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된 역사(Still Picture)-1
    북핵과 쿠바 미사일, 도촬의 역사
    한국 현대의 역사 이야기를 시작하며
        2013년 02월 07일 03: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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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 멈춰진 순간의 장면들(사진)을 소개하고 해석하고 설명하는 역사이야기이다. 당연히 한국의 현대사는 한국만의 역사일 수 없다. 거기에 얽히고 설킨 외국들, 특히 미국과의 관계사이기도 하다. 필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다. 필자의 바람은 우리의 머리 속에 새겨져 있는 한국현대사의 배치와 관념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돌아봤으면 하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역사를 감상하고 생각해보는 연재 글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의 독특한 어투는 그대로 살린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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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0월 25일, 유엔안보리 석상에서 미국은 세상을 깜짝 놀래킬 사진 몇 장을 공개했다. 미국의 코 앞, 아니 이건 코 앞도 아니고 아예 콧잔등이라 할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기지에 대한 초고도, 저고도 항공사진들이었다.

    “쿠바에 흔해빠진 야자나무처럼” 보이지 않을까라는 소련측의 기대와는 달리, 사진 속에는 누가 봐도 기다란 인공물을 덮어놓기 위해 연결해놓은 텐트행렬 속에 가려진 소련제 MRBM(중거리탄도미사일)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자선(?)이라 생각해서인지, 흐루시초프는 이 야자수를 닮기 바랬던 MRBM 지원을 ‘왼손도 모르게’ 추진하고자 했다. ‘모스크바에서 익명의 신사가 쾌척!’ 어쩌고 하는 미담(?) 기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이 사건(물론 그는 완전한 배치가 끝나면 쿠바 내 소련미사일 기지의 존재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난 1991년 완전 철수될 때까지 한반도 내 수백기에 달하는 전술핵에 대해 워싱턴 당국이 취했던 정책처럼)은 그러나 당시 미국 항공기술력의 총아였던 U-2기의 위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U-2기의 초고도 항공촬영에서 쿠바미사일기지의 윤곽을 잡은 미공군은, 격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저고도 비행을 통해 고화질사진, 그러니까 훔쳐보기를 좋아하는 모든 변태들의 로망인 ‘초고화질 사진’의 입수에 성공했던 것이다.

    고-1

    (*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 석상에서 쿠바의 소련미사일기지 도촬사진을 설명하고 있는 국방부 산하 사진정보센터(National Photographic Intelligence Center, NPIC) 부국장 데이빗 파커(David Parker) 대령과 아들라이 스티븐슨 미국 대사(우하단의 안경쓴 대머리). 사진 출처는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기록관(관련링크).

    자유를 사랑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자유의 ‘실재’로서의 미국을 사랑하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무제한 군사지원을 해주겠다는 미국의 선언은, 뭐 하도 이런 선언을 남발해대는 바람에 특별히 어떤 한 가지를 꼽기는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트루먼 독트린’으로 퉁치자, 그 뒤 오랜 세월동안 지구본을 정확히 반띵하자는 신호탄이었다. 이 선언으로 미국은 여기저기 자유(미국)를 갈망하는 국가들에게 탱크건 빵이건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사랑을 받고 물질을 주는 것. 뭐 제3자가 보기엔 불륜이나 부정으로 보일 수도 있건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엄연한 ‘자유세계의 알흠다운 로맨스’일 뿐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로맨스란 것이 전염성이 강하다. 소련도 따라하고, 중국도 따라하고. 한데 뉴튼의 중력 제1법칙보다 더 잘 들어맞는 법칙, 즉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니가 하면 불륜”의 법칙을 미국이라고 비껴갈 수 있나? 이 년놈들의 불륜을 두고 볼 수야 없다.

    자고로 흥신소의 경쟁력이란 현장급습 및 증거수집 능력 아니던가. 미국의 ‘로맨스’를 따라하려는 지구상의 모든 ‘불륜’의 현장고발 작전에는 언제나 이런 종류의 사진들이 동원되곤 했다. ‘그 짓’이 ‘그 순간’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사진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어디 있으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무렵부터는 이제 멈춰있는 사진보다 움직이는 영상이 그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유엔 안보리의 복사직원은 미국이 제출한 위성사진을 복사하느라 바빴고, 그보다 약간 뒤인 1993년 2월 22일도 그랬다. 아직도 째깍거리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레이스’가 공식 스타트했던 날, IAEA 이사회 비공개회의가 열린 날에도 어김없이 위성사진이 등장했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주변에 만발하던 북한의 원자로 일대의 건축물 사진들이었다. 여기서 잠깐 ‘영변과 약산’이 나왔으니. . .

