나는 양색시 옷장사를 시작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은 충신동 큰집에 맡겼거든.

    돈은 과일장사보다야 좋았지. 근데 외상도 많고, 떼이는 것도 많고 해서, 별 재미는 없었어. 미군부대가 다른 데로 옮기거나 통째로 떠나버리고 할 때도 있었거든. 그러면 그 양색시들도 쫓아가는 거고, 나두 외상값 받으러 또 쫓아가야하는 거구. 외상 많이 깐 년들은 찾을 수가 없고, 푼돈 깐 년들 것만 받아오구 그러니, 돈도 별로 못번 거지. 돈 떼고 도망가는 년들도 보면, 그 여자가 외상 준 년들은 별루 없구 내 물건 가져간 년들이 거의 도망을 가는 거야. 그렇게 내가 복이 없대니까…. 이상하게 그렇대.

    양색시 옷장사하다 잠깐씩 충신동 집에 오면 어떨 때 사는 게 너무 깝깝하구 한심해서 옷장사 하던 것 중에 맘에 드는 거 골라 입구 혼자 한일극장(위키백과: 이 극장은 역사가 길다. 1941년 제일극장이라 이름을 고치기 전에는 「항좌(港座)-미나도좌」라고 했었다. 지금은 종로 5가이지만 종로 5정목(五丁目)에 있었다. 1921년 이전에는 「관상장觀商場」이라고 했었다. 원래 1910년대에 동대문 시장에서 극장형태로 발족되었었다. 광대, 재인, 기녀들의 놀이터였다. 그러한 연예장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자 항좌라는 극장이 되었다. 미나도좌란 본시 미나도 모자점 주인인 미나도란 일본인이 서울 동대문 안에 차려 놓은 극장 이름이다. 일본 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극단 명칭을 일부러 미나도좌 연극부라고 붙였다. 극단의 조직 운영은 최승일이 맡고 예술적 책임은 나운규가 담당하기로 하였는데 일본인 극장 주는 극장 경영에 백지인지라 이들이 무슨 연극을 어떻게 하려는지도 전혀 모르고 덮어놓고 나운규가 연극을 한다니까 큰 돈벌이가 될 것이라 믿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겼다.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었으며 약 9백 명을 수용했다. 무대도 제법 컸다고 한다. 주로 연극과 악극을 공연하였으며 영화는 재상영을 주로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이 극장에는 여러 가지 이야깃 거리가 많았다. 30년 대 초반 변경된 제일극장이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6˙25 후 임화수가 극장을 경영하면서 평화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19와 5˙16을 거치고 한일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더니 1977년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에 영화 보러가구 그랬어. 그럼 남자들이 집까지 따라 오는거야.

    (필자) 어머니가 스타일이 좋으니까 그럴 만도 했겠네요….ㅎㅎ

    (김미숙) 동네사람들 보면 말 날꺼 아냐. 그래서 쫓아 버릴려구 “우리집 다왔는데 머하러 따라오느냐? 내가 목로집 갈보로 보이냐?” 그러면 “그게 아니고 집에서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하는 여자 같지는 않고 직장여성 같은데, 머하는지 사람인지 궁금도 하고 사궈볼려고 따라온대는거야. 나두 숨통을 틀 데가 없으니까 그렇게 영화래두 보구 바람이라도 쐬구 와야 좀 살겠더라구.

    양담배

    해방 이후 양담배를 파는 모습(사진=’서울 20세기’사진집 자료사진)

    그 무렵 양키물건 장사도 시작했어. 그 전에두 양색시들한테 옷을 팔면 그걸 돈으루두 받지만 양키 물건으로두 받고 그랬거든. 그러면 그걸 팔아서 돈을 만드는 거지. 그러다가 직접 양키물건을 떼서 돌아다니면서 판거구. 처음에는 요령도 모르고 연줄도 없고 하니 힘들었어. 당시는 불법이니까 걸리기도 하잖아.

