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전과 심리전의 역사
    [정지된 역사-2] 사면초가 1부
        2013년 02월 27일 01: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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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전이란 적을 관통하는 첫번째 화살이다. 선전이야말로 적을 상대로 하는 작전의 첫 번째 단계여야만 한다.” – 윌리엄 도노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우리의 국보급 만화가이자 유머작가 故 고우영 화백의 걸작을 꼭 인용해보고 싶었다.  ‘심리전’을 이보다 코믹하게 시각화하기도 어렵다. 입술이 퉁퉁 부어오른 저 장비 휘하의 사병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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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고우영, <<삼국지>>

    고우영 화백이 ‘욕지거리 중대’라고 명명한 이 심리전 부대는 초나라의 ‘올디스 밧 굿디스’를 들은 항우가 전의를 상실했다는 저 유명한 고사, ‘四面楚歌’와 함께 심리전의 두 가지 전술을 잘 묘사한다. 열받게 하거나, 쫄게 하거나.

    ‘선전’(Propaganda, 나찌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전쟁정책에 대해 영미의 관료들은 선전이라고 명명한 반면, 자신들의 유사한 교전수단에 대해서는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이라는 용어를 선호했고 결국 공식명칭으로 자리잡았다.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정도의 차이랄까?)을 적의 심장을 “관통하는 첫번째 화살”이라고 표현한 사람은 ‘와일드 빌’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윌리엄 도노반이었다.

    CIA의 아버지이자 OSS의 창립자인 이 인물은 대한민국 역대 정보기관의 중시조쯤 되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정보기관이라, 방첩대, 특무대, 중정, 보안사, 안기부… 아 아 그 뒷줄에 서 계시는 ‘분’들을 호명하자니 왠지 “트릿”하다. 괜히 오금도 저려온다. 그러니 딱 이까지만 하자. 먼저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면, 이 글이 대상으로 하는 ‘음지의 전사들’과 그들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과거지사’라는 사실. 지금은 절대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이다.

    심리전은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낡은 교전수단이다. 하지만 심리전이 의지해야만 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지난 세기, 그러니까 양차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크게 발전하여 그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어마어마한 양의 찌라시폭탄, 중단파 라디오 송신기지들, 헬리콥터 공격편대의 선두에 장착된 고출력 확성기, 전장의 이동방송차량과 그 차량에서 찍은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송시키는 위성네트워크, 그리고 5대양 6대주를 촘촘하게 가로지르는 광케이블에 이르기까지. 기껏해야 엄안의 성곽과 항우의 진영을 목표로 하던 ‘욕설’과 ‘초가’가 미치는 범위는 이제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물론 그 화살촉들이 적이 아닌 우리편들에게도 겨누어지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한 점이고. 장비부대 사병의 ‘찰진 입술’에서부터 오피스텔 미녀(?) 정보기관원의 뾰족한 ‘마우스 포인터’에 이르기까지, “영혼을 향한 총탄”(mental bullet)의 역할을 하며 적(과 우리편)의 약점을 관통해 왔던 이 “첫번째 화살”과 관련한 사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리전과 냉전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戰(warfare)’이라는 단어는 ‘전장’(battle field)이라는 공간 안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좁게는 총칼을 맞대고 있는 戰線(front line), 조금 넓히자면 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적대적 군대의 싸움터를 의미하는 ‘전구’(戰區, theater)쯤에 해당하는 정해진 공간에서나 사용되는 것이었다. 보병전에서 기병전으로 참호전에 전격전으로, 전술전에서 전략전으로 조금씩 전쟁의 규모와 범위가 확장되면서 심리전이 활약하는 범위도 차츰 넓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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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 설명 : 1950년 3월 3일, 미 보병 제3사단의 포트렉스(Portrex) 기동훈련이 벌어지던 푸에르토리코 동부 연안의 작은 섬(Vieques Island)의 한 측간. 모든 인민들이 어딜 가든 달고 다녀야 하는 뱃지에 담긴 수령처럼, “전능한(omnipotent) 지도자들은 모든 곳에 존재(omnipresent)해야만” 하는 법이다. 한데 뭐 빅브라더가 꼭 ‘툰드라 지방’에만 있으란 법이 있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의 존영은 대한민국의 모든 관공서는 물론이고 청년회나 협동조합 같은 민간단체의 사무실에서까지 늘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심지어는 나의 어린 시절 집에도 책장의 가장 높은 칸에 박통의 사진이 걸려 있었으니. 적어도 복종-지배의 심리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근엄하신 각하의 눈빛과 CCTV의 렌즈가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행동은 물론이고 생각조차 헛되이 하지말라! 뭐 여전히 예전의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분들로 하여금 경망스럽게 핸드폰 고리 같은데 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이참에 아예 ‘위대한 영도자’의 용안이 담긴 뱃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어떨까 모르겠다. 사진출처 : 미국립문서기록청(NARA)

