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폐 상견례
    [잡식여자의 채식기]"촌에서 노상 먹는 것이 시래기국에 나물무침인데...."
        2013년 02월 13일 12:0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남자 후배들이 이렇게 말했다.

    “누님이 이렇게 결혼을 빨리 하실 줄은 몰랐어요.”

    서른, 서른에 결혼 하는 게 빠른 것인가? 그 노마들이 내가 시집 못갈 줄 알았다는 말을 그렇게 한 거지.

    그 한해 전에, 그러니까 내가 스물아홉 때, 어떤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다. 너는 결혼 3대 장애인이라고. 게다가 한 지인은 나보고 결혼정보회사 랭킹이 조선족 아래라고 알려줬다. 좀 있으면 나이 서른이지, 키 너무 크지, 학력 너무 높지. 그래서 결혼에 있어 3대 장애를 가졌다는 거였다.

    그렇지. 여자는 모름지기 나이어려 귀연 맛이 있고, 품에 살포시 안기는 맛이 있어야지. 또 적당히 자기보다 덜 똑똑해서 뭔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쏙쏙 먹히려면.. 잘난 줄 아는 여자면 안 돼지. 당근 이런 조건이니 결혼시장에서도 헐값에 똥값이겠지.

    그래, 난 좀 있으면 서른이 되는 모아놓은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집의 장녀요, 키만 큰 것도 아니라 떡대까지 있는 저주받은 몸의 소유자이며, 만학으로 어떻게 기어들어간 학교가 서울대에다 잘난 척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며 백기완, 황석영, 방배추 님을 계승하는 대한(大韓)의 4대 구라가 되고자 하니, 맞다. 결혼장애인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니 내 어찌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 어느 눈먼 총각이 나에게 장가들겠는가?

    이 주제파악은 서른의 나를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하게 했다. 그랬으니 결혼을 했겠지만. 아무튼 그때는 누가, 특히 바지 입은 사람이, 밥을 사준다고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밥을 먹었다. 조건이나 외모는 따지지 않았다. 누가 차를 사준다고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차를 마셨다. 내 취향인지, 말이 통하는지도 따지지 않았다. 비루먹은 낙타가 밥을 사준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차를 마시자고 했을 때도 그랬다.

    요즘 낙타는 자기가 잘 생겨서 내가 자기에게 반해 유혹했다는 어불성설을 유포하는데, 그가 자기네 낙타계에서는 방귀 뀔만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사는 인간계에서는 그닥 쳐줄만한 인물은 못 되었다.

    남자의 기억은 참으로 왜곡이 쉽고, 필요에 의해 사실의 재구성이 능수능란하다. 기함을 하겠다. 허나 낙타가 조석으로 내게 문안인사를 올린 메시지와 끊임없이 전화질 한 통화 목록이 고이 보관된 2G폰이라는 증좌가 있으니 머지않아 이것으로 그의 기억을 교정해줘야 할 것이다.

    상견례를 준비하며 낙타는 채식식당에서 하자고 했다. 나의 가족이 시골에서 올라오시니 동서울터미널 근처의 점잖은 채식식당을 찾으마했다.

    상견례 날은 추운 날이었다. 엄마는 이모와 이모부, 외삼촌 내외가 상견례에 동석하실 거라 했다. 이모부? 이모부는 나에게 집이 가난하니까 많이 배울 생각하지 말고, 공장에 취직해서 돈이나 벌라고 했다. 내가 듣지 않자, 계집애가 어른이 생각하주면 들으라면서, 땅 많은 영농후계자에게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이모부가 그럴 때 마다 화가 났다. 가난하면 꿈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가난하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도 없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늘 이모부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낙타가 그래도 박사공부를 하는 사람이고, 사람됨이 나쁘지 않으니, 이참에 코가 쑥 들어가겠지. 생각만 해도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터미널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이모부는 일이 생겨서 못 오시게 되었다고 했다. 우쒸! 게다가 이모는 얼마 전에 다리 수술을 받아서 몸이 불편하셨다. 붓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은 마음의 소리 등장인물과 같았고, 불편한 다리는 절룩이며 뒤뚱뒤뚱 걸으셨다. 낙타는 분당선 오리역으로 오라고 했다. 외삼촌 내외는 그리로 직접 오시마 했다.

