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서울와서 발이 묶인 사연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5] 명동 근처 본정통에서의 삶
        2013년 02월 15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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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서울 놀러 와서 발이 묶임

    (필자) 해방돼서 평양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다들 마음도 들뜨고 했을테고 어르신도 나이가 십대말 이십대 초반이니 사회 돌아가는 것도 좀 잘 알고 하셨을텐데.

    (김미숙) 글쎄 해방이 되자마자 내가 서울로 온거니까 머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그 때 쏘련군이 여자들 겁탈한다는 소문이 자고 일어나면 또 들리고 그랬어. 젊은 여자고 늙은 여자고 안가리고 그런다는 거지. 종자가 다르니까 나이 구분을 못하는건지 어쩐지. 우리 오빠가 쬐만한 라디오가 하나 있어서 그걸 종일 틀어놓고 그랬는데, 거기서도 맨날 어디서 쏘련군이 여자를 겁탈했다느니 하는 뉴스가 연짱 나오는 거지.

    나도 한날은 전차를 타고 대동강을 넘어오는데 조수가 와서 ‘저기 저 쏘련놈이 누나 강탈한다구 불끄래요. 그러니까 대동강 넘자마자 슬쩍 문 열어 줄테니 신발 들고 죽어라고 뛰어 도망가세요.“ 그러더라구. 그러더니 증말 대동강 딱 건너자마자 정거장도 아직 멀었는데 전차를 천천히 운전하면서 차 문을 열여주더라구. 얼른 내려서는 신발을 벗어들고 막 뛰었지 머…. 아주 징그런 놈들이야.

    해방되니 주변도 들썩거리고 나도 마음이 들떠있고 좀 그랬지. 게다가 서울이랑 이남이 살기 좋다는 소문도 들리고. 서울 화신백화점에 가면 없는 게 없이 서양 물건들도 많다고 하고 소문이 자자하구.

    그러는 중에 내 친구 하나가 서울을 가자고 꼬드기는 거야.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는데, 집이 가난하기도 하고 정신대 피해서 해방 직전에 애가 넷 있는 집 재취자리로 시집을 간 친구였거든. 그러니 걔가 무슨 재미가 있었겠어? 그러다 해방도 되고 하니 걔가 마음이 들떠 멀리 도망갈 생각을 했던 거지.

    그 소리를 들으니 나도 서울을 가보고 싶더라구. 징용 간 서방도 곧 오면 나도 당장은 다시 시집으로 들어가야 하니, 언제 서울 구경을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엄마한테 서울 놀러 가겠다고 말을 한 거야. 서울가면 없는거 없이 좋은 것도 많으니 봐서, 이것저것 사오겠다고 하면서.

    그 때 마침 우리 언니가 친정에 와 있었어. 그리고 내가 서울 다녀오겠단 말을 듣고는 엄마한테 나 주라고 백원(백원인지 만원인지 자꾸 혼돈하심.)을 줬어. 언니가 자기 시집갈 때 나한테 아무 것도 못해줬다고 늘 미안해 했거든. 그러니 서울 가면 사고 싶은 거 사게 하라고 엄마한테 돈을 맡겼던 거지. 그 때 백원이면 큰 돈이야. 그런데 엄마는, 모처럼 언니가 친정에 와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집을 비우면 되겠냐고, 언니 가고 나서나 서울을 가든가 하라고 못가게 말리는 거야.

    그런데 내가 또 한번 가기로 마음이 뜨면 그렇게 주저앉아져? 말나오면 당장 해야 하는 게 내 성질이자나. 그래서 그냥 내가 모아놓고 있던 돈만 가지고 나왔어. 그게 백원이었나 삼십원이었나 그래. 그 친구한테도 객지 나가면 돈 밖에 믿을 게 없으니, 돈을 챙겨가지고 나오라고 여러 번을 얘기 했지.

    (필자) 에구…. 그때 조금만 참고 평양에 계셨으면 나중에 그 신랑각시가 같이 서울 구경을 오든가 그랬을텐데.

    (김미숙) 그러니까 말야. 내가 그 기다리지 못한 죄를 평생 받고 사는 거구나 생각도 했었어…. 그 때 생각으루야 잠깐 서울 와서 놀고 얼른 평양 들어가, 신랑하고 같이 평양으루 이사와서 살려고 했던거지. 생긴 것도 그렇구 성격도 그렇구, 집 재산도 많고. 내가 내 복을 차버린거지….

