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피한 첫 결혼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4] 평양, 만주 드나들던 시절
    2013년 02월 05일 0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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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어르신 십대 말에 일제시대 말기를 사신 건데, 일제 말 폭압정치에 대한 기억은 좀 있으셔요? 보니까 평양서 다니셨던 전매국이니 신발공장이니도 사실은 일제가 전쟁 보급품 만들거나 전쟁자금 만들려고 운영하던 전매사업이거나 공장들이었던데요.

(김미숙) 글쎄 나야 머 상세한 건 모르구, 집집이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다 뺏어가구 숟가락까지 다 훌터가 버린 거는 기억나. 우리 집도 많이 뺐겼지.

그 때 여자들 스무살까지 시집을 안가면 ‘덴시따이‘라구, 그래 그 정신대, 그거에 뽑혀나가니까 허겁지겁 시집들을 보낸 거야. 나도 곧 그 나이가 되는 거지. 그래서 덴시따이 뽑혀 갈까봐 겁이 나가지고, 허겁지겁 시집을 보낸 거야.

아무리 급해도 혼인이니까 골라서 간다고 간 게, 시골로 갔어. 평양서 50리 정도 나가는 시골이야. 외아들에 시어미 빡에 같이 안사는 간단한 집으로 골라 골라 보낸 거지. 내가 성격이 좀 쎄구 안차분하니깐, 시집살이 안할거 같은 편한 집으로 고른 거지.

근데 그 신랑이 그 지방 젤 부잣집의 첩 다섯 중 넷째 첩의 외아들이었어. 얼마나 부자면 아들 낳겠다고 처녀 첩을 다섯을 봤겠느냐고 글쎄…. 첩 하나씩 볼 때마다 논이구 밭이구 달라는 대로 떼어줬을텐데. 머 거기서는 그 집 땅을 안밟으면 동네를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부자였던 거지. 우리 집에서는 돈 많은 거나 집안이나 그런 거가 아니구, 시집살이 적을 집을 골라서 보낸 걸 거야.

혼인식도 족두리 쓰고 구식으로 제대로 하고 간 거지. 색시 집에서 한번 하고 나중에 시집에서 또 한번 하구. 근데 그 시절 결혼식이 너무 많어서 우리 집에서 식을 하는 날 차를 못구해서 신랑이 밤에 늦게야 온 거야. 손님들은 낮부터 와서 기다리는 데 신랑 태우고 올 차를 못구해서 늦은 거지.

그래서 내가 첨보는 신랑한테다 소리를 치고 야단을 한거야. “내가 무슨 도둑 시집을 가냐?, 과부 재가를 허냐?, 밤에 몰래 결혼식을 하게.” 그러니까 신랑이 ’결혼식이 너무 많아서 차가 없어서 늦게 온거니 참으라고 미안하다.‘며 달래더라구. 그 때 내가 비싼 오바를 새로 해 입고 시집을 들어갔는데, 시골 사람들이 오바 입은 나를 보고 “저런 여자가 여기 와서 살겠냐구?” 그러더라구. 요새로 치면 밍트 오바야, 우리 엄마가 옷값을 안아꼈거든.

시집살이라야 별로 없었어. 시아버지는 같이 안살고 시어머니에 신랑 그리고 식모 하나 그렇게가 있으니, 내가 할 일도 별로 없고 살림이라는 건 난 할 줄도 모르고. 평양서 나서 평양서만 산 사람이 시골서 안맞잖아. 밭농사도 꽤 있는 집인데 내가 머 밭에 나가서 김을 매겄어, 집에서 살림을 맡겄어, 어쩌겄어? 뚝하면 자꾸 친정에 오고 그랬지.

정신대

일본 나고야 미쯔비시 군수공장에 끌려온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소녀들. (출처:blog.ohmynews.com/jeongwh59/)

징용간 노동자

훗카이도(北海道) 개척 토목공사장에서 학대를 당한 한국인 노동자들. 도망을 기도하거나 반항을 하면 심한 폭행을 당했다.ⓒ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그 때는 정신대 피해서 혼인 서류만 만들고 결혼 흉내만 내고는 친정에 와서 사는 여자들도 많았거든. 남편은 나보다 두 살 윈데, 나래면 죽고 못살게 좋아하고 나도 그 신랑은 맘에 들구 좋았어. 생긴 것도 좋구 나한테도 잘하구. 근데 시골 동네가 도무지 정이 안붙고, 죽어두 못살겠는 거야. 낮에라도 나가면, 삐잉 둘러서 산하고 들만 있구 암 것두 없는 거고 밤만 되면 사방천지가 깜깜~하구.

