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애 죽고, 둘째 애 낳을 때 사연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6]전쟁에도 먹고 살 궁리해야
        2013년 02월 20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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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찾아간 평양에서 낙태를 못해서 다시 서울행

    그때 평양갈 차비를 만들려구 남편 쫓아다니며 그 미치구 똥싸구 댕기는 년, 그 년 기지 두루마기를 훔쳐다가 팔고, ‘멤버’라고 바에서 일하는 새끼들 자게뽁[작업복]도 훔쳐다 팔고, 그랬어. 조바실에다 옷들을 벗어 걸어 놓구 늘어 놓구 그러거든. 내가 청소니 머니 하느라구 늘상 들락거리자나. 그리구 여급이 열댓명이나 되구 멤버들두 많구 했으니 누가 가져가는 줄을 알아? 들킬 염려가 없겠다 싶으니 한 거지.

    내가 원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구 해서 남의 거라면 손두 안데구 그러는 데, 그 집을 헤어날 방법이 없잖아. 기지 두루마기면 그 때로는 최고거든. 그 때 평양서 같이 교회도 다니던 여자 친구 하나를 서울와서 만났었거든. 그 년이 어느 병원에서 간호원을 하면서 근처에서 방 하나 얻어 사는 데, 훔친 옷들을 애기 포대기에다 싸가지구 일단 거그다 갖다 놓았다가 나중에 팔아서 돈을 만든 거지.

    차비를 겨우겨우 도둑질해서 마련해 가지구 평양을 건거야. 같이 평양 나왔던 그 친구하구 같이 간 거지. 그래두 처음 가는 친정이니 거지꼴로 갈 수는 없어서 대마주 옷감으루 치마 저고리 한 벌을 새로 해 입고 가니까, 우리 엄마가 집 나가서 굶지는 않았는가 보다고 그러더라구.

    평양

    1947년경의 평양의 전경(출처는 국가기록원)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나 임신한 거를 알아보더라구. 머 숨소리가 다르데나 머래나. 3개월이니 배도 안부른데 다 알아내더라니까. 엄마도 그제야 알고 아버지 모르게 난리 버거지를 치는 거구.

    그 때 임신만 아니었으면 평양에 그대로 눌러앉는 거였는데….사실은 그 때 평양서 간호사하는 친구가 있었거든. 걔를 찾아가서 애를 떼고 그냥 평양에 눌러 살려고 서울서 챙겨갈 거를 다 챙겨서 간 거였어. 엄마야, 애 밴 거니 애 땐 거니를 알더라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근데 그 간호사 친구가 그 병원을 그만둔 거지. 그루구는 어디 더 애 때는 걸 알아볼 새도 없었어.

    며칠 있지도 못 했어. 내 친구도 재취갔던 그 서방이 혹 찾아올까 조마조마 하고, 나도 징용나갔던 전남편이 돌아와 시골 집에 살고있다는 말을 들었어. 오히려 찾아올까봐 겁이 나더라구. 우리 집에서 50리 길이니 나 온 거를 아직 알 리가 없지만, 우리 집 근처에 그 시아버지 다섯째 첩 아들이 살고 있었거든. 내 신랑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였어. 지네들 엄마끼리는 넷째첩 다섯째 첩이니 서로 질투를 하는가 어쩐가 몰라도 두 배 다른 형제는 아주 죽구 못살게 친했거든.

    그 사람이 나 온 거를 보고는, 형님한테 안가겠느냐고 묻길래 “곧 가야지요.” 하고 답을 하고는 난 속으로 애가 탔던 거지. 금방 그 신랑한테 소식 들어갈텐데 당장이라도 차 잡아타고 찾아올까봐 서둘러서 그 밤으로 다시 도망나온 거야. 잠깐 갔다 금방 다시 서울로 온 거야. 배가 불러오니 오래 있을 수도 없었고. 머 간장을 둘러마시면 애가 떨어진다구 해서 그걸 사발루 들이마시구 했는데도 안떨어지더라구.

    그래서 또 급하게 그 밤으로 그 친구하고 도망치듯 내려 온 거야. 두 번째 내려올 때는 그년이 돈을 좀 마련해 왔더라구. 그 돈으로 내려왔어. 그렇게 서울 시누네로 다시 와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십 개월 만에 죽었어.