    (필자) 그러게요. 그런 생각도 많이 드셨을만 하네요~ …. 그래두 머 살아놓구 나서 이럴껄 저럴껄 껄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살았으면 또 무슨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그것도 모르는거구. 게다가 어르신 나름대로 여기 와서 고생은 하셨지만 평생을 열심히 자유롭고 당당하게 사셨으니 잘 사신거지요.

    (김미숙) 그 친구네 시집 대문이 커다란 나무 대문이었거든. 그 문을 열면 “끼이~익“ 하구 소 우는 소리가 나자나. 그래서 그 대문을 ”소소리 대문“이라고 하는 데, 그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낮에 대문에 물을 많이 쳐 놓고 밤에 도망을 나왔어. 그렇게 도망나온 그 애랑 평양역에서 만나 서울로 향한 거지.

    차가 있으면 타고 없으면 그냥 걷고 하면서, 타다가 걷다가 하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여자 둘이 온 거야. 한 일주일이나 걸린 거 같애. 겁도 없었던 거지.

    나는 스물한 살이고 걔는 스무 살. 그 집이 그런대로 괜찮은 집이라 돈을 좀 넉넉히 챙겨 왔으려니 했어. 나중에 갚을 생각을 하고 백원 정도는 빌릴 생각까지 한 거야. 아. 그런데 그년이, 돈을 하나도 안가지고 나온 거야 글쎄. 오다보니 그걸 알게 된 거지. 그러니 나도 돈이 넉넉지 않은 데, 내 돈으로 다 써야 하잖아. 그런다고 그년을 버리고 혼자만 갈 수도 없고.

    둘이 여관에서 여러 날을 자며 서울까지 오기는 왔는데, 차비랑 먹는 거랑 해서 돈이 다 떨어진 거야. 그년이 고장난 시계 달랑 두 개를 들고 나왔더라구. 지 깐에는 그거 팔아서 돈을 만들려구 했던가 봐. 고장난 시계를 누가 사냐고 글쎄…. 더구나 지가 내 돈을 다 썼으면 지년이 나서서 시계라도 팔아보려고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그런 주변머리도 없어. 그러니 내가 얼마나 속이 터져. 돈이라도 있으면 당장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더라구.

    만일 언니가 준 그 백원이 있었으면 그 때 그 돈으로 평양으로 돌아갔을 거야. 돈이 없어서 오도가도 못하고, 처량하게 서울에 붙들린거지. 갈 돈두 없고 앉은 자리에서 쓸 돈두 없고. 나두 나지만, 우리 어머니가 나 기둘리면서 돈 더 줄 걸…. 그 백원 줄 걸…. 하고 후회 많이 했을거야.

    그 때 우리처럼 평양서 서울 오는 남자들 둘이 또 있었어. 평양 역전에서 만나서 내동 둘둘이 같이 온 거지. 근데 나는 말도 좀 억쎄게 하고 그러자나, 근데 내 친구 년은 입뚫린 벙어리야. 입은 뚫렸는데 말을 하나도 안해. 갑갑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죽겠는거야.

    두 남자 중 게나마 좀 나아 보인 남자는 나를 좋아하고, 장똘뱅이 같이 생긴 다른 한 놈은 내 친구를 좋아했는데, 내 친구는 또 그 남자가 마음에 안들었고, 나를 좋아하는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거야. 그 년을 좋아하는 장똘뱅이 그 놈이 밤이면 과자랑 머랑 해서 잔뜩 사오는데, 그년은 또 입도 안대고 말도 안하고 그러네.

    내가 이래저래 속이 터지고 화가 나서 깜깜한 밤중에 혼자 바깥으로 나와 한참을 있는 데, 그 년하고 나 좋아하는 그 남자하고, 나를 찾아 나왔더라고. 그 남자가 나를 달래는 거야. 무서운 세상인 데 둘이 형제라며 같이 다니지 않고 여자 혼자 나와 있으면 어쩌냐고, 들어가자고. 그년이랑 나랑 언니 동생이라고 말했었거든.

    그러면서 세상 무서운 줄 알라는 뜻으루 자기 오야봉이 자기네 둘한테 했다는 이야기도 하더라구. 큰 여자는 니가 데리고 자고 작은 여자는 그 장똘뱅이 같은 놈더러 데리고 자라 그랬대나 머 어쨌대나. 큰 여자는 나고 작은 여자는 내 친구 년을 말하는 거지.