시집은 논은 없어도 밭농사가 크고 하니까 잘 살았지. 셋째 첩까지 아들을 못낳다가 넷째 첩이 아들을 낳으니, 그 영감이 밭이랑 재산을 많이 내 준거지. 일본놈들 공출 때문에 쌀밥만 먹지는 못하고 조밥도 해먹었는데, 밥도 밥이지만 멀 할지를 모르겠고 참 깝깝하더라구.

평양에서는 벌써부터 전깃불 들어와서 밤이어도 환하게 밝고 그런데, 거기는 아직도 등잔불 키고 그랬으니 저녁만 되면 벌써 깜깜해갔고 어디 갈 수도 없고 갈 데도 없고.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서 남자가 징용을 끌려가 버렸어.

그래서 그 핑계루 아예 평양 집으로 온 거지. 그러구두 편지는 왔었어. 좀만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편지만 오면 그소리지. 이후 만주 연변 언니네 갔을 때도 나도 편지를 하고 신랑한테서도 편지가 오고 그랬어. 일년만 있으면 집으로 가니 기다리라고. 징용 끝나면 시골집이랑 밭이랑 팔아서 외시어머니 모시고 평양서 큰 가게라도 하면서 같이 살자고. 나도 그러자고 기다리겠다고 하고. 그루구는 해방이 돼서 그 사람 징용에서 돌아오는 거 기다리다가, 서울이 좋다고 하도들 그러기에 기다리는 동안에 서울 구경이나 잠깐 하고 오겠다고 나온 게 이렇게 되버린 거잖아.

정신대 끌어간다는 소문은 있고 끌려갈까봐 미리미리 시집들을 보냈지만, 내 주변에 정신대 끌려간 사람이 있지는 않았어. 글쎄 친구들 중에는 없어서. 가차이 지내지 않은 남들 일이야 잘 모르구. 하여튼 소나 개나 안끌려 갈라구 시집들을 보내 버리구 그랬어.

평양 친정집으로 왔는데, 한 달 정도는 별 싫은 기색이 없더니, 그 다음부터는 우리 올캐가 나를 미워하는 거야. 미워할 수 밖에, 그 일제 말기에는 쌀이 항상 모자르니까. 야미로도 사기가 힘들었거든. 말도 못하게 귀한데다가 다 공출당하고 배급을 줬었거든. 식구 수 대로 한 달 꺼리 배급 받은 거를 배불리 먹으면 열흘도 못먹어. 그러니 집집마다 죽을 쒀먹거나 조밥을 해먹었지. 그런데 시누이가 친정으루 들어와살면서 쌀을 축내니 올캐가 미워한 거지.

그러다가 공장이나 다닐까 하고 있는데 마침 봉천 피복공장으로 여직공들을 모집해 가드라고. 전쟁 때니까 군복을 만드는 일이었어. 평양에 있는 피복공장보다 따불로 임금을 준 대는 거야. 평양서 백원 주면 봉천은 이백원 준대는 거지. 집에 있기도 깝깝한 데 거기나 가보자 싶어 지원을 했어.

우리 엄마는 평양서 멀지 않은 어딘 줄 알았나봐. 큰올캐 눈치도 보였든지 두말두않구 가라구 하더라구.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을 하는 데, 막상 가서 보니까 너무너무 추워서 일이구 돈이구 사람이 못살겠는거야. 그러니 밤나 스팀 나오는 거기만 섰다가 얼마 못있어 두달 만에 다시 집으로 왔어. 글구 그 때 거기 봉천에 공습이 많았거든. 그러니까는 부모네들이 빨리 나오라구 나오라구 전보들이 난리로 오구 했었어. 그러니까 다들 나오구 나도 그냥 나왔지.

만주 언니네 / 두 번째 결혼할 남자와의 만남

두 달만에 오니 우리 올캐가 한 달은 그저 놔두는데 더 있으니까, 또 낯색이 달라지는 거지. 그래서 놀러나 갈 겸, 만주 안산 언니네로 간 거야.

