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부동산 자본주의
    [서평] 『공산당 선언』(칼 마르크스/ 백산서당)
        2013년 02월 17일 01: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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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주변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려는데, 공산당선언이라는 제목이 굵게 쓰인 표지를 괜히 사람들이 보는 것만 같아 당당히 펴놓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당이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반감을 사는 것 같다. 북한과 김정일에 대한 생각이 곧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적인 시각으로 대한민국을 해석해보는 ‘짓’은 사회학이론 수업에서나 부적절한 오해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 마르크스의 시각을 응용해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의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야기한 불평등과 계급 간의 착취 구조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적’인 자본주의 생산수단이 소수 부르주아에 의해 사적으로 소유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에 따른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적’이라는 수식어는 내셔널리즘적인 의미가 아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적’ 자본주의의 구체적인 맥락은 바로 부동산이다. 부동산 자본은 근 몇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견인해온 지배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공산당선언

    이 곳의 ‘부동산 자본주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내 집 마련’의 평범한 꿈, 즉 ‘근검절약하고 노력하여 저축하면 언젠가는 나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갈 나의 아파트를 마련하리라’는 헤게모니에 기대어 성장해왔다. 그리고 이 ‘아파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부동산 부르주아들과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다수의 사람들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를 향해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 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물론 정확한 비율은 일치하지 않을지 몰라도, 소수 부르주아 계급이 부동산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흡사하다.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을 두 채 이상 소유한 사람은 105만 가구 (전체의 6.6%)이며, 이들이 소유한 총 주택 수는 477만 채로 가구당 평균 5채씩 갖고 있는 셈이다. 같은 해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주택보유현황을 보면 ‘집 많은 사람’ 중에서도 최고 집 부자는 혼자서 1,083채를 소유하고 있다. 또 10명이 5,508채를, 100명이 1만5,464채를 갖고 있다.” 소수 사람들의 대다수 부동산에 대한 소유의 집중화 현상이 매우 심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반면 자기 소유의 집이 없어서 남의 집에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은 “전체의 36.8%, 576만 가구”에 달한다. 이들은 당연히 집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에 덩달아 오르내리는 전세금이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엄마, 우리 또 이사가?’라는 상징적인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던 과거의 전세 대란은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 층의 애환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마르크스가 사유재산의 폐지에 대하여 부르주아지가 반발하자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주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라고 말했다. 즉, 부르주아지들의 사유재산은 부르주아지들이 스스로 벌어들인 재산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현실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사유재산은 파괴되어 왔고, 나날이 파괴되고 있어서 폐지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사유재산의 폐지’는 사실상 부르주아지들의 ‘불로소득’을 빼앗겠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이는 한국의 ‘부동산 부르주아지’에게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부동산은 그 유명한 ‘불패 신화’를 자랑하며 지속적으로 천정부지로 치솟아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부자가 되어있고, 하루 더 자고 일어나면 더 부자가 되어있는 식의 일화가 빈번했다. 부동산을 사지 않은 사람은 ‘바보’ 소리를 들었고, 가진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대출받아 아파트를 분양 받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눈 먼 사재기 열풍은 고스란히 ‘부동산 부르주아지’의 불로소득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부동산 부르주아지’의 탁월한 선택이나 그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낸 소득이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결과라고 보려면, 어느 지역의 어떤 부동산을 구매하느냐의 선택에 따라 부의 축적 정도가 현저히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던 양태는, 먼저 돈이 많은 사람이 어떤 아파트를 사든 무조건 엄청난 이익을 보는 것이었다. 싼 아파트보다는 비싼 아파트의 가격이 오르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 차익도 당연히 훨씬 더 컸다. 말 그대로 자본이 자본을 낳는 시대였다.

    ‘부동산 부르주아지’의 자본을 불로소득에 기반한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더 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붐은 국가의 정책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주택이 가구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국가의 주도 하에 아파트를 대량으로 빠르게 공급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건설기업들에 많은 보살핌이 내려졌고, 이는 현재까지도 막강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건축 재벌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건축 재벌들은 현재 굉장히 특수한 형태로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친절한 미분양’ 5화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든 건설회사가 건설해 준 대가로 건설비용의 한 5% 정도의 이익을 얻으면 굉장히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하는 건데 노무현 정부, 지난 2005년 이후에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분양해서 얻은 이익은 5%가 아니라 200%, 300%의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윤을 남기는 정도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수준이다.

