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쪼개지다
[아빠의 현대사-57] 그 날 2008년 2월 3일을 전후한 시기
    2013년 02월 27일 11: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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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며칠 남지 않은 2월 3일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가 파국으로 끝난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보수집단은 세력이 확산되고 있는 데 진보운동은 거꾸로 사분오열되어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수수방관해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투쟁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까딱하면 그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10년이 걸려 만든 울타리마저 없는 상황에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모든 민중에게 재앙이 될 한미 FTA가 비준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만일 이번 대의원대회에서 분열된다면 그것은 진보적인 운동의 파국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심각한 분열이 예견됩니다. 2월 3일 우리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역사적인 결단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수십년을 헌신해 온 운동의 심각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008년 2월 1일,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호소문’중에서. 임성규, 정용건, 이영원, 김창근, 전재환, 이재웅, 양경규, 박유기 등 전현직 산별연맹 위원장 명의로 발표)

“탁구공이 둘 사이를 오간다. 순식간에 탁구공은 농구공이 되고, 대포알이 되어 당 전체를 부수고 있다.” 누군가 민주노동당이 깨지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2007년 12월, 막 대통령 선거를 마친 직후였다. 나는 당시 조합원 중에서 6천명이 넘는 민주노동당 당원을 가진 공공운수연맹의 정치위원장이었다. 대통령선거에 민주노동당 권영길후보를 찍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소책자를 만들고, 교육을 하고, 선전을 했다.

선거가 참패로 끝난 후 처음 한 일은 조합원들에게 사과한 것이다. 조합원의 마음을 잡는 데 실패한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반성이었다. 수십년을 진보정당 운동에 몸을 바쳤으나 남은 것은 “겨우 이게 우리 실력이었구나!”하는 좌절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대통령 선거 직후에 발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모진 탄압을 받으면서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 갈가리 찢겨졌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리다. 불면의 밤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남몰래 흘린 눈물도 많다. 내 소원은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진보정당 하나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게 깨졌다. 이제부터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었는지를 보자. 다시 돌아보아도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말이다.

전진, 분당논의를 시작

분당을 주도한 한석호의 말에 의하면 한창 선거운동 중이던 2007년 11월 19일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현실문제로 고민하면서 “진보신당을 건설하자”는 글을 썼다고 한다. 한창 선거운동을 하던 나로서는 까맣게 모르는 얘기였다. 당시에 쓴 글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민주노동당을 포기할 지경에 왔으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진보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에 대한 토론과 목적의식적인 준비를 해 왔어야 합니다. 본격화된 분당논의 직전까지 <전진>의 총선방침 회의가 세 차례 있었고, 바쁜데도 불구하고 참여하여 논의해 왔습니다. 1인 2표의 경우 <전진>이 각 한명을 내야 하느냐, 모두 내야 하느냐 등 세부적인 내용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신당 창당 노선은 이전 전진이 유지해 온 “강령 중심의 당 운동, 노동계급 중심의 당 운동, 평당원 중심의 당 운동”이라는 전략과제로부터 한참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왜 갑자기 이런 전략 변화를 가져 오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혁명적 시기가 도래하여 전략이 수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선직전부터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우둔하여 그런지 전략적 변화를 얘기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마포 공덕동에 있는 <전진> 사무실에서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갔다. ‘당의 미래를 모색하는 특별사업팀’이라는 거였고, 세 번째 회의였다. 나로서는 첫 회의였지만 이미 <전진>은 대선 이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민주노동당안의 문제를 보면서 두 가지 의견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소모적 당내 경쟁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신당 창당의 불가피성을 확인하고, 시기는 정세에 따라 판단하자”는 의견과 “신당 창당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명분이 취약하다. 창당 불가피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의견으로 대립한다. 이 대립은 끝까지 간다.

두 가지 의견의 대립을 봉합하여 <전진>은 12월 23일 임시총회를 통해 일단 ‘당 강령 정신의 실현, 당 운영에서의 패권주의 평가, 종북주의 등 반진보적 노선에 대한 전면적 청산’ 등을 다루는 임시 당대회 소집을 요구하기로 한다. 아울러 제2창당 위원회의 결성, 당 지도부 사퇴와 비대위 구성을 요구하기로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길을 찾자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전진>은 비례대표 후보를 출마시키지 않기로 한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꼼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당 혁신을 위한 배수진을 친 셈이다.

당대회

민주노동당 분당의 전환점이 되었던 2008년 2월 3일 임시 당대회

흐름만으로 보면 ‘전진’의 뜻대로 된다. 2008년 1월 12일 중앙위원회에서 심상정 국회의원으로 비대위를 구성하고, 2월 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니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민주노동당과 깨지고, ‘전진’도 이후 해산한다.