    이 때다 싶어 아예 평양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혼자 하고 평양 갈 차비를 만들어야겠다 하고 있는 데, 애 죽은 그 달에 또 애가 들어선 거야. 그게 지금 하나 있는 그 아들이지. 스물 둘에 지금 하나 있는 아들을 낳은 거야. 결국 임신 때문에 또 발목이 잡힌 거지. 그 때 애를 떼는 방법을 알고 평양 갈 차비 만들 방법이 있었으면 당연히 때고 평양을 갔을거야.

    서방두 그 때는 저 먹긴 싫어두 개 주기는 아깝다구 집 나갈까봐 돈을 안줘 목욕비 말고는…. 그때만 해두 삼팔선 드나드는 게 별 일이 아니었거든. 돈이야 어떻게 마련을 했겠지만, 애 띠는 방법을 아무도 안가르쳐 준거지. 그저 생기면 별 수 없이 낳는 건 줄 알았지.

    첫 애 날 때두 어디 다른 데 가서 낳구 들어왔는데, 두번째루 임신하구 열달 만삭이 다 됐는데, 장사하는 집에서 애를 나면 재수가 없대나 어쨌대나, 바에서 여급하던 여자 하나랑 방을 바꿨어. 바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는 여급이었거든.

    첫 애 낳을 때는 그래도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둘째 때는 나 혼자 낳았어. 진통이 오믄 화장실에두 애를 빠뜨리구 한데니까 화장실 가서 두 배를 올려 붙들구 오줌을 누고 했지. 비는 주룩주룩 오는 데 남편이라구 애 낳을 준비를 하나, 해놓은 게 있기를 해 어째? 나두 일하느라구 그런거 준비할 새도 없었구. 애를 쌀 헝겊이 있어 머가 있어? 혼자 진통을 하다가 빨래 할려구 밀어놓은 빨랫감에다 애를 낳아서 쌌어.

    애 낳구 나니까 남편이 어슬렁 어슬렁 오드니 애 낳아 놓은 걸 보구는 놀래자빠지면서, 그 근처에 외갓쪽 누이가 있대나 머래나, 후다락 뛰쳐나가더니 그 여자를 데려왔어. 그 여자가 보드니 “머 이런 것들이 다 있느냐? 애를 날려면 미리 얘기두 하고 준비도 하구 해야지, 머 이 지랄을 해 놓구 애를 낳냐?” 하면서 야단 난리를 치구는 가세[가위]를 가지고 와서 탯줄을 잘라주더라고. 그리구선 그 여자가 사흘인가 며칠인가를 있으며 좀 봐 줬어. 두 시간에 한번씩 밥이랑 국을 내주는 데 내가 그렇게 먹을 수가 있어? 젖도 모잘랐어.

    시어머니두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들락거리며 봐줬나봐. 근데 그 시어머니 집에두 밥해먹을 사람이 없데나 머래나. 그러구서는 금방 갔어. 그르구는 남편이래는 게 산바라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어. 그 놈두 벌써부터 아편하구 그랬으니까 머 제대루 산바라지나 했겠어?

    (필자) 서방이 마누라 패고 하는 가정폭력이나 그런 건 없었어요?

    (김미숙)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 한번 머가 어때가꾸 귀싸대기를 날리더라구. 내가 그 자리서 당장 짐보따리를 싸서 바에서 일하는 여자 집으로 도망을 갔지. 다시는 꼬라지 안본다구. 그랬더니 누구한테 들었나 그 새끼가 글루 찾아와서는 싹싹 빌더라구.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 안댄다구.

    사람 노릇을 못해서 그렇지 사람이 아주 깡패같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욕도 머 별로 안하는 사람이구. 근데 애 기저귀를 자기가 갈면 머 어느 하늘에 벼락쳐? 자다가도 애 기저귀 속으로 손 넣어봐서 젖어있으면 내 볼을 때리면서까지 깨우는 거야, 기저귀 갈라고. 그런 벼락맞을 새끼가 있어 그래, 쌍놈의 새끼지.

    애가 기어데닐 때나 돼서 다시 누나네 집으로 들어갔지. 누나네 일이야 애 낳고 금방 하기 시작했던 거구. 그러다가 남편이 아편하느라 허구헌날 돈 훔치고 쌈나고 하니까 누나네가 우리를 쫓아냈어. 아예 빠 조바일까지 그만 두게 된거지. 갈 데가 없으니 충신동 시어머니네로 기어들어 갔지 머.

    서대문 영천시장서 물건 받아 사과 행상

    서방두 거의 없이 시어머니하구 한방에서 사는데, 하루는 시어미니가 나를 붙잡아 앉혀놓구는 “애는 놓구,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 그러는거야. “내가 너를 앉혀 놓구 벌어 멕일 수가 없다. 애는 내가 키울 테니까, 너는 너 갈 길을 가라.“ 그러는 거지. 자기 아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땐데도 그런 말을 하더라구.

