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들, 투쟁의 전면에 나서다
    [아빠의 현대사-54] 이전에도, 지금도 이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
        2013년 02월 19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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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력의 가치를 제일 인정받을 때가 대학 졸업 전후인데 이때부터 살인적인 취업난 때문에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취업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학졸업을 앞둔 사람들이 말이죠. 저희가 몰랐듯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는 거죠. 대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서 얘기 나누고 싶어요. 하루 20시간씩 공부하고 해외 연수를 다녀오고 어떤 노력을 해도 이미 이 사회구조 속에서는 40% 정도의 인원만이 정규직이 될 수 있습니다. 생존권과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개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인데 공부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죠.

    어떤 것이든 잘못된 사회 문제를 푸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흑색선전과 호도를 막고 대중과 함께 하려면 아직 내 문제로 다가오기 전에, 사회에 나가기 전에 자신이 설 땅 자체가 없는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민세원 KTX 지부장과의 인터뷰 내용 중, 2006년 11월 23일 레디앙)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울산에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평택에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전주에는 택시노동자가, 혜화동 성당 종루에는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하늘로, 하늘로 노동자들이 올라가고 있다. 땅에서는 두발 붙이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하늘사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005년 벽두부터 12월 31일자로 계약해지된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사내하청노동자 180명이 투쟁을 시작한다. 지금도 철탑에 올라가서 투쟁하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노조들은 그 때도 파업도 하고, 집회도 했다. 그들은 2004년 9월에 불법파견을 인정받았고, 2010년 대법원에서도 승소했지만 현대그룹이 정규직화를 거부하여 지금도 싸우고 있다. 도대체 몇 년이나 더 싸워야 하는 걸까? 법을 지키라고 이 강추위에 높은 철탑에 올라야 하는 노동자들! 그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하늘사람들

    87년 이후 노동자 역사에서 가장 먼저 집단적으로 ‘하늘사람’들이 된 것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었다. 1990년 4월 28일 오전 6시 정각, 앞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최루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73개 중대 1만여명의 경찰병력이 불도저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민주노조를 깨기 위함이었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선무방송을 하고 바다에서는 군함을 통해 미포만으로 진입하는 ‘미포만 작전’이 실시되기 바로 전날, ‘외로운 늑대’들이 골리앗 크레인위로 올라간다. 내가 울산에서 만났던 김형광, 허동욱 등 78명이었다. 그들은 높이 80미터 상공에서 13일동안 투쟁했다.

    그러나 그것은 87년 이후를 얘기하는 것이고,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고공농성의 시초를 연 것은 여성노동자였다. 평양 평원고무공장에서 일방적인 임금삭감를 반대하며, 1931년 5월 29일 아침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강주룡이라는 여성노동자가 우리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경찰의 탄압을 피해 ‘하늘사람’이 된다.

    노무현 정부와 비정규직

    노무현 정부가 공식출범하던 날, 그동안 공언해 온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국정과제에서 삭제한다. 비정규직 문제도 적극시정 대상에서 제외하고 별도의 보호 조치를 만들겠다고 한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한 얘기다.

    그러더니 2006년 말,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비정규직 법’을 통과시켰다. 이어 2007년 공공부문이 앞장서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시행했다. 왜 비정규직들이 그토록 반대하고, 민주노총이 총파업까지 했던 법을 노무현 정부는 통과시켰을까? 그 이후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은커녕 더 악화되고 있기만 하다.

    내가 일하던 공공연맹은 각종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합소와 같았다. 이미 518일을 투쟁했던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들, 이용석 열사가 분신까지 한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 노동자들, 66일 동안 파업투쟁을 전개해야 했던 산업인력공단비정규직노조 등 수많은 투쟁이 있었다. 여성들이 주로 싸운 상징적인 투쟁 몇 가지만 보면서 이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경찰청고용직 노동자들의 투쟁

    “형님, 아무래도 올려가야 할 듯 합니다.”

    “알았어요. 아무튼 다치지만 않게 하자구요.”