    1990년대 중반경의 세계인들에게는, 아마 평양과 서울 다음으로 유명했을 한국의 명소(?)인 영변의 1949년 가을 풍경 한 자락을 구경하고 가본다.

    고-2

    (* 1949년 10월 2일, 영변의 약산. 가을소풍을 나온 순진무구한 중학생들에게 “공산주의라는 콜레라균”을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 확실시되는 김일성의 모습. 사진출처 : 미국립문서기록청, NARA.)

    고-3

    (*1946년 2월 16일, “패전후 처음으로 민정시찰여행에 나선 히로히토 일행이 오사카의 한 피난민 수용소를 돌아보고 있다” 사진출처 : NARA.)

    김일성 뒤에 앉거나 서 있는 남자들. 이 뭐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간에 죄다 짝다릴 짚었네? 훈련소에서 짝다리를 짚거나 군복바지에 손을 찔러넣고 있다가 뺨때기 한 대 안맞아 본 사람들은 잘 이해못하겠지? 아 니미랄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 . . .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북한 군인,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양복남, 지팽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군인, 비석에 한쪽 등을 비스듬히 기댄 군인과 그 바로 뒤에 훔쳐보듯 김일성을 쳐다보는 여군까지. 공장에서 복제된 로봇처럼 딱딱한 표정과 기계적인 동작을 특징으로 하는 ‘수령과 하수인들’이 연출하는 전형적인 장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 풍경 어디에서도 후르시초프적 의미의 ‘개인숭배와 그로 인한 찌꺼기’와 같은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다.

    주한미군 산하 정보기관들이 귀를 쫑긋 세운 채 훔쳐듣던 평양라디오 방송에서는 1946년 여름 무렵부터 “김일성 장군의 지도 하에~~”를 심심찮게 되뇌였건만, 아직 그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우리의 기대치(?)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뭐 이유야 간단하다. 1949년이면 10월까지는 북한정권 내에서 김일성의 지분이 ‘압도적 대주주’가 되기 아직 부족했으니까. 대물림 횟수로는 그쪽과 똑같이 3대째 이어지고 있는 모재벌 총수님께서는 김일성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분으로도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리고 계시는 걸보니 이게 꼭 지분율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김일성에게 가이드라도 하려는 것처럼, 몇 년 앞서 민정시찰에 나선 히로히토 일행이 연출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살아있는 신”의 아우라는 뭐 이래야 한다.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김일성이 이런 걸 ‘전범’ 삼았을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영변의 원자로와 매릴랜드의 ‘도촬 오타쿠’들에게 돌아가보자.

    지금에야 특별한 면허나 허가없이, 구글어스를 통해 몇 초 만에 영변의 위성사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U-2기가 1년 동안 촬영한 것보다 더 많은 소련영토 내의 각종 군사시설사진들을 불과 하룻밤 사이 촬영”할 수 있게 만든 위성 및 광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매릴랜드주 랭글리에 위치한 CIA 사진분석실의 극소수 마니아들이었다.

    “극소수”라는 것이 이 사람들의 가치나 능력을 곧바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을 둘러싼 위성사진 판독 해프닝처럼, 이들이 가진 사진판독 능력이란 것이 그리 특별하지가 않다. 나중에 해명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데, 속이는 자나 그걸 캐내려는 자들의 행동양식은 꽤나 익숙하다. 위성이 상공을 지나갈 때를 기다려 ‘보여주고픈 장면을 연출’하는 수비진영이나, 그런 수비진영의 계산을 역이용하여 위성에 달린 작은 로켓분사장치를 통해 위성의 궤도를 바꾸어 전혀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의 상공을 지나가도록 하는 것.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정기적으로 복도를 순찰하는 감독선생과 짤짤이를 굳이 그 시간에 해야만 했던 학생들 사이의 숨막히는(?) 첩보전의 무대만 대기권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는 기술정보(Techint)학의 ABC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물론 좀 더 복잡한 두뇌활동이 필요한 사례도 있다. 앞서 나왔던 쿠바미사일 위기 당시, 국방부와 CIA의 사진분석 전문가들이 쿠바 내 소련기지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 사용된 추론이다.

