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퍼뜨리는 언론이 되길 바라며
[서평]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민음사)
    2013년 02월 17일 0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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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포털 사이트 메인을 언제나 도배하고 있는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에 불쾌할 때가 많습니다. 호기심이 생겨 클릭해보면 여지없이 예측 가능한 저속함이 반겨주는 그런 기사들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이따위 글을 쓰며 돈을 버는 인간들’을 욕할 수도 있고 ‘대체 누가 이런 저열함을 즐겨서’ 이런 기사들이 돈을 벌 수 있는가를 궁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불쾌한 마음으로 어떤 기사들을 보던 어느 날, 한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은 ‘즐기는 누군가’가 아니라 ‘클릭하는 나’들이 이 기사들의 응원군이라는 것입니다. ‘클릭하는 나’의 파괴력은 상당해서 누군가에 대한 인신공격도, 자극적인 사생활 침해도, 유언비어도 퍼질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세상엔 호기심이 생겨도 주목하지 말아야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작가 뵐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놀랍게도, 아니 ‘불가피하게도’ 이 이야기 속에 묘사된 저널리즘은 앞서 말한 우리 언론의 모습과도 닮아있습니다.

카타리나

자세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자수성가한 착실하고 성실한 가정부인 주인공은 댄스파티에 가서 괴텐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댄스파티가 끝난 후 둘은 함께 카타리나의 집으로 가서 사랑을 나눕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괴텐이라는 자는 탈영범이자 횡령범으로 경찰의 집중 수사 대상이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사랑하는’ 괴텐의 도주를 도와주게 되고 공범자로 낙인 찍혀 경찰의 수사를 받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카타리나와 괴텐 사이의 모든 우연은 계획이 되어버립니다. 신문사인 《차이퉁》은 범죄자가 아닌 혐의자일 뿐인 카타리나의 신상부터 사생활, 개인사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왜곡하고, 비열하게 조작하여 보도해버립니다.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는 작가의 후기에서와 같이, 조작되지 않은 사실들마저 거짓으로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선량하고 똑똑한 사람들까지도, 그 보도들을 완전히 불신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정도의 막연한 생각 때문이겠지요.

카타리나의 보도를 전담한 퇴트게스라는 기자는 병상에 누워 있는 카타리나의 어머니에게까지 페인트공으로 위장하여 접근합니다. 얼마 후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세상을 뜨게 되고, 퇴트게스는 다시 딸의 저속한 행적 때문에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다며 카타리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사를 보도합니다. 카타리나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트게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섹스나 한탕 하자’는 그를 총으로 탕탕 쏘아죽이고 맙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카니발 주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상세한 르포입니다. 작가는 여러 개의 웅덩이를 분주히 옮겨 다니며 물길을 내서, 그것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게끔 유도합니다.

표면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면적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작가의 노고 덕에 이 책의 줄거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살인자가 된다.” ㅡ 여기서 ‘살인’은 어쩌면 어느 장르 영화의 극적인 결말일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꽁꽁 숨겨둔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말로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질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혹은 어째서?” 뵐은 작품 속에서 “사실 그것은 잘 들여다보면 신문보도 때문이었다.”라고 직접 답을 내립니다.

또한 이 책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뵐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훨씬 더 명료해집니다. 즉 이 이야기는 언론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명예를 짓뭉개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다른 폭력(카타리나의 기자 살인)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한 것이며, 한마디로 언론의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물입니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이것들이 이미 해석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뵐은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임을 강조하며 심지어는 이야기의 옷을 입은 팸플릿이라 부릅니다. 즉, 골방에 갇힌 작가가 써 내린 ‘소설’이 아니라 너무도 명백한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이며, 심지어는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죠. 실제로 이 이야기는 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실린 역자의 해설을 참고해주세요.)

하인리히 뵐은 생애 내내 시대사의 격변을 거치며 그 시점마다 필요한 ‘이야기’를 써낸 작가입니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을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이 전후 독일 문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 역시 무지가 언어로 표현되어 파급력을 가질 때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살 만한 언어”가 제대로 퍼지지 않을 때 “사람이 살 만한 나라”는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합니다.

어떤 언론의 폐해를 보고서 우리는 역으로 언론의 역할을 알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퍼뜨리는 역할을 언론이 다해내기를 조심스럽게 요청해봅니다.

필자소개
연세편집위 수습편집위원 mizsor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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