    “집 한 채당 수익이 워낙 크기 때문에 집을 다 못 팔아도 건설사는 어차피 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건설 회사들은 무분별하게 아파트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잉여 수익은 마르크스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자본주의적 권력의 시작점이다.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아파트를 분양하는 제도 안에는 ‘착취’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를 분양 받는 절차는 대부분 주택청약통장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달이 얼마 정도의 돈을 적금하여 특정 수준으로 주택자금이 모이면 이제 주택 분양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충족시킨 것이다. 원하는 아파트의 분양권을 받기 위하여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야 했을 정도로 한때 주택 청약의 열기는 뜨거웠다. 1순위, 2순위 등의 순서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진 기회의 다음 순서는 다시 ‘뺑뺑이’로 일컬어지는 추첨 형식이었다. 이 과정을 거쳐 청약에 성공한 ‘행운’의 가구는 이제부터 건설사에게 앞으로 몇 년 간 매달 일정한 양의 돈을 입금한다. 이 돈을 모아 건설사는 아파트를 지을 것이다. 미래에 내가 들어가 살게 될 상품을 위하여 지금부터 차곡차곡 돈을 내야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보통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사는 방법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소비자들은 기본적으로 상품을 보고 고를 수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상품들은 구매 즉시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소비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미래에 사게 될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건설사들이 자금이 부족하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건설사들은 자본이 여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진 집을 사며, 외국의 건설사들이 취하는 이윤의 정도 또한 비교적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을 ‘팔아서’ 이윤을 얻는 ‘대한민국적’인 방법은, ‘사람들의 기대’ 혹은 ‘꿈’과 같은 추상 물질 또한 상품화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악질적인 특성을 가진 ‘네오자본주의’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특수한 형태의 부동산 문화는 새로운 형태의 ‘착취’로 분석될 수 있을 듯하다. ‘부동산 부르주아지’는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를 직접 눈에 보이는 형태로 ‘고용’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노동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거둬들이는 방법을 터득했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이 어떠한 형태인가에 구애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고용에 대해 적정 수준의 임금을 줘야 하는 책임’을 벗어버렸다.

    또한,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부동산 부르주아지’에게 자신들의 노동의 이윤을 꼬박꼬박 주면서 그 과정이 모두 자기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원하던 그 ‘상품’은 – 물론 평생에 가까운 세월이 걸리지만 – 결국에는 ‘나의 것’이 된다. 사회 전체는 이런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부추기며, 언젠가는 내 집을 마련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희망의 사다리를 걸쳐 놓는다. 계급 이동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유지시키는 것이 지배계급의 지배를 더 오래도록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썼다. ‘착취’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필요로 하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유지시키는 노력을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그것은 적정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는 것을 뜻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사람들의 ‘내 집 마련에 대한 꿈’을 놓지 않도록 응원하는 것을 뜻한다. 인생의 목표가 마치 나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인 마냥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들면 ‘부동산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계급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진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대한민국의 50대다. 선거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들은 부동산 정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보다는 ‘부동산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 사실 ‘부동산 부르주아지’의 몰락을 만들어내고, ‘부동산 프롤레타리아트’가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내 집 마련의 평생적 소원’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집’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사적인 소유가 아닌 공간에서 정착할 수 없고, 설움을 당하기 때문인데,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설움을 당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내면 된다고 말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현재 유럽에서는 자기 집이 없어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국민의 50% 정도가 민간임대주택에 사는 셈인데, 주기적인 전월세값 폭등을 경험한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여간 불안한 주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독일의 전반적인 주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안정되어 있다. 집값은 물론이고 임대료도 안정된 편이며, 특히 민간임대에 거주하더라도 굳이 내 집을 사야 한다는 압박감이 적은 편이다.”

    나와 더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자면, 최근 서울시에서는 집을 가진 독거 노인들과 집이 없는 청년을 연결해주는 프로젝트를 소규모로 우선 시작했다.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적은 대가로 괜찮은 집에 살 수 있고 노인들의 경우 잔심부름을 맡길 수 있는 동거인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가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협동조합에 대한 주목, 사회적 기업 붐과 공유 경제의 다양한 실천들은 ‘가을’이 완연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살기 때문에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을 아직 잘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것에 나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같이 이상적인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내가 공유경제나 협동조합을 보는 방식이 여전히 수익구조의 자립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보면 내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만큼 보고,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려 한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 그것의 일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문헌>

    김수현. (2011). 부동산은 끝났다. 서울: 오월의 봄.

    손낙구. (n.d.). 집 많은 놈, 집은 있는 놈, 집도 없는 놈. 2013년 1월 20일 검색, http://blog.ohmynews.com/balbadak/?page=38

    친절한미분양팀. (Director). (2012). 서민제한구역 미분양벨트 in 경상도[Documentary]. 대한민국: 친절한미분양팀.

    Marx Karl, and Friedrich Engels. (1989) The Communist Manifesto (남상일 역). 서울: 백산서당. (원서출판 1848).

    필자소개
    학생. 연세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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