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뜨 표범단의 등장과 좌절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불가촉천민 투쟁, 왜 좌파진영에서 배제되었나(2)
        2013년 02월 18일 11: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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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격한 토지개혁을 기치로 걸면서 불가촉천민의 계급성을 주장하던 인도공화당은 왜 분열하고 결국 퇴조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주 의미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회의당이 간디의 하리잔 운동을 무기로 그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간디는 그들을 하리잔 즉 ‘신의 사람’으로 부르자며 그들에게 온정주의를 펼쳤다. 사회 경제의 측면에서 볼 때 정책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레토릭 뿐이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배제되면서 살아 온 그들에게 간디의 위로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반면 인도공화당은 토지개혁과 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그 주도권을 인도공산당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이 내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불가촉천민 자신들에 대한 혜택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회의당이 집요하게 불가촉천민의 지도부를 공략하였다. 힘 있는 여당만이 불가촉천민의 사회적 위치 개선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가촉천민들은 자신의 처지를 공감해주면서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기득권자 회의당을 선택했다. 카스트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개량에 더 많은 믿음을 준 것이다.

    교육 받지 않은, 게다가 조직화 되지도 않은 인민들은 사회가 아무리 그들에게 시련을 준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들이 내는 것은 기득권자들의 목소리일 뿐이다. 우리는 지난 18대 대선을 통해 그 역사가 한국 땅에서 또 일어났음을 다시 한 번 목격하지 않았는가?

    영국 시대 때부터 보상 정책의 일환으로 일정한 쿼터를 받은 불가촉천민은 암베드까르 같은 지식인과 사회적으로 출세한 인물을 상당수 배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15%의 보상 할당제는 불가촉천민 출신이지만 보상 정책 덕으로 교육을 받고, 재산도 모아 출세한 일부 엘리트에게 돌아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회의당의 인물 끌어 들이기는 집요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인도공화당은 결국 그 지도부가 대거 회의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그들은 회의당의 논리를 설파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힘 있는 정부 여당으로 붙었고, 불가촉천민 대중은 그들을 자신의 지도자로 삼아 그들을 추종했다. 그 추종이라는 것의 열매는 절대로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독립 후 불가촉천민은 1인 1투표제라는 막강한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방 선거나 중앙 선거에서 인원 동원을 노리는 일부 주요 정당과도 제휴하였고 그 결과 절대적으로 유권자가 많은 그들의 정치 권력은 갈수록 커져갔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 권력을 지향하는 대중적 정당 운동으로 궤도를 잡게 하였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변혁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하였다.

    결국 이는 불가촉천민 집단을 하나의 집단 정체성에 의존하여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삼는 정당으로 위치 짓게 하였다. 이것은 좌파가 추구하는 사회 변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주체가 하층 계급이라 해서 그들이 하는 정치가 좌파 정치일 수는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한국에서의 18대 대선을 지내고 보니 이 역사가 참 가슴 아프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논리와 정책으로 빈곤층, 서민층, 노동자에게 다가갔으나 그들은 진보진영에게 심한 반감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처지가 오늘과 같게 한 주역인 새누리당에게 몰표를 주었다. 진보진영은 오로지 논리와 정책으로만 정치를 할 뿐 그들을 위로하는데 소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노조는 새누리당이 주장한 귀족들의 모임이고, 지식인 중심의 진보 정당의 현란한 논리와 달변은 자신들을 윽박지르는 주체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와 서민이 스스로 떠나가는 상황에서 진보 진영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정책도 중요하지만, 정책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 좋은 정책에 그들이 마음을 공감해주는 감성 운동 또한 중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은 감성의 정치를 수준 낮은 정치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 가지고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은 세계 정치사 모든 곳에서 다 찾을 수 있다.

    암베드까르의 저항 운동에 기반을 둔 달리뜨 정당 인도공화당은 암베드까르가 그랬듯이 위로부터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그 정당의 기반이 허약하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근거지인 마하라슈뜨라에서도 모든 불가촉천민을 규합하지 못한 채 주로 암베드까르의 카스트인 마하르(Mahar)를 중심으로 정당이 조직되었다. 따라서 그 조직이나 체계가 전국 정당으로 발전하기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인물 빼가기에 봉착하면서 당이 분열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인도공화당이 분열된 상황에서 맞이한 1970년대는 새롭게 20대에 접어든 일부 청년 세대의 불만이 크게 축적되었다. 일부 지도자급 인사들은 고위 관직으로 출세를 하지만 그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인민들을 속이는데 혈안이 될 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변혁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었다.