    U-2가 찍어 온 항공사진 속에 야구장 없는 군사기지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스트로 없는 쿠바보다 야구 없는 쿠바가 더 불가능한” 쿠바의 군사기지에 야구장이 없다?

    결론은, 다이아몬드형 운동장이 없는 군사기지는 소련군의 시설물이다!

    고-4

    (* 야구없이 살 수 없는 민족은 하바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해를 함락시킨 직후 상해 외곽의 국민당군과의 전투 중 짬을 낸 일본 군인들이 야구시합을 하고 있다. 저 뒤의 유격수는 ‘불규칙 바운드’를 피할 수 없으리. 1937년 12월 1일, 상해. 사진출처 : <New York Times>)

    CIA 역사상 최고요원이라 평가받던 사람의 정의에 따르자면 “아이비리그를 졸업했으면서도 선술집 건달들과의 주먹싸움을 피하지 않는 인재들”이어야만 한다던 냉전 전사들의, 반공(반소)전선의 맨 앞 열에서 냉철하면서도 용감무쌍한 첨병이 되어야 할 이 최정예 정보기관원들의 논리연산법이 귀엽기는 하다.

    기술개발이야 과학기술 발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지, 분류-종합과 분석-비판과 같은 대뇌활동의 발전은 나선형이건 직선형이건 지속적인 상승곡선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일종의 착시현상과 같이, 정보판단을 위한 데이터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지만 이 정보의 바다에서 진실을 읽어내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보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비밀작전으로 대표되는 CIA의 활동 가운데 어떤 것이 최우선이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1980년대 CIA 개혁 논쟁에서 ‘분석’을 보다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특히 이 점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분석가들의 정보판단보다 ‘정보 수요자들’ 즉 정책가들의 ‘욕망’이 더욱 중요했던 “이데올로기의 전장”에서는 불가피하기도 했다. “정책에 대한 정보의 종속” 문제는 갈수록 많아지는 정보의 양과 함께 분석가들을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니 요원들이 거의 아이비리그 졸업생들로 충원되던 40-50년대와 달리 “랭글리에는 더 이상 명석하고 총기가 넘치는 분석가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CIA의 자기비판은 좀 과도하다. 음지에서 추천과 비추 버튼만 클릭해 대는 고역에 비하자면,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은 훨씬 중요하고 또 가치있는 도전과제일 수 있다.

    그것이 기호이건 이미지이건 간에 데이터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혹은 그것을 읽어내도록 만드는 힘은 누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기호와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고정된 실재(reality)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그 기호와 이미지들을 마주하는 자의 의지나 능력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생성되는 일종의 ‘산물(by-product)’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이 문제는 우리 현대사의 몇 가지 장면들을 ‘정지된 이미지(still picture)’를 통해 다소간 경박하게(?) 되짚어보려는 이 연작글의 의도와도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영변과 북핵’이라는 골치 아픈 주제에서 벗어나려는 워싱턴 당국자들마냥, 필자도 영변이야기에서 자꾸 엉뚱한 데로 새는 경향이 있다. 다시 돌아가자.

    1993년 2월 22일 비로소 알려진 북한 핵시설에 대한 위성사진들은 무려 10년 이상이나 CIA의 창고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미국의 정찰위성이 영변 인근에서 야리꾸리한 사진들을 도촬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4월부터였으니 말이다. 그 동안 이 정체불명의 시설물들이 원자로임을 직감하던 분석가도 없지 않았고, “단순한 화학공장일 뿐”이라는 주장도 병렬적으로 제기되곤 했다.

