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 첩보영화의 가계도
    [영화잡론] 한국형 첩보영화는 어떻게 한국사회를 반영해왔나
        2013년 02월 06일 05: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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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첩보영화’ <베를린>이 1월30일 개봉한 뒤로 개봉 2주차를 맞은 2월5일 현재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국의 땅 베를린에서 남한과 북한의 요원이 어떤 음모에 휘말린다는 한국적 소재가 관객에게 분명 흥밋거리로 작용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첩보 장르는 세계영화사와 함께 걸어 온 영화장르다. 프리츠 랑의 <스파이>(1928)를 비롯한 조지 피츠모리스의 <마타 하리>(1931), 앨프레드 히치콕의 <39계단>(1935)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007>시리즈나 최근의 ‘본’ 시리즈까지, 첩보 영화는 오랫동안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베를린> 개봉으로 ‘한국형 첩보영화’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참에 한국형 첩보영화의 계보도를 정리해봤다. 그간 한국형 첩보영화가 한국사회의 어떤 풍경을 담아냈는지도 함께 알아보자.<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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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보물을 사랑한 건 할리우드뿐만이 아니었다. 냉전을 정면으로 관통해 온 한국 사회인 만큼 첩보물은 한국 영화 역시 일찍이 애용해 온 장르였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에 대한 집단적 욕망이 어지럽게 뒤섞인 1970년대부터 거슬러 가보자. 최인현 감독의 1970년작 <황금70 홍콩작전>(제작 신필름)은 최무룡, 신성일, 윤정희 등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들이 출연한 한국형 첩보물이었다.

    중국으로부터 위조 화폐를 들여와 홍콩 경제를 무너뜨리려는 중국 첩자들이 있다. 위험천만한 음모에 북한 첩보조직과 남한 정보원이 가세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예나 지금이나 ‘검은 돈’이 사건의 발단인 건 변함없다. 차이라면 북한 첩보조직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첩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악당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정말 악당이었다.

    신상옥 사단에서 가장 촉망받는 감독 중 한 명이었던 최인현 감독은 같은 해 <엑스포70 동경전선>이라는 제목의 영화도 만들었다. 제목대로 이 영화는 1970년 오사카엑스포, 이른바 만국박람회(만박)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조총련은 북한 정부로부터 만박에 참여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납북시키라는 지침을 전달받는다. 하지만 한국인 관광객 아무도 조총련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남한의 정보원 박동근(박노식)은 조총련의 계획을 알아챈 뒤 그들의 본거지에 잠입한다. 그리고 조총련의 납치 계획을 만방에 폭로한다.

    <엑스포70 동경전선>은 해외를 배경으로 하고자 하는 한국영화의 공간 확장에 대한 욕망(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 속 만박의 풍경은 어디까지나 뉴스릴로만 보여준다. 오사카 로케이션은 당연히 없다), 당시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만박을 통해 투사된 근대화에 대한 욕망과 한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데 섞인 작품이었다.

    참, 정창화 감독의 <순간은 영원히>는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한국형 첩보영화의 욕망이 충족된 작품이었다. 한국과 홍콩이 합작해 만든 이 영화에서는 남궁원이 비밀첩보원 X7를 맡았고 김혜정이 그의 임무를 교란하는 미모의 첩보원을 연기했다. 007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형 007’이라고나 할까.

    첩보영화의 단골소재인 금(돈)과 일본군을 소재로 한 첩보영화도 있다. 박노식이 연출한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7)라는 작품이다. 잘 알다시피 류승완 감독의 2008년작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광복 직후, 일본군 패잔병에 의해 장님이 된 박동혁(박노식)이 세월이 흘러 한예지(안보영)와 함께 복수를 하게 되는 액션 멜로드라마다. 한예지가 박동혁의 눈이 되어 함께 적들과 맞서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애잔하다. 당시 수준의 카 스턴트 액션도 눈에 띈다.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007 시리즈 같은 할리우드 첩보물에 비하면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한국형 첩보 장르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쨌거나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내건 1970년대 한국 첩보영화는 근대화의 대한 욕망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게 특징이다.