논란의 시작, ‘종북주의’

우리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워낙 왜곡을 많이 하는 보수적인 신문이라서 모든 취재를 거부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운다, 그런데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이 전화 인터뷰를 한다. 그 자체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조승수는 나와 같이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국회의원도 한 오랜 동지이자 후배다.

조선일보는 12월 27일 1면에 “친북세력과 결별해야 민노당에 미래 있어”라는 제목으로 조승수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고 6면에 “민노당 ‘친북노선’ 싸고 격돌”이라는 제목의 해설기사를 싣는다. 보수신문을 통해 내부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그동안 당을 주도해 온 NL세력은 북한 세력을 추종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로 통일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행태를 보여 왔다. 이번 기회에 민주노동당이 친북세력과 결별해야 한다. 자주파들은 그동안 당을 의회정치의 핵심 기구, 즉 정당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남한 내 의회 투쟁의 전선 기구쯤으로 생각했다. 당내 다수파를 이루기 위해 어떤 지역에는 그곳에 살지도 않는 대학생들까지 전입시키고 대의원으로 선출하는 조직 장악 행태를 보였다. 예산 운영이나 집행도 운동권 단체 수준의 마구잡이였다” 노무현 대통령식으로 표현하자면 ‘막 가자는 얘기’를 한 셈이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친북노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고 대선결과가 친북노선 때문이었다는 것은 아전인수식 주장에 불과하다. 사람마다 자기 생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을 부풀리고 억지 논리를 만드는 것은 무책임한 자세다. 당 내 일정 정치세력을 친북파 혹은 종북파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정하라고 압박하는 것이야말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파괴하는 중세식 마녀사냥이며, 1950년대 미국에서 펼쳐졌던 매카시즘 선풍의 재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김창현, 전 사무총장)

“당권을 잡고 있는 주체파의 환골탈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토론이 가능해야 기대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는 광신자 집단이나 사교집단의 그것에 가깝다. 광신자들은 사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가르고 믿지 않는 자는 대화의 상대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사교집단은 교주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리고 열성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광신자 집단이나 사교집단과 비슷하다.”(홍세화, 전 진보신당 대표)

“당을 깨먹자고 터무니없는 흑색선전을 하고 있는 조승수, 한석호, 김형탁 등으로 대표되는 해당행위자들은 출당조치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까지 안고 갈 수는 없다. 이들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진짜 당을 살리자고 한 것인지, 당을 깨자고 한 것인지 말이다.” (김승교 변호사, 중앙당기위원)

“나침반이 고장 났는지를 보려면 떠는지 안 떠는지를 봐야 한다. 자주파의 나침반은 떨지를 않는다. 한 곳에 고정된 고장난 나침반이다. 어떻게 그렇게 요지부동일까 싶다. 눈 덮인 겨울산에 잘못 들어가면 얼어 죽는다. 길을 되짚어 오는 게 살길이다. 20~30%에 해당되는 조직된 자주파 당원들은 지금 겨울산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앞으로도 고집세우고 그게 신념이라고 군중심리로 가다보면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덕우 변호사, 당대회 의장)

“친북주의 운운하는 자들은 반통일 냉전 수구세력이다. 이들 분파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 친북주의 운운하는 분당세력은 당을 떠나라” (이석행,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도저히 같은 당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심한 얘기들이 오고 간다. 이 과정에서 파국을 막기 위한 절절한 호소들이 이어진다.

“쉰네살이 되어 술도 안마시고 맨 정신에 엉엉 울었습니다. 정말 눈물로 호소합니다. 조금씩 양보합시다. 이 당 깨면 무슨 파 무슨 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도 짝사랑하는 비정규직과 노동자, 농민, 빈민, 무주택 서민까지 다 죽습니다.” (김용한, 경기도당 위원장)

“저는 현재 만 10년 3개월동안 중앙당 상근자로 일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민주노동당에 몸담은 이후, 지금과 같이 참담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며칠째 제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바람직한 당 변화와 혁신을 통해 당내 자민통 그룹과 평등파 그룹의 기형적이고 불안한 동거상황을 발전적으로 청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민주노동당파로 당 혁신특위를 구성, 상설화시켜 주십시오.” (송태경,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정책실장)