    그러니 내가 얼마나 기가 막히냐구. 막 태어난 애가 젖 밖에 그 때 먹을 게 더 있어? 젖을 먹어야 살구 젖 없으면 죽는 건데, 그걸 놓구 나더러 시집을 가라니, 내가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저거를 버리구 시집을 가냐? 더구나 이남 땅에 아는 사람두 하나두 없는 데, 이마빡에 ’나 시집갈 겁니다.‘ 하구 써붙이고 있냐?’ 그러면서 못간다구 했어. 아니 머 결혼상담소가 있던 시절도 아니구.

    그러다가 내가 너무너무 기가 막히구 신세가 서러워서 다리 뻗구 통곡을 하고 울었어. 한참을 그러구 통곡을 하고 있으니까 시어머니가 다시 하는 말이 ‘너하고 니 새끼 먹을 거 니가 벌어먹구 살면, 억지루 내쫓지는 않겠’데. 그러니 내가 그 소리 듣구 가만 앉았을 수가 없잖아. 평양서 공장만 다니던 여자가 서울 와서 할 일이 머가 있겠어? 그래서 애를 짊어지고 그냥 시장 바닥을 헤매며 도는 거야. 허구헌날 멀 해먹구 살아야 하나….그 생각만 하면서 시장 바닥을 도는 거지.

    영천시장-1

    그러다가 종로 충신동[당시 시댁 살림집]에서 저기 저 영천고개 넘어서 독립문 옆 영천시장까지 가게 된 거야. 거기서 사과 한 접을 사가지고 머리에 이구 애는 걸쳐 업구, 걸으며 주저앉아 팔며 해서 집으로 오면, 그걸 다 팔아두 쌀 한 되박값이 안남아. 사과두 한 접이믄 백개거든. 그걸 다 팔아도 쌀 한 되박 이문이 안나오는 거야. 그러면 통밀 맷돌에 디리릭 갈아서 한 됫박씩 파는 게 있거든, 그걸 한 됫박씩 사다가 수제비도 해먹고 그랬지.

    시어머니하구 나하구 한 방을 쓰는데, 어쩌다가 서방이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을 자꾸 피해. 지금 애 하나 있는 것도 키우구 살 일이 깜깜한데, 애가 또 생기면 어떻게? 그래서 자꾸 피하니까 시어머니는 나한테 만날 머라 그러는거야. 여편네가 저렇게 무뚝뚝하구 고집 쎄게 부리구 찬바람이 돌게 하니까, 멀쩡한 자기 아들이 바깥으루 돌구 애편이나 하구 사람 못쓰게 됐다 이거지.

    그런 말을 대놓구는 안하는데 하는 말씨나 행동이 그래. 저두 젊어서 애 다섯 혼자 키우구 살며 힘들었을 텐데, 나 힘든 거를 하나두 몰라줘. 아들 꼬라지가 그런데두 지 아들편인 거지.

    아편을 첨에는 담배 피는 걸루 하드니 나중에는 주사 맞는 걸루 하더라구. 첨에는 나 없는 데서 하드니 나중에는 나 있는데서두 하구 그랬어. 첨에는 나보구두 해보라구 그러는데 나야 담배를 못피우니까 할 수가 있어? 담배 속을 다 털어서 버리고 거기에다 아편 잎 가루를 넣어서 피우고는 그 연기를 샘키는 거거든. 그래서 나는 해보지도 않았구 남편만 중독이 된거지.

    팔뚝 혈관 요 굵은 거를 따라서 쪼옥 주사를 놓는 건데, 그러면 요 혈관따라 자국이 쪼로록 생기더라구, 주사바늘 자국이 늘 있었어. 나중에는 혈관 찾을 데가 없으니 아무 데나 찔러. 결국에는 찌를 데가 없어서 죽는데. 지가 혼자 놓는 거지. 끊어볼려구 내가 유치장에두 갖다 넣어보구 했는데, 나오면 그날루 당장 또 해. 처음에는 기분 좋으라구 하는데, 나중에 중독이 되면 안하면 몸이 아파서 못견딘데. 그러니 도둑질이라도 해다가 놓는 거지. 도둑질 댕기다 댕기다 도둑질 할 데가 없어지는 거야.