    강변에서 전철을 타고 오리역까지 가는 길. 하필, 한파가 몰아닥친 날, 촌에서 직행버스타고 올라오신, 다리가 불편한 이모는 환승을 할 때마다 “아이구, 아이구”를 연발하시며 “얼마나 대단한 식당이길래 이 추운 날 이 고생시키는지, 한번 가서 구경이나 해보자.”하셨다.

    오리역에서 낙타를 만났다. 낙타는 이든밸리라는 채식뷔페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 사이 외삼촌 내외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참석하지 못하신다고 하셨다. 우쒸!!!!!!!!!!!! 머릿수에서 절대적으로 밀리겠군. 중년 아낙 둘만 모시고 상견례에 들어가는 것은 내 마음을 상당히 위축시켰다. 그래도 뭐 어쩌랴. 이도 내 팔자인 것을.

    이든밸리에 낙타의 가족은 이미 도착해 계셨다. 어르신들은 식사를 하시며,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으셨다. 제 밥벌이들도 못하는 학생들의 결혼이니, 절차는 최대한 간소하게하기로 하셨다. 핵심사항이 원하던 대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긴장이 풀어져 밥을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이모! 이모는 상견례 장소를 누가 구했냐고 물으셨다. 낙타의 아버님의 당황하시는 표정이 보였다. 낙타는 자신이 구했으며, 고기는 건강에 해로워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채식식당으로 모셨다고 대답했다.

    이모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생각해서 장소는 터미널 근처로 했어야지, 노인네들을 전철로 두 시간이나 오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낙타는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채식식당이 여기라,(강변서 두 시간 거리?)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에 이모는 “우리는 촌에서 노상 먹는 것이 시래기 국에 나물무침인데, 직행버스로 두 시간, 전철로 두 시간 와서 먹는 게 고작 집에서 먹는 것만도 못한 밍밍한 국이니 기분이 안 좋다”고 바른 소리를 하셨다.

    채식뷔페

    어느 채식뷔페의 모습

    낙타의 아버지는 오히려 이모의 편을 들면서 아들이 너무 지나치게 채식을 ‘신봉’해서 주변사람까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다고 거드셨다. 낙타는 묵묵부답, 웃는 얼굴은 여전히. 낙타 아버지는 당신도 고기를 즐기시고, 사돈양반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예약한 곳을 와보니 채식식당이어서 놀라셨다고 하셨다. 낙타는 웃는 얼굴로 묵묵부답. (사람 약 올리니?)

    나는 가족들이 상견례에 너무 적게 온 것이 신경이 쓰였었는데. 원래 오시기로 했던 분들이 다 오셨으면, 풀만 먹고 사는 고고한 낙타 덕분에 시아버님만 더 곤혹스러우실 뻔 했다. 이모부였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게다가 그 추운 날씨에 이모 말씀처럼,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음식이나 대접하려고 어른들을 더 모셨으면, 정말 민폐, 민폐, 그런 민폐가 없었을 거다. 안 오신 것이 다행이지.

    낙타가 채식을 전도하려고 만행을 부린 탓에 우리 가족이 적게 참석한 것도, 이모가 선풍기만한 얼굴을 하고 나온 것도, 한 시간이 넘게 늦게 도착한 것도, 별로 신경 쓸 일이 못되었다. 이모는 푸성귀뿐인 메뉴에 젓가락 갈 곳이 없다며 내내 음식타박을 하셨고, 시아버님은 역시 아들 녀석이 채식을 해서 따님을 고생시킬까봐 걱정이라고 앞으로 우리가 먹고 살 것만 걱정하셨다.

    요즘 직장 동료가 상견례를 한다고, 유명한 중식당을 알아보는 것을 보니, 나의 민폐상견례가 생각이 난다. 머릿속에서 빠른 그림으로 영상이 돌아간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못할 것 같았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비루먹은 낙타 한 마리 거둬 먹이며 아옹다옹 살고 있구나.

    필자소개
    ‘홍이네’는 용산구 효창동에 사는 동네 흔한 아줌마다. 남편과 함께 15개월 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느라 집안은 늘 뒤죽박죽이다.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식 생활양식에 맞추며 살고는 있지만, 평화로운 삶, 화해하는 사회가 언젠가 올거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