    맥주는 열괘짝을 택시로 실어다가 넘기면 5000원 남아. 거기서 택시비 3000원 빼고 나면 2000원이 내 돈인 거지. 가끔씩 애를 내가 데리고 있기도 했는데, 우리 아들하고 나하고 팔킬로 짜리 쌀 두말 가지구 한 달을 먹는데, 그 돈으로는 콩나물반찬 밖에 못먹어.

    육신 종일 움직여서 겨우 굶지 않고 먹는 거야. 큰 돈을 만져볼 수가 없어. 나한테는 살기가 너무너무 힘들더라구. 여자 혼자 산다는 게 너무나 힘든 일이야. 게다가 나는 서울 바닥이 쌩판 남인데다, 인덕두 없구, 돈복두 없구. 그러니 나중에 댄스홀이구 미군이랑 살림이구 안할 수가 없는 거지.

    미군부대 근처에 방얻어 살면서 전날 물건을 사뒀다가 새벽 네시 통금해제 싸이렌만 불면 딱 집을 나와서는 양키물건 파는 시장들까지 차를 터거나 걸어서 가는 거야. 남대문 도깨비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그런 데 거래하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거든. 춘천으루 차타고도 다녔고. 가평에 살 때는 서울까지 버스 타고 걷고 하면 가는 데 두 시간 걸렸어. ‘어디가 시세가 좋다.’ 소문이 있으면 거기를 찾아 가는 거지. 그것두 현찰거래야.

    물건 넘기고 돈 받고, 그러면 그 돈을 들고 다시 미군부대를 가서 십불 주고 물건 받아다 집에 갔다 놓구, 다음 날 네시 통행금지만 풀리면 또 서울로 지방으로 팔러가고. 하루에 그 싸이클이 한번씩 맨날 도는거야. 한 번에 십 불을 주고 물건을 사서, 그 동네 앉은 자리에서 팔면 오불이 남고, 그걸 서울 와서 시장에 도매로 넘기면 십 불이 남고 그래. 그러니까 이문 더 남길려구 서울 시장까지 와서 파는 거지.

    웬만한 데는 다 걸어 다니는 거지 머. 가능하면 가볍고 부피가 적은 걸로 하는 거야. 럭스비누라구 하얀 세숫비누 그거 많이 했어. 그게 따불이 남았어. 젤 간단하구 돈도 많이 남구 그랬지. 몸에다 띠를 띠어서 물건 감춰 가지구 시장 돌아다니다 잡히면 맞기도 하구 뺏기구 구류두 살구 하는 거지. 구류 보름을 살아봤어. 먹는 거는 유치장서 주는 거구 하니까, 먹구 살기 힘들 때는 차라리 유치장살이가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어. 남자 유치장 여자 유치장 따로 있지. 벌금은 없구 물건 뺏기구 유치장 사는 거지. 처음 잡히면 일주일, 두 번째는 보름, 그러다가 세 번 잡히면 정식 재판받구 교도소로 넘어가는 거지.

    그렇게 시작했다가 나중에 무슨 운이 붙었나, 미군부대 피엑스 한국인 책임자를 알게 된 거야. 그 사람한테 직접 물건을 받게 되고부터는 이문이 많이 남았어. 그 피엑스 책임자는 나보다 훨씬 많이 벌었겠지. 내 물건 사주면서 반반씩 이문을 나눴었구, 나 같은 사람을 여럿 두고 있었을 거 아냐. 그러니 많이 벌었겠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부대 사람들하고도 친하게 되고 미군들하고 살림도 하고 하면서 물건을 안전하게 많이 빼낼 수 있잖아. 그러니 미군하구 살림하는 동안도 그 장사를 계속 한 거지.

    살림은 혹시 결혼해서 미국 갈 욕심인 거고 돈은 양키물건 장사로 주로 번 거지. 그렇게 한 5년을 양키 물건 장사를 해서 서른 한 살에 이 집을 산거지.