    그래도 머 어떻게? 그년하고 떨어져 버릴 수도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 방 하나 잡아놓고 나는 그냥 돌아 다닌 거지. 내 인생에서 젤 기가차고 처량하고 불안했던 때인 거 같아. 어렸으니까 얼마나 더 그랬겠어? 나중에 미군부대 양색시 옷장사 들어가서 보니까 거기 양색시들이 그 때 나랑 비슷한 처지였드만. 그러다가들 어려서 미군부대 근처로 먹구 살려구 들어온거지. 나는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 있는 거는 알았지만, 놀러 잠깐 내려온 서울에서 그런게 어딨는지 알게 머야? 몰라….알았다면 그때부터 글루 들어갔을 지도 모르는거지, 사람 일이란게 모르는 거지.(스무살에 서울에 내려와서 겪은 당혹감과 단절감과 불안을 구술하며, 김미숙은 차후에 구술할 “기지촌에서의 삶”과 연관짓고 있었다. 김미숙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스무살의 단절을 이후의 고난과 특히 기지촌 삶의 전조로 해석했을 수 있다.)

    어느 날 아마 청계천인가 싶은 데…. 개천에 가서 막막하고 한심한 마음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데, 아 글쎄 옛날 만주 언니네 건너편 집에 있던 남자 중에 지질이 못난 박색 남자 하나가 거기를 지나가더라구. 그 남자가 나를 좋아했었는데 나는 본체만체 했었거든. 다른 남자들 다같이 놀러나가도 그 남자만 안나가고 언니네 집을 건너다보고 앉았던 사람이야.

    근데 워낙 지치고 막막해서도 그렇겠지만 낯선 서울 땅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화들짝 반갑더라구. 그래서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한 거지. “어디 가시냐구? 여기 사시냐구?“ 반가워하며 말을 걸었더니, 그 남자도 놀라면서 ”아이구 서울서 이게 웬일이냐고….그러지 않아도 기무라(연변서 기차역까지 따라나왔던 남자의 일본식 이름)하고 자기하구 내일이나 모레 평양으로 나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다’“고….이렇게 만나는거 보니 기무라하구 나하구 정말 인연이라나 머라나….한참 수선을 피우더라고.

    그러자 당장 내 입에서 ‘기무라상은 어디 있어요?‘, 그 소리가 나오대. 워낙에 막막하니까 그랬나봐. 그러자 그 남자가 나를 어디 중국집인가로 데리고 가서 기다리게 해놓고 한참 있다 그 기무라를 데리고 왔어. 그렇게 해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거지.

    본정

    본정1정목 경성우체국 앞 사진(출처http://blog.naver.com/s5we?Redirect=Log&logNo=150050984635)

    그 사람은 봉천서 나와서는 천안 큰누네네 있다가 서울 명동 근처 본정(1914년 4월 1일부터 중구 충무로 일대에 붙여진 길 이름. 당시 본정은 1정목에서 5정목까지 있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명칭을 개정할 때 우리 명현・명장의 이름을 따라 붙이면서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로 개칭되었다.)에 있는 작은 누나네로 와 있었던 거야. 작은 누나가 본정에서 바를 하고 있었거든. 그 때 생각으로 돈만 있으면 그냥 여관에 있을 생각이었지만, 그 남자가 자꾸 자기 작은 누나네 집으로 들어가제는 거야. 근데 내가 뻗댈 형편이 안되자나….돈이 다 떨어졌으니까. 그 남자가 밀린 여관비를 어디서 얻어다가 내주고 그 길로 그 남자 따라 작은 누나네로 간거야.

    나를 데리구 가서는 다짜고자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누나한테 내가 자기 아이를 임신해서 찾아왔다고 말을 하는 거야. 그때까지 그 새끼 손도 한번을 안잡아봤었거든. 참 기가 차고 억울한 데도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있었더니 그 누나가 “남자는 열 여자 스무 여자가 괜찮지만 여자가 그렇게 몸 함부로 굴리면 안된다.”며 나를 나무라는 거야.

    그리구 머 남자가 소금섬을 매고 물루 들어가라 그러면 들어가야 하는 게 여자래나 머래나. “그래 너희나 그러구 살아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드만 내가 그럴 처지가 아니잖아. 돈은 다 떨어졌지, 사방 천지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그래서 그냥 그 집에 눌러 앉아 버린거지. 그 지질이 박색 못난 남자는 내 친구년만 남은 여관방엘 쥐방울 드나들 듯 들락거리다가 그년이랑 결혼해서 살게 됐었구.