    악인-다찌마와

    외화 쿼터를 따내기 위해 값싼 국산영화를 만들고, 검열의 장벽이 높았던 한국영화의 암흑기 1980년대를 지나 첩보물이 한국영화에 본격적으로 재등장한 건 강제규 감독의 1999년작 <쉬리>였다.

    남한의 비밀정보기관 OP의 특수요원 유중원(한석규)과 이장길(송강호)이 박무영(최민식)이 이끄는 북한 특수8군단의 테러음모에 맞서는 내용의 이야기다. 북한군이 서울 시가지에 들어와 남한 요원과 총격전을 벌이는 기괴한 풍경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 가진 긴장감과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유중원과 이방희(김윤진)의 관계는 남북의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변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방희가 간첩이었고, 북한 특수8군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인이었던 유중원과 이방희는 사랑과 조국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겨눌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한계를 뜻한다.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유사 할리우드 영화의 한계’라는 혹평도 받았지만 장르영화로서 ‘한국형 첩보물’을 산업의 형태를 막 갖추기 시작한 한국 영화산업의 자장 안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첩보영화는 아니지만 <쉬리> 이듬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을 다뤘다는 점에서 비평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함을 첩보장르 안에 녹여 넣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김현정 감독의 2003년작 <이중간첩>이다. 1980년 북한 대남 사업본부 최우수요원으로 남조선 혁명과업을 부여받고 남한으로 위장 귀순한 림병호는 ‘귀순용사’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남한 정보기관 내 대공정보분석실 일을 배정받으면서 이중간첩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중간첩

    3년 간 완벽한 위장을 통해 그는 남한 정보부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던 중, 어느 날 고정간첩의 딸로 태어나 고정간첩의 삶을 살아가는 지령 전달책 윤수미(고소영)로부터 북의 첫 번째 지령을 받는다. 남과 북 양쪽 모두를 속여야 하는데서 오는 장르적 쾌감도 쾌감이지만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림병호의 운명은 당시까지 나왔던 한국형 첩보영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딜레마였다.

    그런 딜레마에서 어떤 선택도 쉽게 할 수 없는 림병호의 목표는 단 하나. 생존이다. 그것은 첩보를 세계 무대를 휘젓는 게임 정도로 바라본 강대국 스파이들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과 북 양쪽 사이에서 처한 림병호의 고민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아서였을까. 개봉 당시 영화는 흥행에 큰 재미를 보진 못했지만 ‘남이 아니면 북’이라는 전형적인 분단 이데올로기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후 첩보전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류승완 감독의 2008년작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정도다. 가슴 아픈 첩보 영화였던 박노식 감독의 원작과 달리 이 영화는 첩보를 코미디로 풀어낸 뻔뻔한 작품이다. 1940년 특수요원들의 명단이 담긴 일급 비밀문서와 여성 비밀요원 금연자(공효진)가 작전 수행 도중 사라진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임시정부 수장들은 비밀병기 다찌마와 리(임원희)를 부른다. 최고의 무기개발자 남박사(김영인)를 통해 최식신 무기를 지급받은 다찌마와 리는 관능적 스파이 마리(박시연)를 영입해 금연자를 뒤쫓는다.

    이 영화를 두고 자본과 역사의 이데올로기니, 당대 한국사회의 풍경을 논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관령 어느 스키장을 스위스로 둔갑시키는가하면 한강 어딘가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우기는 장면은 과거 해외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한국 영화의 욕망을 묘하게 비튼다.

    무엇보다 ‘조국과의 사랑을 배신한 그녀는 간통죄’나 ‘더러운 죄악에 종지부를 찍을 내 주먹을 사라’ 같은 명대사는 패러디와 유희 정신이 충만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첩보영화로서의 의미를 굳이 부여하자면 역사적 사실과 그것으로 인한 첩보전을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휘둘리지 않고 가볍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쟈니 잉글리쉬>시리즈가 영국 첩보물을 패러디한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_메인포스터_fin

    어쨌거나 한반도가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 지역인 만큼 한국영화에 첩보물만큼 매력적인 장르도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북한이 긴장의 촉발제로 이용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베를린> 이후 한국형 첩보 장르가 담아낼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풍경과 욕망 말이다.

    필자소개
    씨네21 취재기자. 한때는 곽경택, 장률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매주 월요일 밤마다 축구팀에서 공 차고, 주말마다 온라인 리그에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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