    직책 대신 형님이라 즐겨 부르는 곽노충 조직국장이 말했다. 그 한마디면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투쟁 전술에 대해서는 거의 일임했다. 그만큼 곽노충 국장을 믿었다. 경찰의 허를 찌르는 전술이 많았다.

    혹시 너희가 기억을 할까?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경찰들이 광화문 일대를 경찰차를 동원 벽처럼 쌓은 적이 있다. 명박산성이라고 했다. 그 때 시위대들이 일제히 사다리를 가지고 나타나 차벽을 넘었던 적이 있다. 이제야 말하지만 곽국장의 작품이다. 알루미늄으로 된 긴 사다리를 사야한다고 할 때 이미 고공농성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기억으로는 강주룡이후 처음으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하늘사람’이 된 경우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서 말이다.

    2005년 3월 21일 오전 7시 30분 직권면직 철회를 요구하며 96일째 민주노동당사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던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동조합 조합원 3명은 서울 서대문로터리에 위치한 높이 32미터 교통관제탑으로 올라간다. 각 경찰서에서 수십년을 일해 온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연말 직권 면직시킨 터였다. 경찰청은 개별적으로 일용직으로 재임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다 공개경쟁시험을 통해 89명을 기능직으로 신규채용 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댔다.

    경찰청고용직연행

    경찰청고용직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경찰특공대가 진압하는 모습

    그래도 해결이 안되자 이번에는 9월 6일 오전 6시 50분경 다시 노동자 5명이 여의도 공원에 있는 20미터 높이의 교통관제탑에 오른다. 사실 여성들이 고공농성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일해서 그랬는지 정말 겁도 없이 잘들 올라갔다. 워낙 잘 싸워서 경찰을 만났을 때 여경으로 특채하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이실장, 경찰을 투입할 수밖에 없어”

    “심한 것 아냐? 자기 경찰서에서 십여년간 업무를 보조해 주고, 심지어 양말도 빨기까지 하면서 온갖 일을 다 한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당연히 전환하지는 못할망정 이제 강제로 진압한다고? 그러니까 짭새라는 얘길 듣지!”

    여의도 커피숖에서 만난 고위직 경찰과의 면담도 소용없었다. 3일째 되는 날 경찰로부터 특공대 투입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2005년 9월 8일 오후 3시 20분경 소방차 3대와 500여 명의 경찰병력은 관제탑을 에워싸고 헬기를 투입했다. 조합원들은 그 높은 곳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하나둘 에어매트 위로 떨어져서 연행되기 시작했다. 분명 특공대라고 했는데 하는 짓이 워낙 어설퍼서 위험했다.

    결국 문정영 부위원장이 에어매트가 없는 땅으로 바로 직각으로 떨어졌다. 놀라서 뛰어갔다. 커다란 불상사를 예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에어매트 옆 맨땅에 떨어지다가 다행히 현장에 있던 경찰과 부딪치는 바람에 생명을 건졌다. 늑골이 네 개가 부러졌다. 왜 경찰 하나가 그 밑에 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덕분에 죽지 않았다. 경찰청 고용직 노동자들은 이처럼 일 년 가까이 투쟁한 이후에야 부분적으로나마 정규직이 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연대, KTX 비정규직 투쟁

    혹시 오미선이라는 언니가 기억이 날까? 네가 중학교 3학년 방학 때 엄마는 너희들을 위해 생협 강당에서 특강을 준비했다. 당시 미군기지 이전 반대로 한창 싸우던 평택 매향리 주민, 이주노동자, 그리고 KTX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그 때 KTX 오미선 언니가 왔었다. 뒤에 지부장을 맡아 투쟁을 정리하고, 남자도 힘든 40미터 높이의 조명철탑에 올라가 투쟁을 한 사람이다.

    ktx오미선

    KTX 오미선지부장(오른쪽)과 대화하는 필자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800일이 되었어요. 처음 3기와 4기 후배들이 일했던 시간보다 파업했던 시간이 더 많다고 했는데 이제 1기인 우리도 그렇게 되었어요. 2004년 4월에 입사해서 2006년 2월 28일까지 일하고 3월 1일부터 파업을 시작했어요. 결국 우리도 일했던 시간보다 투쟁했던 시간이 더 많아진 거죠. 오늘 문득 그 생각을 하는 데 점점 KTX 승무원이라는 이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어요.”