    전쟁 / 피난 / 아편쟁이 남편의 자살

    나중에 전쟁 나서 그 새끼만 놓구 온 식구가 천안 큰시누네로 피난을 갔었는데, 피난 갔다 와보니까 도둑질 할 데두 없어서 그랬는지, 자살을 했더라구.

    천안 사는 큰 시누도 남의 집 첩이었어. 시어머니가 애 다섯에 혼자 되서 너무 힘드니까 큰 딸을 일가 집에 줬었대. 근데 그 집에서 이 딸을 기생집에 판 거지. 기생노릇 하다가 머 시집을 똑바른 데 가겠어? 기생하다가 남의 집 첩자리를 하나 잡은 거지. 거기서 자식낳구 살구 있는데, 전쟁나서 서울 식구들이 아는 데가 거기빡에 없으니까 피난을 글루 간 거지.

    서울 집에 김장을 가득가득 해놓은 채루 피난을 갔었거든. 작은 시누네, 우리, 시어머니네, 해서 식구가 많으니 김장을 많이 해서 독에다가랑 그릇에다가랑 가득가득 쟁여놓구 별로 먹지도 못하구 피난을 갔었어. 애편쟁이를 데꾸 피난을 갈 수가 없으니까 집에 내뻐려 두구 우리끼리 갔던 거지. 나하구 우리 아들하구 시어머니 작은 시누네까지 모두 피난을 갔었거든. 돌아와 보니까 김장이 하나두 없더라구. 남편이 그거 퍼다가 애편하는 집에 주고 애편을 한거지. 세간도 하나두 없이 다 갖다 없앴더라구.

    남편이 나랑 오년 살았는데 아마 처음부터 애편을 했던가봐. 그 전 만주 있을 때야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지. 결국 자살을 하고서야 아편을 끊은 거지. 천안 피난 가 있는데 큰시누년이 날만 새면 나 들으라구 씨부렁거리구 안달 바가지를 긁는 거야, 머라두 해야 먹구 살지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구, 벌어먹고 살려면 어디 가서 머라도 하라고, 허구 헌날 안달복달을 하는 거야.

    전쟁 난리루 죽어 나가는 사람이 숱한데 머 얼마나 천년만년 살겠다고 그렇게 살 방도를 찾으라는 건지. 그리구 내가 앉아만 있었어? 허다 못해 나물이라도 뜯어야 된장국이라도 끓여 먹잖아. 나물 캐서 반찬 해주지, 나무까지 해다가 불 때지, 집안 일 다해주지, 나는 하느라구 하는 데두, 앉아서 놀기만 한대는 거야. 지네꺼 축내나 해서 안달을 하는 거지.

    근데 내가 그 천안바닥에서 멀 할 수가 있겠냐구?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서울 가봐서 장사를 할 수 있으면 하겠다구 하구, 전쟁통에 애 업구 혼자서 사흘인가 매칠을 걸어서 서울을 다시 온 거지.

    와서 보니까 옆 방에 살던 식구가 피난 내렸갔다가 다시 와 있더라구. 그래서 “우리 애 아범 봤어요?” 하니까, 그 집 남자가 “글쎄… 매칠 전에 봤는데 요즘은 통 안보이네요? 인기척이 없는걸 보니 어딜 갔나?…..” 그러드라고.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죽지도 않고 있느냐?”구 그냥 아무 뜻 없이 욕을 마악 하면서 우리 방엘 들어갔는데, 아~ 글쎄 남편 같아 보이는 사람 하나가 아랫목에 떠억 하니 자빠져 누워있는 거야. 깜짝 놀래서 ‘악~’ 하구 소리를 지르구 뛰쳐 나온거지. 소름이 쫙 돋드라구. 괜히 무서운 느낌이 확 들면서 다시는 들어가기가 싫은 거야.

    그러자 그 옆 방 남자가 그래도 아주머니하구 나하고 들어가 보지 누가 들어가겠느냐고, 들어가 보자구 들어가 보자구 하더라구. 그래서 그 집 방에 한참을 앉아서 놀란 걸 가라 앉히구 들어가 보니까, 언제 죽었는지 벌써 상했더라니까.

    요만한 약봉다리가 있더라구. 그리고 원래는 글씨가 상당히 얌전한데 여엉 삐뚤어진 글씨로 쓴 편지를 벽에다가 붙여 놨더라구, 그니까 숨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쓴 유서지. 자기 어머니한테 쓴 건데 ‘우리 성*이 잘 부탁합니다.’ 그러구 ‘제가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머 그런거야. 지 엄마랑 새끼 얘기나 있지 나한테는 한마디도 없어.