“저희들이 관객이 아니 주체로서 당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십시오.”(마포지역 평당원 24명)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고 있었다. 나는 자주파가 일보 양보하여 난항 끝에 비대위가 구성된 다음에는 <전진>의 논의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신당을 작심하고 준비하던 한석호, 조승수, 홍세화 등은 이를 비웃기라고 하듯 2008년 1월 15일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추진위원 40명의 명단을 발표한다. 40명 중 24명이 <전진> 사람들이었다. 선도탈당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소위 ‘선도탈당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발족식

“혹자는 민주노동당이 아무리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당 대회에서 해산을 결의하자는 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오히려 현재의 역사적 상황과 대중의 요구에 대해 너무 무지하거나 철면피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다.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 대면하고 대결하자. 죽어서 다시 태어나자. 우리의 모든 것들을 용광로 안에 집어넣어 새로이 벼려내자. 우리는 결연히 과거의 시체놀음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생명의 길, 새로운 진보정당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비대위를 통해 2월 3일로 예정되어 있던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전에 이미 그들은 루비콘 강을 건너고 있었다.

비대위의 무산과 탈당

분당 파동은 민주노총도 흔들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원은 후원회원등을 합쳐 100,355명이었다. 당원만 79,764명이었고, 민주노총 조합원 당원은 32,320명이었다. 민주노총만 중심을 잘 잡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파의 대립을 완화시켜야 할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던 이영희조차 자주파의 편을 드는 마당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가 없었다. 민주노총 정치위원회에 가서 싸운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범 자주파로 불리는 세력이 민주노총도 장악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안의 ‘민주노동자 전국회의’라는 정파는 “2월 3일 당대회는 분열분파주의 세력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당을 사수 혁신하기 위한 당 대의원동지들의 결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 당 분열에 앞장섰던 조승수 등에 대해 전체 당원의 이름으로 출당할 것을 최우선적으로 결의하여야 한다.”고 지침을 내린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파국을 막기 위해 당시 다른 연맹의 정치위원장들과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한다. 금속노조 우병국, 사무금융연맹 이두헌, 서울본부 장현일 정치위원장 등이 함께 했다. 비대위를 중심으로 당을 쇄신하자는 호소였다.

“우리는 지난 17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동자와 국민들이 따가운 회초리를 휘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는 애정과 기대를 담은 아픈 회초리입니다. 민중들과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처절하고 뼈아픈 자기반성과 자기 혁신을 하라는 것이 지난 대통령 선거의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의 몰락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시 민주노동당이 일어나 노동자, 민중들의 희망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절망하고 실망하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파국을 향한 기차는 서로 죽일 듯이 마주보고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엔 더 이상 동지가 없었다. 마지막이 되어 버린 2월 3일 대의원대회 장소에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삭막했다. 각자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피켓으로 들고 서 있었다.

자주파1

중앙위 회의장 앞에서 조승수 등 징계를 요구하는 자주파 학생들 피켓팅

심지어 민주노총 정치위원회의 간사 역할을 하던 상근자조차 자주파를 지지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미 상황은 끝났음을 직감했다. 결국 자주파가 다수였던 대의원들은 비대위가 제출한 ‘일심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두 명의 당원이 해당행위를 했던 것에 대하여 두 당원을 제명하고, 정파등록제를 도입하여 당내 여러 계파들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것’ 등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킨다.

혁신을 위한 방안들도 마찬가지로 부결된다. 민주노동당이 파국으로 끝날 것을 우려하던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한바탕의 소동은 그렇게 끝난다. 비극이다.

그리고 이어 탈당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런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나도 탈당한다. 정치위원장 자리도 내려놓는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민주노동당 당원번호 2번을 자랑으로 알고 살았던 것은 과거가 된다.

당원 번호 1번 최철호 선생도, 3번 오현아도 탈당한다.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영길 위원장에게 진보정당 운동에 앞장서 주실 것을 부탁하면서 “뼈를 묻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뼈를 묻을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청춘을 바친 민주노동당은 이제 역사에만 남아 있다. 물론 내 잘못도 결코 작지 않다.

이런 결과로 뒤이어 진행된 2008년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004년보다 5명이나 줄어든 5명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004년 총선의 13.1%에 못미치는 5.7%를 기록한다. 반 토막이 된 셈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 걸까? 4년이 지나서야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들이 사과한다. 그러나 사과를 한다고 역사의 시계바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분당시기 과정에서 저희 문제의식이 지나쳐서 저의 날선 언어로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던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용서를 구합니다.” (조승수, 2011년 6월 18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 개막식에서)

“당내 정파 관계의 중재자였던 저 권영길은 2007년 대선 경선에 나서면서 중재자의 역할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당내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그것이 분당으로 이르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권영길, 2011년 6월 22일 기자회견문 중에서)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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