    2008년 메이데이가 열리던 날 나는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에서 오미선 지부장을 인터뷰했다. 언론에 싣기 위해서였다. 380명이 투쟁을 시작했지만 60여명만 남은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2년전인 2006년 초부터 투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함께 투쟁을 하면서 친해져서 2006년 11월, 나는 당시 민세원 지부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이미 그때 5번의 공권력 투입에 4번의 연행이 있었고,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 간부에 대해 7천만 원, 조합원 35명에 대해 3억 손해배상, 그리고 7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었다. 첫 만남도 민세원 지부장의 수배를 도와 내가 잘 아는 집에 숨어 있다가 민주노동당으로 옮길 때 운전을 하면서 만났다. 그녀는 8개월 동안 수배상태이기도 했었다. 투쟁을 하면서 이십대의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삼십대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KTX는 2004년 4월 1일 운행을 시작한다. 그녀들은 선진국을 상징하는 KTX와 함께 탄생했다. 그녀들의 제복은 전문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습으로 상징화 되었으며, 많은 여성들의 꿈이 되기도 했다. 하늘이 아닌 땅위의 스튜디어스로 불리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의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407명의 노동자 전원은 파견직에 계약직 노동자였다. ‘한국철도유통’이라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철도공사에 파견되어 일하는 것이다. 물론 입사 당시에는 1년단위 고용이지만 정규직화를 약속했고, 정년보장과 준공무원 대우를 말하기도 했다. 철도공사는 승무원 1인당 한 달에 248만 5천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승무원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평균 150만원이 안되었다. 그녀들에게 주5일 근무는 물론이며 생리휴가도 남의 일이며, 육아 휴직은 도입되지도 않았다. 결국 철도공사가 싼 맛에 부려 먹으려고 직접고용이 아닌 불법적인 하청을 한 셈이다.

    KTX고공농성

    KTX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모습

    그녀들은 개통한 지 1년 반만에 해고통보를 받았다. KTX승무원들이 적극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펼치자 전체 승무원들을 대상으로 “재계약 여부를 우편으로 통보했다”는 선별 재계약과 해고 통보를 한 것이다. 2005년 9월의 일이다. 그렇게 투쟁은 시작되었다. 그녀들이 안해 본 투쟁이 있을까? 국회헌정기념관에서 농성하다 전원이 연행되기도 하고, 목에 사슬을 걸고 투쟁을 하기도 하고, 단식투쟁도 하고, 청와대 진격투쟁도 한다. 여성들이 삭발도 한다. 급기야는 나와 인터뷰를 한지 불과 몇 달후인 2008년 8월 27일 새벽 5시를 기해 오미선 지부장을 비롯한 5명의 여성들이 높이 40여 미터의 조명철탑에 오른다.

    이런 투쟁의 결과 서울고등법원은 철도공사가 실질적인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이어 2008년 8월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는 철도공사 자회사인 철도유통에서 해고된 KTX 승무원들의 실질 사용자는 철도공사라고 판결했다. 아울러 본안판결 확정에 이르기까지 “매월 15일에 180만 원씩을 각 임시로 지급하라”는 결정도 내린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대법원 판결과 함께 아웃소싱, 사내하청, 용역업체 등 각종 편법을 동원한 비정규직화가 모두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린 중요한 내용이었다. 오랜 투쟁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공사는 출근을 거불하고 매월 돈만 지급하고 있다. 지금도 말이다. 그들은 지금 모두 다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민세원은 지금 원하던 대로 천안에 있는 모 종교단체에서 교육팀장을 하고 있다. 투쟁기금을 위해 양말을 팔면서 ‘아름다운 연대’라고 썼던 것을 같이 팔던 총무부장 이도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고, 오미선은 갓 낳은 아들을 키우며 산다.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 투쟁대책회의를 하고, 500일 되는 날에는 투쟁 문화제 사회도 봤었다. 내 기억에는 마지막 집회 사회였다. 그 인연으로 가끔은 연락을 주고받는다. 투쟁을 했던 모든 사람들이 가끔은 보고 싶다.