    (필자) 그 때 참 암담하셨을 거 같아요. 이제 막 스무살인 처자가 제대로 준비없이 내려온 서울 여행에서 돈도 떨어져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그 남자 밖에 없고. 단절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얼마나 크셨을지….

    (김미숙) 오죽하면 내가 그 놈한테 기댔을까….물론 그때는 그놈이 그렇게 사람노릇 못하는 놈인지를 몰랐기도 했지만, 거의 생면부지라 할 수 있는 그놈조차도 전에 연변에서 좀 알던 사람이라는 그 인연으로 갑자기 나타난 그 동아줄을 얼결에 붙잡아버린 거지. 썩은 동아줄인 줄을 모르고….

    (필자) 그러게요. 평양을 출발할 때의 호기롭고 호기심 많은 설레임과는 달리, 그렇게 단절된 신세가 돼서 보게 되는 서울은 어르신한테는 너무나 암담하고 두렵게 느껴졌겠지요.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1930년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현대적 경영 형태의 백화점. 1930년대 서울 종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미숙) 원래 구경할려구 했던 화신백화점(和信五十年史(朴興植, 三和出版社, 1977) 요약. 민족자본으로 설립되어 우리 민족에 의하여 경영되었던 최초의 백화점. 1890년대 신태화(申泰和)가 화신상회를 설립. 1931년 선일지물(鮮一紙物) 사장 박흥식(朴興植)이 매수. 1937년 종로 소재 지하 1층, 지상 6층, 총건평 3,011평, 당시 한국인에 의하여 건립된 최대의 건물로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 시설이 구비. 1944년이후 일본강점으로 8·15광복 때까지 물자부족·품귀현상 운영의 곤란을 받다가, 1946년 12월 화신주식회사에서 독립하여 화신백화점이 설립되어 물품판매업·제조가공업·위탁판매 내지 대리업 등 백화점업무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였음. 1980년대 화신백화점운영의 화신산업과 계열회사 모두 해체. 화신백화점 건물도 서울특별시의 종로도로확장계획에 따라 모두 헐림. 이 백화점은 근대적인 규모·시설·조직을 갖추고 합리적으로 경영하여 일제강점기에 한국상업계의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을 뿐더러 전국적인 연쇄점을 개설하고 값싸게 물건을 공급함으로써 중간상의 폭리를 배제하고 유통질서를 세웠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물건을 확보하기 위하여 해외에도 지사를 두는 등 백화점운영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이니 종로니 명동이니 하는 데를 구경할 새도 없었어. 신세가 그렇게 되니 구경다닐 마음이 나겠어? 화신백화점이 너무너무 좋다구 평양서두 소문이 자자했거든. 젤 구경하구 싶은 게 그거였는데 거기두 들어가 볼 마음이 나겠어? 처량한 마음에. 그저 밖에서나 한번 보구 말었지.

    청계천

    1945년 당시의 청계천

    처량하구 한심하게 청계천(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이마저도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말았다.)에 나가있다가 그 평생 웬수 놈의 친구를 만나서 그렇게 된 거지. 그때 청계천 꼬라지가 꼭 내 심사하구 똑같이 지저분했거든. 근데 글쎄 그 판자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럽게 생각되더라니까, 식구들이랑 모여 살구 있구나….하는 생각에

    결혼과 임신

    남편네 형제는 아들 둘에 딸 셋 오남매였고, 위로 누나가 둘에, 남편은 작은 아들이었어. 시어머니는 다섯을 놓고 애들 어릴 때 과부가 돼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었지. 나는 결혼식두 안하구 그냥 살았는데, 나중에 형이 결혼할 때가 되니까 같이 합동결혼식을 하라구 그러더라구. 내가 싫다구 그랬더니 다들 못마땅해 했어. 큰동서 된 여자가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래는데, 뭐 좋은 구경 시켜준다구 그 결혼식에 같이 서겠냐구, 글쎄….시아주버니가 서른으루 늦은 장가였구 큰동서는 열일곱으로 차이가 컸거든.