    1950년 3월, 미 육군보병 제3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단의 미군연합부대가 푸에르토리코의 한 섬에서 대규모 상륙기동훈련을 벌였다. 2개월 간의 사전 준비훈련에 이어 3일간의 실전훈련까지. 가상의 적이 점령한 캐러비안의 주요 도서 가운데 하나를 사흘에 걸쳐 탈환하는 작전이었다.

    수비군(미 보병 3사단의 가상 적군인데, 미군 지휘관이 푸에르토리코 군을 지휘했다) 푸에르토리코군을 지휘한 미군 장교는 상륙하는 공격군(미보병 3사단)에 대한 대비책의 하나로 “심리전 수단”을 준비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저런 것이었다.

    “빅브러더가 너네를 다 지켜보고 있어”

    이름은 안적혀 있지만 저 콧수염난 아저씨가 김흥국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아차리겠다. 수비군은 이 외에도 그 섬에는 있지도 않던 “독사나 해충 조심”, “맹독성 열대식물 주의”와 같은 표지판을 상륙지점 곳곳에 세웠다. 수비군을 지휘한 시버트(Edwin Sibert) 장군은 “조지 오웰의 ‘1984’로부터 모티브를 얻어서, 약간은 장난끼가 발동하여 스탈린의 사진을 뒷간에다가 세워”놓았다고 설명한다. 2차 대전 당시 오마 브래들리 장군 휘하의 정보참모(G-2)를 지냈던 ‘정치군인’답게 유머감각도 ‘정치적’이시다.

    군대에서 정보참모를 지내신 분들께서 한가하게 이런 글을 읽을리는 절대 없지만, 그래도 G-2를 ‘정치군인’이라고 한 것에 저으기 불쾌해 하실지 모르겠다. 주로 전술정보 혹은 작전정보(tactical intelligence, operational intelligence)를 취급하며 단순히 부대의 작전임무에 복종하는 정보참모가 왠 정치고 또 이데올로기냐고. 이 문제는 차차 설명될 것이라 믿고…

    수비군의 포화를 뚫고 비퀘스 섬 해안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한 공격군들이 한숨을 돌리며 미뤄둔 큰 일을 보러 뒷간을 찾았을 때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니 이런 남의 X 누는데까지 와서 눈알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적, 혹은 적체제에 대한 약간의 공포, 경멸, 적의, 비하, 분노 뭐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배변활동을 방해했으리라.

    우리는 이 사진에서 한 가지만 추정해보면 된다. 비록 수비군이 세운 것이지만, 이는 공격군의 전투의지를 저하시키기 위한 것도 또 수비군의 사기(morale)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란 점이다. 그럼 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전쟁, 그것은 아마도 소련과의 전쟁이 될 터인데, 그 전쟁에서 마주해야 할 ‘주적’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이 ‘빅브러더’의 면상을 마주하며 시원치 않은 볼일을 봐야했던 병사들 대부분은 이로부터 8개월 뒤, 지형은 비슷했지만 기후와 환경이 180도 다른 지구 반대편 백사장에 상륙했다. 원산이었다. 야자수와 저 콧수염 아저씨만 빼면 기동훈련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실전대비 훈련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은 8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빅브러더’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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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 설명 : 1945년 9월 도쿄방송 녹음실의 토구리, 전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수가모(Sugamo) 형무소에서 출옥하는 토구리(Iva Toguri d’Aquino).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심리전 가운데 하나였던 라디오 동경(NHK)의 미군상대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했던 그녀는 1945년 10월 전범으로 미점령군에게 체포되어, 12개월 동안 FBI와 미육군 방첩대의 수사를 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FBI는 미군들이 “도쿄 로즈”라고 불렀던 대남..아니 대미방송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또 섹시”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단일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일본여성들이라고 결론내렸다. 일본의 이 대미심리전 방송의 애청자들(미군들이다)은 종전 이후 그녀가 ‘도쿄로즈’임을 증명할 수 있다며 앞다투어 증언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천황전범론이 소리소문 없이 사그라든 데에 반해, ‘섹시한 목소리에 게다가 미스테리하기까지 한 오리엔탈 여성’이 관련되어 있던 이 사건은 언론은 물론 영화, 음악계까지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가쉽성 기사들로 인해 미 법무국의 재수사와 함께 미국 내 법원에 다시 회부되었다. 이번에는 전쟁범죄 혐의가 아니라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니 일사부재리는 아니다. 1948년 9월 미해군의 삼엄한 경호 아래에 샌프란시스코로 호송된 그녀는 미국 역사상 여섯 번째 ‘반역죄’로 유죄선고를 받고 징역 10년을 살다 1956년 출옥했다. 사진출처 : NARA