    무섭고 놀라서 정신이 없으면서도, ‘이제야 끝났구나.‘하는 마음도 한편에서 들더라구. 하여튼 당장 송장을 치워야 될 거 아냐.

    그 때는 전쟁 때구 하니 송장이 천지야. 옆방 사람이 알아봤는지 동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거적대기 말아서 구루마에 싣고 가더라구. 남산 어디 치우는 데가 있다더라구. 내가 따라갈려 그랬어. 나중에 식구들 오면 어디다 묻었다고 얘기라도 해얄 거 아냐. 근데 그 싣구 가는 사람들이 못따라오게 해. 나중에 자기네가 다 얘기해 주겠다고. 그래서 따라 가지도 않았어. 어디다 묻었나도 모르고, 한번 가보지도 않았어.

    (필자) 저대로는 처참하게 갔지만 그래도 그 서방 일찍 죽은 길에 어르신이 더 고생 안하구 좀 자유롭게 산거네요. 서방 오래살구 새끼 자꾸 만들구 했으면 더 힘들어졌을 거잖아요.

    (김미숙) 나두 새끼 자꾸 만들까봐 따로 방 쓰구, 그놈이 잘 들어오지도 않구 그래서 거의 따로 살다시피 한 때두 많았지. 시집도 일본 놈들이 버리고 간 집 하나 주워서 여러 집이 사는 거니, 시어머니랑 모두 한 방에서 살구 해서 서방 살았을 때도 내가 피하기가 좋았지.

    6.25 전쟁 중에두 평양 갈 생각을 못했어. 첫 애 죽었을 때는 그 김에 평양 가야겠다 싶었었는데, 둘째까지 낳고 나서는 이상하게 평양을 갈 생각을 못하겠더라구. 갈래믄 그 때두 가는 방법은 있었거든. 근데 애를 버리고 갈 수가 없더라구. 처녀루 집나온 년이 서방도 없이 애만 데꾸 기어들어갈수두 없구.

    친구가 국방색 몸빼 바지를 하나 얻어다 줘서 입었는데 하도 그거만 입으니 다 닳아빠져서 거기다가 꺼먼색 천을 여러 군데 대고 기워서 입었어. 내 꼴을 들여다보니까 참 너무너무 한심한 거야. 어릴 때부터 직장 다니면서 옷도 비싼 거만 입었었거든.

    어느 날 동네에 옷감 장사가 들렀어. 그래서 있는 돈 긁어서 바지 하나를 사 입으면서, ‘내가 이놈의 바지 다시는 안입는다.’ 하고 하나밖에 없던 그 헌 바지를 아궁이에 넣어버렸어. 놔두면 또 나무하러 가면서랑 입을 거 아냐? 그리고 그 때 ‘내가 다시는 기운 옷은 안입는다.’하고 혼자 속으로 맹세를 했어. 근데 맹세하고 나서는 정말루 기운 옷은 안입게 되더라구.

    그래서 그랬는지 내가 옷 욕심이 많아서 늘 옷은 반듯하고 좋은 걸로 입고 살았어. 나중에 양색시 옷장사하구 양키물건 장사하구 미군댄스홀 다니구 했으니까, 옷은 그래도 잘 입었었어. 얼굴은 안이뻐두 몸매는 늘 딱 지금하구 똑같게 살이 없으니까 옷맵시는 났었거든. 그러니까 옷 입는 맛이 그래두 있었든 거지. 내 평생 살이 쪄본 적이 없었어. 난 살찐 여자들보면 미련하구 게을러보여.

    전쟁 때 국방군이고 인민군이고 미군이고, 여자들은 동네에 군인들만 나타나면 다 무서워서 숨어살았어, 세수도 일부러 안하구. 군인들이 여자를 겁탈한다는 소문이 많았거든. 여자가 군인한테 겁탈당하구 죽었다는 이야기들도 많이 돌았어.

    이북에 있을 때도 쏘련군이 여자들 겁탈한다는 둥, 여럿이 그래서 여자가 자살을 했다는 둥, 소문도 많았지. 그 전에는 일본 놈들이 또 여자들 뽑아다가 군인들 노리개로 보내더니, 어쨌든 전쟁 나면 여자들은 맨날 군인들한테 당하는 거지. 이쪽 군인이든 저쪽 군인이든 미군이든 쏘련군이든 일본군이든 모두 마찬가지지 머. 어느 쪽 군인이든 다 무서워.<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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