    북한이 소련과 경수로 도입협정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IAEA의 통제를 받기 시작할 즈음, 이미 CIA의 사진보관실의 상자 안에는 수백 장의 영변 위성사진들이 잠자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이 사진들이 새로운 각도에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주한 미공군 하월 에스티스(Howell Estes) 중장이 “속으로는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게 만들었던 1994년 ‘서울 불바다 위기’는 CIA가 운용하던 감시위성의 고해상도 카메라가 포착한 사진으로 시위가 당겨진 것이다. 위기가 증폭되고 전쟁 직전 상태로까지 치닫는 과정에서도 사진과 사진에 대한 해석은 맡겨진 배역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1993년 12월 CIA의 국가정보평가서가 “북한이 10kt급 원폭 한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1989년 촬영된 몇 장의 위성사진이었다. CIA는 1989년 영변의 원자로 밀폐용기에서 나오는 연기를 감시하는 것으로 원자로의 가동-중단을 판단했는데 최장 110일 가까이 이 원자로의 작동이 중지되었다고 결론내렸다. 이 기간 동안 약 4천여개의 폐연료봉을 교체할 수 있었고, 이 폐연료봉의 재처리를 통해 플루토늄이 추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보평가는 각기 CIA 국장과 국방장관의 입을 통해서 “벌써 한 두 개의 원폭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로까지 비약된다. 이미 수십기의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수천개의 폐연료봉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과 달리, 북한에게만 유독 핵무기를 위한 재처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은 ‘위성사진’ 자체라기보다 그 위성사진의 전후에 놓여있는 거대한 의미체계가 작동한 결과였다. 6.25사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수령체제, 도미노이론, 모스크바의 설탕배급행렬, 베를린의 철조망을 뛰어넘는 동독 초병,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사이공의 마지막 철수 헬기, 판문점도끼만행, 남침땅굴,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캐러비안의 두 털보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세”, KAL 858기 등등.

    고-5

    (*1975년 4월 29일, 사이공의 주재 미 대사관 옥상. “베트남에서의 미국실패에 대한 거대한 은유”라 불리는 철수장면. 미 대사관 경내이기는 하지만, 저 마지막 헬기가 내려 앉은 곳은 베트남의 CIA 건물옥상이었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고-6

    (1951년 2월 어느날, 그리스 파트라스(Patras)의 미경제협조처(ECA) 건물 앞에 전시되어 있는 미국의 유명한 카투니스트 허버트 블록(Herblock)의 반공, 반소카툰을 구경하는 시민들. ‘헐리우드와 맥도날드’로 상징되는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시장경제체제를 앞세워 세계를 석권하기 전까지, 자유진영의 거대한 이념체계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버팀목은 USIS(미공보원), ECA, 해외주둔미군기지와 같은 “국경을 뛰어넘는 국가기관들”이었다.

    마셜플랜의 집행기관이던 ECA의 입구에 세워진 이 전시대에서 소비되던 그리스 시민들의 소중한 시간은, 유럽부흥기금으로 지원되던 달러화에 대한 일종의 ‘대체지불수단’이었다. 이런 종류의 부등가교환은 냉전 이후 반공주의적 혹은 권위주의적 저개발국가들이 경제개발의 입구에서 언제나 겪어야 했던 통과의례였다. 사진출처 : NARA.)

    이 거대한 의미체계는 그 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기호와 상징이라도 특정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설득의 힘이 있었다. 한데 이보다 더 가공할 것은, 비록 그 같은 해석(과거)이 일시적인 착각이거나 오류였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시스템 전체의 문제로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랄지, “전술적으로는 틀렸지만 전략적으로는 옳았다”랄까? “경기에서는 졌지만 스코어에서는 이겼다”… 이건 아닌거 같네. 아무튼. . .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는 복수의 ‘현재들’을 내포하고 있던 과거의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들’은, 단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하는 지금의 위치에서 돌아 볼 때에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기만 하다.

    훗날 결국 CIA는 “북한의 주장대로 원자로의 가동중단 기간은 60일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컸”고, 이처럼 전제가 바뀌게 되면 그에 따른 결론, 즉 “10kt급의 원폭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의 추출이라는 결론도 대폭 수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실토했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핵실험을 마쳤고, 조만간 또다른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지배적(?)인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1990년대 초반의 저 잘못된 해석이란 게 뭐가 그리 큰 대수라고?” 뭐 이런 식이다.

    전술적 실패가 전략의 수정으로 이어지지 않는, 혹은 전제의 오류가 결론의 무가치 혹은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저 그렇게 ‘덮어두고 지나가는’ 일들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시작된 걸프전에서도 일어났고,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화 되었던 베트남전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냉전의 와해는 이 모든 희비극의 대단원 역할을 하면서, ‘의미체계’의 외곽에서 기껏해야 “거대한 성채를 향해 화살 몇 발 쏘는 인디언 같은 존재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거의 유일해 보이던 대안적 미래를 넉다운시켰다.