    2차대전 당시 미군의 사기저하(?)를 목표로 라디오 도쿄에서 방송되던 ‘제로아워(Zero Hour)’라는 프로의 주말 여성 진행자 이바 토구리는 전형적인 심리전 전사 가운데 한명으로 생각되었다.

    미국 이민 2세로 태어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했던 그녀는 진주만 공격이 있기 몇 달 전, 친척을 잠시 방문하려고 일본을 방문했다가 미국의 선전포고로 인해 귀국을 포기했다. 이후 종전까지 동경에 머무르며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그녀의 장기인 유창한 영어발음 때문에 심리전 방송에 취직까지 된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야 고국(미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동안 잠시 갖게 된 아르바이트인 셈이었다.

    1941년에 설립되어 적국의 라디오방송 감청임무를 띄고 있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 포틀랜드에 본부를 두고 있던 이 기관은 수천마일 떨어져 있던 모스크바 라디오방송을 감청하야 북한 및 남한 관련 방송내용의 스크립터를 작성했는데, 1945년에서 1948년까지 38선 이남에서 암약하던 ‘모스크바-북한-남한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의 그림표를 주한미군이 그리는 데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했다)가 녹음한 자료 가운데 한 부분이다.

    안녕…하세요, 적군 여러부~운~.. . . 별일 없나요? 라디오 도쿄의 앤(Ann)이에요. 이제부터 제로 아워 정규 프로그램을 시작할거에요, 호주와 남태평양에 있는 우리 친구들을 위한,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의 적(!)을 위한 음악, 뉴스 방송 말이에요. 아차, 애들은 들으면 안된단다. 모두 준비 되셨나요? 좋아요. . . 이제 여러분들 사기를 떨어뜨릴 우리의 첫 번째 펀치를 날려드리죠.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합니다. “Strike up the Band” 띄워드릴께요. (194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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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 설명 : 호주군을 상대로 한 일본의 심리전 포스터.

    “호주군 : 아니 대체 저 비명소리는 머야?”

    “양키 : 아아 아가씨 쉬~쉬~. 당신 남자는 금방 전사자 명단에 올라갈꺼니 걱정말라고.”

    당신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저 죽일 놈들(중국·소련·베트남 공산당간부, 소련군들, 미군들, 인민지원군, 국군 등등)이 당신의 여자를 겁탈하고 있다는 類의 심리전 포스터는 거의 모든 20세기의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 출처 :www.wolfsonian.org/

    토구리는 “나른하고 섹시한” 목소리로 여행카탈로그의 사진 속 풍경과는 달리 덥고, 습하며, 모기떼가 우글거리는 남태평양의 미군들의 고된 일상을 살살 약올렸던 모양이다. “긴장을 풀고, 뒤로 편안히 기대어 음악을 즐기세요. 아니면 내 모습을 떠올리고 함께 춤을 춰보는 건 어때요? 아참 거긴 모기떼밖에 없으니, 아쉬운대로 모기들하고라도 춤을 춰봐요. 음악 나갑니다. . . .” 뭐 이런 식이다.

    물론 참전 미군들 가운데에는 “사이판은 폭발물로 가득차 있으니 조심해야 할꺼에요”와 같은, 실제 군인들의 작전수행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만한 멘트들을 했다고 증언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이 방송의 주인공이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점령재판소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 그녀의 방송은 “심신이 피곤한 미군들의 사기를 오히려 북돋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미군들도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말하는 ‘부메랑 효과’랄까?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다”는 자화자찬 방송은 자주 들을수록 짜증이 나는 법이랄까?