    달리뜨 표범단

    1974년 달리뜨 표범단의 포스터

    그들의 주장은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흑표범단(Black Panther)라는 이름으로 흑인의 인권 향상과 경제적 지위 개선을 위해 싸운 운동권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어 달리뜨 표범단(Dalit Panther)라는 이름으로 급진적인 저항 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달리뜨 표범단은 달리뜨의 범주를 전통적인 불가촉천민뿐만 아니라 토지를 갖지 못한 농업 노동자, 빈농, 부족민 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지주, 자본가, 대금업자, 관료 등을 적으로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공동체주의와 카스트주의를 비호하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한다.

    특히 회의당은 힌두 봉건주의를 옹호함으로써 근본 원인으로서의 토지와 물질 문제를 호도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에 대해 심하게 비판을 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1957년 께랄라에서 처음으로 공산당이 집권에 성공했을 때 이미 공산당은 혁명을 주장하는 정당이 아니고, 대의제 안에서 권력을 획득해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부르주아 정당이 되고자 하였다. 폭력을 통한 사회 혁명은 바람직스럽지도 않고, 인도 같은 봉건 사회 내에서는 수행해낼 능력도 없음을 독립 전후의 시기에 터진 뗄랑가나 봉기 때부터 이미 경험한 이후 노선의 대강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러한 공산당의 노선을 보면서 달리뜨 표범단은 그들이 하는 짓은 오직 의석 확보를 위한 권력 투쟁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비판은 그 공산주의자와 좌파 진영이 카스트 체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심하게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불가촉천민의 해방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촉천민이야말로 경제적 착취는 물론이고, 사회적 문화적 배제와 소외를 여전히 당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힌두 사상에 기반을 둔 간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독립 운동과 독립 이후 그 노선을 이어받은 사회주의적 사회와 하나의 민족 국가 건설을 주창한 회의당의 노선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치 아래 혁명 노선을 내걸었던 달리뜨 표범단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강한 마하라슈뜨라 지역에서 선거를 보이코트 하는데 집중을 하였다. 다당제 상황에서 대부분의 주요 정당들은 그들의 표가 절실히 필요하였지만, 달리뜨 표범단은 자신의 표 가치를 최대한 올리기 위해 선거를 보이코트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특히 혁명을 포기하고 일신의 영달과 개인의 출세를 위해 회의당과 연합하여 의석 차지에 혈안이 된 인도공화당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인은 그 표를 온전히 포기할 수 없다.

    회의당 지도부는 달리뜨 표범단 지도부를 줄기차게 회유하였다. 약한 고리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조직원들이 처한 법적 문제와 바닥을 드러낸 재정 문제였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 그러면서 지도부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이념과 전략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었다.

    한 쪽은 달리뜨 표범단을 카스트와 계급을 묶어 달리뜨를 하나의 착취당하는 노동 계급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투쟁 방식도 급진적이어서 유혈 투쟁을 포함한 총체적 투쟁을 통한 무산 계급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반면 다른 쪽은 초기 지도자였던 암베드까르가 걸었던 불교로의 개종에 기울었다. 그들은 암베드까르의 유지를 이어 받아 공산주의자를 불순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유혈 투쟁을 선호하지 않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달리뜨의 해방을 놓고, 한 쪽에서는 사회 혁명을 주장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자기 혁명을 주장한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온건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탓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교육을 오랫동안 받아 온 사실과 관계가 깊다. 이로서 달리뜨 표범단은 심각한 내홍을 겪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의 분열을 거치면서 조직은 와해되고 결국 그 존재 자체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달리뜨 표범단이 세력을 잃고 내홍에 빠지면서 카스트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힌두 카스트와 달리뜨 간의 충돌이 자주 벌어졌고, 항상 달리뜨는 구심점이 없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뜨들은 순간적으로 폭동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고 곧바로 상층 카스트들의 보복에 시달려야 했다. 보복은 항상 폭행, 강간, 살인 등을 통해 전개되었고 그 때마다 달리뜨들은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달리뜨들은 평화적 시위를 통해 기득권자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점차 그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서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투쟁은 1980년대 북부 인도로 옮아가면서 또 다른 양상을 맞게 된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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