    KTX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800일을 넘게 싸울 때 사장은 이철이라는 사람이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이다. 아빠의 사촌형이 그때 같은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인가 “돌아온 사형수”라는 선거 포스터를 보고 호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박정희 시대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정규직 문제에 끝내 눈을 감고 사장을 그만둔다. 이철 사장은 아주 힘들고, 어렵게 만든 합의서를 다 써 놓고 조인하기로 했는데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까 지나고 하자”고 하더니 선거후 돌연 사퇴해버린다. 이철 사장의 말을 믿고 조합원들은 어느 역으로 갈지 조정하고, 연봉도 각 지부별로 팩스가 가기까지 했다. 당연히 방까지 얻은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원위치 되었다. 덕분에 KTX 승무원들은 지금도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책임을 회피한 사람으로 기억해 두자.

    “이철 사장은 사람의 인권과 노동자의 인권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인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투쟁을 시작했던 민세원 지부장의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마사회 회장으로 있던 이우재라는 사람도 기억해 두자. 과거 민중당 대표로 있던 사람이다. 그 역시 불법파견으로 인정이 된 경마진흥회 간부들의 복직을 거부했고, 긴 투쟁 후에야 마침내 이길 수 있었다. 노동자의 삶이 엉망진창이 된 후에 말이다. 진보적 가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닌 셈이다.

    음독자살까지 기도했던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일병원으로 쫓아갔다. 다행히 자살미수에 그쳤다. 2007년 6월 22일의 일이다. 정수운은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잡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995년 성신여고 행정실에 입사해 12년간 별탈 없이 계약을 이어가던 정수운에게 학교는 2007년 1월 해고 통보를 한다. 그해 7월의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근속년수가 오래된 비정규직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계약해지를 통보받았다. 정수운은 학교측에 해고가 부당하다고 항의했고, 학교는 한 달만에 해고를 철회했다.

    그러나 비정규직법 시행을 하루 앞두고 또다시 해고통보를 받았다. 비정규직보호법이라고 노무현 정부가 억지를 부리는 그 법 시행에 앞서 그 법 때문에 학교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다.

    “그렇게 말 많던 대통령이 비정규법 때문에 비정규직들이 해고돼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고 그녀는 울부짖었다. “비정규직을 내 자식에게 또 물려줄 수 없다는 간절한 어미의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끝까지 싸우겠다.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가 일했던 그 현장에서 일하게만 해달라는 것이다. 죽고 싶다. 그러나 다시 학교로 돌아갈 때 까지 죽을 수 없다.” 던 그녀는 결국 10월 투쟁으로 복직된다. 그러나 성신여고는 계약기간이 2년이 되기 직전인 2009년 6월 15일 다시 해고한다. 학교비정규직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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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비정규직 정수운씨(왼쪽)의 모습

    학교 비정규직 노조는 2004년도 8월 21일 결성되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정부의 공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공부문에서 대량해고가 일어난다. 2년 이상의 장기근속 기간제 노동자에 대한 해고, 외주화의 확대, 계약기간을 1년 미만으로 축소하는 등의 온갖 편법이 난무했다. 특히 학교비정규직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는 조리종사원 6명 중 1명을 짤라야 한다며 당사자들끼리 제비뽑기를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신임교장에 대한 예우로 차 접대에 필요한 아가씨를 채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2년 동안 지각한번 하지 않은 성실한 노동자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기도 했다. 중계동 상명여중 교무보조로 일해 온 김경화씨의 경우다. 그녀는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런 세상이었다.

    또 하나 여성노동자들이 51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투쟁했던 이랜드비정규직 투쟁도 있었다. 2007년 여름 비정규법 시행에 즈음해서 시작해서 2008년 가을까지 뜨겁게 싸웠던 투쟁에 대해서는 따로 보는 게 좋겠다. 유통업계 최초로 3차례나 행해졌던 매장점거투쟁과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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