    손위 시누이가 본정에서 바를 했어. 명동 근처 어디 번화가를 본정[본정통/本町通][사진]이라 그랬어. 시누이가 이십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노친네의 첩 노릇을 하면서 그 사람 돈으로 바를 한 거지.

    본정통

    경성우체국 본정통길 입구 들어가서 경성은행을 바라보며

    시누하고 시누 남편, 시누 남편이 데리구 온 큰마누라가 낳은 아들 하나가 있더라구. 서울서 대학 다니던 아들인데, 시누하고 두 살 차이 밖에 없었어. 그리구 나하구 남편, 그렇게 다섯이서 한 집에서 산거지. 그 영감은 아예 큰마누라한테는 안가구 여그다 살림을 차리구 사는 거지. 오죽하면 큰마누라가 그 아들한테, “너그 아버지랑 하룻밤만 자구 죽어두 소원이 없겠다….” 그러드래. 별 빌어먹을 소원두 다 있지….

    직장이 없으니 남편이 그 바에서 조바(회계보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말. 여기서는 회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총무 역할을 말하는 듯)를 보고, 나는 시누네 살림집뿐 아니라 바 살림까지도 다 맡아서, 밥해주고 빨래에 청소에 설겆이까지 다 하고 그랬어. “이다바(도마가 놓은 주방 / 요리사 조리사)”[いたば(板場)]라고 주방에서 음식 만들어내는 사람만 하나 두구, 시다니 머니 여럿이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다 시키는 거야.

    하여튼 아침 8시에 일어나면 밤 11시까지 앉아볼 새가 없다니까. 그래도 통행금지가 있으니 11시에는 바 문을 닫자나. 시누년은 첩이라고 엔간이 옷도 갈아입어 쌌지, 하루에도 몇 번을 갈아 입어. 시누랑 그 영감 사이에 댓살 먹은 기집애 하나가 있었는데, 걔는 집을 열 번 나가면 옷을 열 번을 갈아입어대는 거야. 그러니 내가 살만했겠어? 열네살부터 직장다니면서 집안 살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데 그 살림집 일에 바 일까지 다하려니,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월급이 어딨어? 내가 시누한테 돈받은 거는 목욕비 그거 말고는 한 푼 받은 게 없어. 나랑 남편이랑 부려먹으면서도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한 거 말구는 돈 받는 게 없었다니까. 옷도 평양 나올 때 싸들고 왔던 유땡치마하고 사땡치마 딱 두벌, 그거를 그대로 집에서든 바에서든 입고 일을 한 거야.

    그 시절에 평양에서 젤 비싼 옷이 유땡 치마하구 비로도 치마하구 그랬거든. 그른데 옷 하나 해주는 게 없으니 그 비싼 유땡치마를 입구 부엌에서 일을 했던 거야. 게다가 사내래두 위해주면 모르겠는데, 허구헌날 계집질 하구 애편[아편]질하구 댕기잖아. 그러니 내가 당장 뛰쳐 나가버리구 싶었지만, 서울에서 내가 갈 데가 어딨구, 갈 돈은 또 어딨어?

    남편이라고 맨날 12시 통금시간이 다 되어야 들어오던가 아니면 외박이던가 그랬어. 생기기는 멀쑥하게 생겨가지고 노래도 나훈아 남진 저리가라 하게 잘하니, 바의 여급들이 노상 쫓아다니고 그랬지. 그 중에 어떤 년은 머 죽자사자 쫓아다니기도 하더라구. 똑똑한 년은 붙지 않지. 그 남자가 머 볼게 있어서….그 년이 모자르니까 그렇게 남편을 쫓아다니면서 미치구 똥싸구 앉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여자 불러다 얘기했어. “나 저 남자 잡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남자 놓고 여자 둘이서 악쓰고 싸우는 짓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니가 살거면 분명하게 말해라. 내가 나가겠다.” 그렇게 딱 뿌러지게 말했지. 그리고 남편에게도 말했어. “나 아무것도 아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그저 평양갈 차비만 달라.” 그랬더니 그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가 떨어지는 거 같더라구. 모르지 또 뒤로 어땠는지. 어떠거나 말거나 나중에는 신경도 안쓰였어.

    서울 와서 그 남자랑 살기 시작하면서 금세 임신이 됐어. 그러구는 임신 4개월 때 한번 평양을 갔었어. 올 때 같이 내려왔던 그 친구랑 같이 갔었어. 그때만 해도 삼팔선 넘나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거든. <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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