    사놓기만 했지 내가 들어와 살지는 않았어. 평양서 같이 온 친구 그 여자네가 노상 살았지. ‘너 집 살 때까지 여기서 살아라.’고 했어. 11년을 그 년네가 그냥 살고, 나는 미군부대 따라 다니면서 그 옆에 월세방 얻어서 살고 그랬지. 내가 이리 이사온 거는 얼마 안돼.

    댄스홀 댄서 / 미군과의 살림

    그 예쁘다는 여자도 옷장사가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 ‘청춘을 이렇게 보내긴 너무 억울하다. 댄스홀에 들어가서 돈을 벌자.’ 해서, 걔하고 나하고 춤을 배웠어. 미군부대 근처엔 댄스 교습소들도 많았거든. 남은 보름이면 배우는 걸, 난 한달 반을 배우러 다녔어. 배우는 게 느리기도 했지만, 또 성격 상 대강은 못하거든. 둘이 춤을 배워서는 파주 “아리랑 댄스 홀”이라구 일대에서 젤 잘나가는 댄스 홀에 취직을 했어.

    댄스홀은 인물보다 스타일이 멋있어야 돼. 멤버가 딱봐서 괜찮으면 나오래. 면접을 보는 거지. 얼굴도 얼굴이지만 키 크고 날씬한 여자가 인기야. 미국 사람들은 쾌활한 거 좋아해. 걔가 워낙에 낭만적이고 명랑해서 남자들이 모두 걔랑만 춤을 출려고 줄을 서 있는 거지. 근데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 댕기고 했으니까, 그런 게 맞지를 않아서 처음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지.

    근데 그러구 병신처럼 있을 수가 있어? 벌어먹구 살자구 나선 건대. 댄스 홀 주인한테서 월급을 받는 게 아니고, 춤을 한번 출 때 마다 티켓을 하나씩 쏴. 그러면 나중에 그 티켓을 세서 돈을 받는 거지. 미군들이 마음에 들면 팁도 많이 주고, 밤새도록 춤을 추고 그러는 거지.

    댄스홀

    댄스홀 열풍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을 달군 문화코드였다.(사진출처 : 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인기는 걔가 더 많았지만, 나도 나중에는 잘나갔어. 남자들 비우 맞추고 그러는 거랑 쾌활하게 웃고 하는 거를, 걔 보면서 많이 배웠지. 내가 키도 크고 몸매도 안빠지는데다 춤도 제대로 배워서 잘 추고 하니까, 미군들이 많이 붙더라.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부터 갑자기 그 여자가 안나타났어. 여기저기 물어봐도 다들 모르더라고. 아마 빼어나게 이쁘니까 미군 장교나 머 돈 많은 미국사람을 만나 미국으로 들어가거나 그랬나봐. 애들도 어떻게 됐는가 몰라. 친정 엄마한테 맡겼는지…. 그 여자 아니었으면 내가 사과 행상이나 하면서 밥도 제대로 못끓이고 살았을텐데.

    그 여자 만나 양색시 옷장사 시작한 덕에 돈 벌 방도도 찾고 양키물건 장사로 집도 사고 한동안 재미나게 살기도 하고 그랬어. 생각하면 그립고 고마워. 한 번 보고 싶어.(자신을 미군부대 인근으로 안내한 여성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에서도 보이듯, 김미숙의 미군부대 인근 진입은 그녀의 생계와 삶에 중요한 전환이었다. 다른 부분의 구술은 지나쳐버린 삶을 구술하듯 단선적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구술은 시기와 내용에서 복합적으로 혼재되고 혼돈되어 있다. “지나쳐버린 삶”이 아닌 “머물러 산 삶”이어서라고 여겨진다. 비록 종로에 사놓은 “그녀의 집”이 그녀가 돌아가 쉴 곳이기는 하였겠지만, 생애의 치열하고 잘나가던 시절을 산 미군부대 인근은 그녀에게는 생계의 장이자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공생의 장이었다.)

