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평화를 보다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10]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평화
        2013년 02월 20일 11: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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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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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밀린 숙제를 하듯 강정에 들른 건 사실 얄팍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고 평화도서관을 만들자는 취지에 동의하여 책을 보낸 사람으로서 갖게 되는 아주 적은 분량의 의무감, 스스로를 향한 위로의 다른 이름.

    강정은 제주 남쪽 끝에 있었다. 내가 강정에 도착했을 때는 해군기지사업단 정문 앞에서 숙식을 함께 하는 평화지킴이들과 마을주민들이 마침 점심을 나눠 먹는 시각이었다. 선뜻 다가가지도, 쉽게 떠나지도 못한 채 길 위에서의 그 소박한 식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어쩌면 그저 속 편하게 구경이나 온 낯선 행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내게 평화지킴이들과 주민들은 식사부터 하라며 식판을 내주었다. 얼떨결에 한 일도 없이 밥을 얻어먹고 나니 겸연쩍고 송구했다. 하지만 그 밥의 힘으로 나는 식후에 있었던 백배 올리기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었다.

    구럼비63

    노순택의 사진.사진가 노순택은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의 기록을 담은 책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공동 저자다.

    나중에 들어보니 백배 올리기는 일회성이 아니었다. 아침 7시부터 매시간 백배씩 하루 천배, 그렇게 한 달을 이어서 3만배를 채우는 긴 여정이었다. 한겨울의 칼바람 속에서 ‘세계평화 백배 선언문’에 맞춰 50여분 간 느린 속도로 백배를 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한 번의 백배가 끝나면 겨우 10분 남짓 쉬었다가 또 다른 백배를 시작해야 한다. 단 하나의 열망, 오직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평화,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당장의 이익이나 내 안위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가치인지도 모른다. 길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절을 올리다가 연행되어 구속되거나 벌금형을 받는 강정 사람들을 보며 어리석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낮은 자세로 몸을 웅크려 땅에 이마를 맞대는 그 비폭력적인 백배와 백배로 강정의 평화는 지켜질지도 모른다. 철저한 사전조사도 없이 큰 규모의 공사를 밀어붙이고 공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벌을 내리려 하는 그 태도를 묵인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의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우리는 지난 5년 간, 우리의 그런 무지와 무관심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절망을 가져왔는지 똑똑히 지켜보지 않았던가.

    제주의 강정, 그 길 위에서 당신과 내가, 당신과 당신이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난다면 좋겠다. 어색한 듯 쭈뼛거리면서도 식판 하나씩을 무릎에 올려놓고 웃으며 식사를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기적은, 그렇게 올지도 모른다.

    조해진 : 소설가. 200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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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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