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줍니까"
    [책소개] 『보안사』(김병진/ 이매진)
        2013년 02월 11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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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이자 ‘이근안’ ―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혹한 어둠의 시대

    2012년 8월 7일, 보안사의 후신인 국군 기무사령부의 불법 사찰 피해자가 자살했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는 비선을 동원해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고, 국가정보원은 선거 개입 의혹에 휩싸여 논란이 되고 있다.

    군사 독재 시절에 견줘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더 일상화된 국가 폭력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다. 가공할 폭력을 동반한 국가 폭력의 시대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탓이다.

    《보안사》는 1983년 간첩으로 조작되고 역이용 간첩이 돼 3년 동안 국군 보안사령부 수사관으로 일한 재일 한국인 김병진이 자신이 겪은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르포다.

    또 한 사람의 ‘김근태’이자 ‘이근안’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경험한 저자가 간첩 조작 사건에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일상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조국을 배반한 간첩이 된 저자 김병진처럼 이 책은 남다른 운명을 타고났다. 《보안사》는 1988년 출판되자마자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아 전량 회수되지만, 2012년 법정 증거물로 채택돼 추재엽 전 양천구청장이 재일 한국인 유지길 씨를 물고문한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되는 등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해의 역사를 밝히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소중한 도구 구실을 하고 있다.

    보안사

    말할 수도 기록할 수도 없던 3년을 오롯이 담은 《보안사》는 지난날의 국가 폭력에 둔감하고 가해자에게 관대한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서빙고 1983 ― 조작 간첩에서 보안사 수사관으로 보낸 3년

    1983년 7월 9일 토요일 오후, 김병진은 퇴근길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됐다. 베테랑 수사관만 모인 수사2계 학원반은 김병진을 두 달 넘게 감금하고서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고, VIP실과 엘리베이터실이라고 불리는 고문실로 끌고 가 폭행, 물고문, 전기 고문을 했다.

    죽음이 곁에 있다고 느낄 정도로 피폐해진 김병진은 자신이 북한에서 교육받고 이적 지하 조직을 구축하려고 위장 유학을 온 간첩이라는 보안사의 각본을 받아들였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집에 감금됐고, 사법부와 언론은 권력의 편이었으며, 동네 통장부터 회사 동료까지 모두 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려고 달려들었다.

    승진과 포상에 눈이 먼 수사관들은 김병진을 이용해 또 다른 재일 한국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했고, 1984년 1월 4일 저자를 아예 보안사 6급 군무원으로 강제 채용했다. 연세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국어학자의 꿈을 키우며 삼성종합연수원 일본어 강사로 돈을 벌어 아내와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아들을 부양하던 평범한 가장이 간첩 조작의 당사자라는 얄궂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걸려든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이 된 김병진은 일본어 번역과 통역 업무를 하며 내부자의 시선으로 간첩 조작의 산실을 지켜봤다. 보안사는 말단 수사관부터 고위 간부까지 실적을 올려 훈장과 포상금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출세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사람, 위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고 호시탐탐 횡령을 꾀하는 사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 직접 고문한 피해자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보안사》는 이때까지 쉽게 볼 수 없던 가해자의 다양한 모습에 더해 가해자 개인이 야만스러운 국가 권력과 상부상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애국과 안보를 위한다는 말은 술자리 흥을 돋우는 구호일 뿐이었고, 보안사는 해마다 100여 명을 불법 연행해서 고문한 뒤 ‘물건’이 될 만한 피해자를 간첩으로 ‘요리’했다. ‘수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간첩 조작은 따로 정해진 매뉴얼이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일상적인 보안사의 업무였다.

    야만스러운 고문과 조작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 결과 수사관은 실적을, 군부 독재 세력은 권력을 손에 쥐었다.

    아무것도 뜻대로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무고한 사람을 간첩이라고 증언해야 했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끝내 외면해야 했으며, 고문당하는 다른 피해자 바로 옆에 서서 통역을 해야 했다. 가까운 이웃도 믿을 수 없었고, 감시와 도청에 시달리느라 마음 편히 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간첩 조작에 일조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모함을 당해 보안사로 끌려온 재일 한국인 유지길 씨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단장과 힘을 합쳐 구출하면서 처참하게 짓밟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기도 했다.

    공소 보류 기한이 끝나자 곧바로 사표를 쓰지만 한참 뒤에야 겨우 보안사에서 빠져 나온 김병진은 1986년 2월 1일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보안사와 군부 독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때까지 아무 곳에도 기록할 수 없던 3년의 기억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적어내려갔다.

    전부 지켜보고 끝까지 기억한다 ― 국가 폭력에 맞선 처절하고 철저한 저항

    간첩 조작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해 국가 차원의 사죄를 하기는커녕 여전히 가해자 중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에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를 모두 담은 《보안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수사관들의 실명은 물론이고 말씨와 외양까지 되도록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주고받은 대화, 전해들은 일화, 진행한 공작의 전말 등 간첩 조작의 진상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황을 모두 종합해 꼼꼼히 되살렸다.

    야만의 역사를 전부 지켜보고 끝까지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폭력과 강압에 짓눌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던 재일 한국인 김병진의 가장 처절하고 철저한 저항이었다.

    이런 저항의 기록인 《보안사》는 결국 법정에서 고문과 조작의 과거를 증언해 가해자의 실형 판결을 이끌어내는 기억의 힘을 보여줬다. 만연한 국가 폭력에 무디어진 우리가 또 한 번 오늘을 내일의 과거사로 만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1988년 출간되자마자 전량 회수돼 세상에 나오지 못한 《보안사》를 다시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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