    (필자) 그러시겠어요. 어르신 제일 힘들고 암담할 때, 정말 큰 도움도 되고 의지도 되었던 분이신데, 어디서라도 잘 살고 계시면 좋겠네요. 두 분 다 서방도 없고 자식도 딸리고 해서 많이 마음도 통하셨을 거 같아요.

    (김미숙) 그랬지…. 내가 그 여자 안 만났으면 얼마나 깝깝하게 살았을 지 몰라. 미군부대니 양색시니 양키물건이니를 어디 가서 알았겠느냐구? 몰라, 남들은 그런 일을 머라 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거 없으면 못살았어….

    (필자) 그럼요. 그리고 그 ‘양색시’라고 불리던 여성들 뿐 아니라 양키물건 장사하시던 분들이나 미군들까지도 모두 벌어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누가 감히 그걸 가지고 머라 할 수 있겠어요. 사실 미군부대 근처에는 미국군인이건 한국인이건 여자건 남자건 대부분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 그렇게 살았던 거잖아요.

    (김미숙) 그래 그런 거지….다들 먹구 살자구 글루 와서 모이게 된 거지. 그 때 미군들도 보면 많이 배우구 돈 많구 한 미군은 드물었어. 높은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다들 지네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못배우구 한 사람들이 오는 거드라고. 지네 나라 글씨 모르는 미군들도 많더라니까. 흑인들은 더 그랬고.(미군들과 살림을 사셨던 이야기는 2010년 구술에서는 없던 부분이었다. 그때는 한국 대위와의 성애까지가 본인의 남성 경험의 마지막이라고 하셨었었고 클럽에서의 댄서 경험도 2차를 나가는 성매매에 대해서는 구술하지 않으셨었다. 그런데 2013년 1월 마지막 구술에서 댄서로서의 2차의 경험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셨고 미군들과의 살림 사신 이야기는 다소 길게 구술하셨다. 아마도 이 전 인터뷰에서는 마음이 안내키셨었나보다. 하여 그 부분을 별도로 정리하고 편집하고 이전 구술들을 다소 수정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김미숙은 자신의 미군과의 살림을 성매매와는 구분하셨고, ”양색시 상대의 옷장사“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미군과의 살림“이나 댄서로서의 2차 경험에 대해서는 ”양색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구술자가 누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의 문제, 자신에 대한 긍정과 타인(사회 혹은 청자)의 시선과의 갈등과 협상,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하는 구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긍을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 및 사회적 낙인과 싸워나가는 소수자의 전략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필자와의 대화에서 보이는 정체성이나 자긍과 달리, 구술작업 이전과 이후 본인 내면에 이 부분이 어떻게 정리되었었고 나아가 정리되는 과정에 있는 지는 별도의 문제라고 여겨진다. 정체성은 존재(being)라기 보다 되기(becoming)여서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이다.)

    그루구 말야…. 에구, 내가 오늘 별 얘기를 다하네. 전에는 말을 안했는데, 그 댄스홀 다니면서 만난 미군들하고 2차도 많이 나갔고, 살림도 여러 번 채렸었어. 2차를 안나갈 수가 없지. 그게 춤춰주는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되거든. 댁한테는 해두 좋을 거 같아서 하는 거야. 흉으루 보지두 않을 거 같아서. 댄스홀에서 만난 미군들 중 서로 맘에 들면 2차를 나가거든. 그러면 팸푸나 그런 사람들한테 일부 돈을 떼어줘도 받는 돈이 훨씬 많지. 그래두 살림 사는 게 더 좋은거야. 생활비도 받구 하지만, 그거보다 그 미군이랑 결혼해서 미국 들어갈 꿈도 꿀 수 있는거거든. <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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