    넓게는 신전통주의 그리고 좁게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이 거대한 의미체계의 최종승리에 대한 ‘학문적 빵빠레’같은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불연속적이고 병렬적으로 전개되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던 ‘과거의 흔적들’을 단 하나의 연속적이면서도 기계적인 인과관계의 틀 속으로 재정렬시키는 일이었다. 흥겨운 빵빠레에 맞춰 여기 저기서 진행되는 이 ‘굿판’은 아직도 진행형이며 당분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굿판을 걷어치우라”던 분께서 ‘굿판을 끝내기 위한 굿판’을 벌이고 계신참이니 뭐 말 다했다.

    고-7

    (* 1995년 보도사진 동상 수상작. 불경스럽게도 전현직 대통령들의 일렬 횡대(종대인가?)로 정렬시킨 이 커트는, 이제 막 청와대의 주인이 된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와 조선일보의 ‘이승만 바로보기 캠페인’이 어떤 방향으로 우리 현대사를 일렬로 세우려 했는지 잘 예고해준다. “실제 모습대로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재구성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와 달리 박정희의 키가 많이 과장되어 있다. 사진출처 : 1995년 보도사진연감.)

    고-8

    (* 1995년 5월 21일 여야 영수회담을 마친후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박정희와 김영삼. 키가 비슷하지도 않네.사진출처 : 개인블로그.)

    1994년 초 여름, 전쟁은 거의 우리 턱밑까지 다가왔다가 가까스로 피해갔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계산에 의하자면, 8~10만의 미국인을 포함하여 백여만명의 사상자가 날 뻔한 대참사가 우리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때 열심히 라면이나 부탄가스를 사재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국전쟁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배고픔과 추위같은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3주 안이면 정리될 것(물론 한국전 당시에도 김일성은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이고, 사다놓은 라면과 부탄가스는 채 다 써볼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사상자의 60-70%는 전쟁 직후 3일 동안 발생한다고 예측되었으니. 이 엄청난 불행에 대해 위성사진 판독가들이 모든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한국정부의 강경파들과 북한의 옹고집 그리고 미국의 보수언론들은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위험수위를 점점 높여갔다. 하지만 한반도로 하여금 전쟁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의 입구에 밀어넣는데 그 사진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CIA의 사진분석가들이 그 사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연작글은 이런 질문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그들의 선택이 달랐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소리를 대체 어떤 위대한 분께서 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특정한 기능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파편적으로 흩어져있는 사실들의 조각은 아무리 고밀도로 메모리칩 속에 저장하더라도 그 자체로 분류, 종합하여 비판적 정보로 재탄생되지 못하는 법이다.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들 역시 그러하다. 텍스트를 부여하고 맥락을 찾아다니고 수면 아래에 이어져 있는 다양한 단서들을 연결시키는 것. 이런 작업을 통해서 무언가 우리를 둘러싼 이 거대한 ‘의미체계’가 부여하는 것과 동떨어진 하나의 ‘관념’이나 ‘해석’을 만들어 보는 것.

    뭐 이걸 어떤 철학자 말처럼 “찰나적 섬광”이라 부르건 선승들의 로망인 ‘갑작스런 깨우침(頓悟)’이라 하건,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것이 사람들의 직접적인 경험의 매개 즉 정신적 노동의 작용없이 그냥 주어지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적극적 체험이며 또 실천인 셈이다. 파란약 먹을래? 빨간약 먹을래?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의미체계의 방해를 조금이라도 피해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공간적 배경을 흐트려보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오랜 시차와 머나먼 거리를 두고 있지만 거의 똑같은 장면을 찍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는 이미지들을 나란히 놓고 보기. 혹은 저들이 엉망으로 섞어 놓은 시공간 배열을 원위치시키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동족상잔이란 만행”을 결심하기 전의 김일성의 사진들이나, 1965년 귀족적인 파티외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박정희의 불편한 표정에서는 벼베기행사 때 보여주던 예의 그 ‘연출된 서민풍모’ 보다 훨씬 더 친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사한 것과 원본을 교차시켜놓고 보면, 누락된 것과 보태진 것의 차이와 의도를 불현 듯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아직 한국전쟁을 겪기 전의 시점으로 이동해 있다고 가정한다면, 저 악마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얼굴에서 아이같은 미소를 발견해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도 또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정지된 역사’, 그러니까 과거의 이미지들을 좀 색다르게 감상하려는 우리의 작업을 어떻게든 교란시키려 드는 방해세력(?)에는 아마 좌우의 구분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첫 번째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 하다.

    “이 매체는 필자의 집필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
    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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