    비록 그것이 사악한 의도를 가진 교전 상대국이 정교하게 디자인하여 집행하는 분명한 ‘교전수단’이기는 하지만, 이런 ‘효과에 대한 계량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심리전의 지위는 그다지 확고하지가 못했다. 아이젠하워의 말마따나 심리전의 효과는 “파괴된 마을이나 돌파한 저지선의 숫자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리고 이것은 심리전이 미군의 정규편제에 끼어들지 못했던 2차대전 발발 무렵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리전? 그게 뭐 그리 중요해?”

    뭐 그럴 수 있다. 사기가 높건 낮건 적을 굴복시키는 것은 결국 총이거나 칼이어야 한다. 한데 적이 ‘아놀라게이’같은 수퍼폭탄으로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릴 수 있는 그런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적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 상태나 관념적 형태와 관련된 뭐 그런 거라면?

    여기에서 두 가지 반응으로 갈렸다. 다수의 야전에서 뼈가 굵은 군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심리전은 군의 소관이 아니거나 적어도 군대의 상설제도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이들은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소수파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 답을 내놓은 사람들은 그 후 주류가 된 분들이었다. 심리전은 전장과 후방, 전시와 평시 모두에 있어서 중요하므로 군과 민간기구가 협력하여 조화롭게 그리고 상시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일상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 두 가지, 즉 “전쟁과 평화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숱한 성현들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의 혜안은 적을 위한 활동과 우리편을 위한 활동의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내게 했다.

    단순히 전장의 군인들을 상대로 하던, 적의 사기를 떨어트려 적의 작전수행능력을 저하시키고 아군의 승전기회를 높이겠다는 이 기술이, 전선의 이쪽편 그러니까 아군측의 군인과 민간인들을 상대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는 데에는 무엇보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 전선도 총알도 없는 만성적인 전쟁상태가 소리소문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라는 적은, 봉건영주나 파시스트와 달리 군대의 직접적인 동원이 없이도 가능하다는 소위 ‘자본주의 붕괴론’이라는 공포스러운 무기를 갖고 있었다. 이 무기는 일찍이 대륙간탄도탄(ICBM)이 개발되기 십 수년전부터 워싱턴 정책가들을 심란하게 만든, 사정거리와 살상(?)능력이 무제한인 최고의 무기였다.

    시간적인 제약도 또 공간적인 제약도 없는 이 전쟁은, 황태자를 향한 암살범의 총격으로도 또 평화로운 진주만에 대한 기습공격으로도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콕 집어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전의 책임을 물어 전쟁으로 야기된 모든 재난과 비극의 원흉으로까지 몰아가기는 어렵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냉전은 무수히 많은 냉전의 전사들이 전장에서, 의사당에서, 연구실에서, 편집실에서, 스튜디오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각자 맡은 냉전의 과제들을 조금씩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거대한 체제’, 하나의 거대한 ‘협업체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심리전을 맡은 분들 역시 자신이 주특기를 가진 영역에서, 전장의 무기로부터 후방과 민간을 상대로 한 무기로 천천히 이동해가는 데에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이 초기의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기구들과 핵심인물들이 어떻게 또 어떤 곳으로 방향타를 조정해 갔는지를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이 심리전이 스파이활동, 첩보수집, 반혁명, 반란진압, 정부전복, 파업파괴, 민간인사찰, 여론조작, 선거조작, 사상통제와 같은 비합법 활동과 몸을 섞게 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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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 설명 : 순결한 아리안의 여인을 위협하는 뱀으로 유태인을 묘사한 독일의 신문. 괴벨스로 대표되는 나찌의 선전술을 일종의 모범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미국 내에서의 반대는 매우 심했다. 특히 도노반과 함께 OSS의 나머지 반쪽을 책임지고 있던 셔우드(Sherwood)는 “만약 우리가 추축국이 쓰는 방식을 모방하고 거짓과 사기에 의존한다면 해외에서 미국의 이미지는 추락할 것”이라고, 특히 흑색선전(black propaganda)을 포함한 전면적인 심리전의 적용을 주장하던 도노반과 충돌하기도 했다. 사진 출처 : NARA

    <계속>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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