우리 어머니가 올캐가 나 미워하고 하니까, “너 돌아댕기는 거 좋아하니 언니네나 가 있어라.” 하면서 주소만 적어서 돈하구 준거야. 우리 엄마는 만주도 그렇게 먼 곳인 줄을 몰랐던 거지. 나야 머 집 나가서 돌아댕기는 거 좋아했으니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그래서 주소 하나만 들고 만주 안산엘 갔어. 나는 배짱은 좋아.

만주 안산 어딘가 기차가 서는 곳에 내려서는 일단 마차를 잡아 탔어. 그리고는 이것 좀 찾아달라며 주소를 내미니까, 마차꾼이 좋아라 하며 한참을 가더라구. 한참을 가더니 어느 동네를 빙빙 돌면서 집을 찾는데, 여엉 못찾더라고. 하도 동네를 빙빙 도니 거기 동네 사람들이 내려서 찾지 마차값을 얼마나 줄라고 마차를 탄 채로 집을 찾냐고들 그러는 거지. 마차꾼은 말도 안하고, 그저 주소만 디다보고 뺑뺑 도는거야. 하두 뺑뺑 도니까 사람들이 자꾸 내려오래. 그래 마차를 내려서 마차값을 달라는 대로 주고 찾아보니까, 바로 근방이었어.

그니까 그 마차가 주소 바로 근방까지는 간 거지. 마찻값 얼마준 지는 기억도 안나. 내려서 동네 사람들한테 주소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저기 저 집이라고 금방 갈켜주더라구. 그 마찻꾼은 그 날 횡재 한 거지.

아마 내가 속았던 걸 꺼야. 근데 머 엄마가 준 돈 많으니, 마찻값이 많은지 적은지는 신경도 안썼어. 나중에 보니 마차는 비싼거구 양차가 있었더라구. 마차는 손님 자리가 네 개에 말이 끄는 거구, 양차는 자전거가 끌구 손님자리도 하나구 인력거 비슷한거지. 그러니 양차 탔으면 훨씬 쌌는데 내가 그런 걸 그 때 알 리가 없었던 거지.

그 때 만주에 조선 사람들 많았지, 이북에서도 가고 이남에서도 가고. 언니네 집 맞은 편에 기억자 모냥의 집이 있는 데, 언니네 집에서 그 집이 다 들여다보여. 그 집에 웬 젊은 남자들 대여섯명이 살고 있었어. 스물 댓살 먹어 보이는 여자가 하나 있던데, 아마 그 중 한 남자랑 결혼해서 다른 사람들을 하숙을 치던가 어쨌는가 그런가봐.

내가 가끔 거기를 볼라치면 우리 언니가 질색 팔색을 해. 그 남자들도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 그랬었거든. 우리 언니는 여자 하나가 남자 대여섯이랑 같은 집에 산다며, 화냥년 같은 년이라고, 그 집을 쳐다도 못보게 하는 거야.

같은 조선 사람이고 하니 이웃 간에 말도 하고 그럴텐데, 그 여자하고 말도 못붙이게 하고 난리를 치는 거지. 아 남편이 하나만 있겄지, 그 남자들 모두랑 살림을 하구 다 남편이겠어? 근데 우리 언니가 그런 억지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 언니가 좀 그랬어. 그 남자들이랑 별시런 일도 없이 한 달 정도 있었어. 거기서두 징용 간 신랑하구 편지 왕래가 있었어. 나를 아주 보고싶고 곧 징용 끝나면 같이 평양에서 살자느니 기다리라느니 그런 내용이었지. 나두 답장두 했었구.

우리 형부가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이었어. 그러니 나를 귀찮아 안하고 잘해 줬었지. 장인 장모한테도 제 부모처럼 생각하고 잘했거든. 그러다가 만주 구경시켜준다고, 일부러 평양까지 가서 장모님을 만주로 모시고 왔어, 나 거기 있는 동안에.

어느 날은 형부가, 건너편 집 남자들이 나를 쳐다보고 노리고 한다고, 더러운 소문 나기 전에 처제만 평양 집으로 들여보내자구 그러는거야, 우리 엄마랑 언니한테. 그 때까지 나는 그 남자들 중 누구랑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형부가 괜히 말날까봐 그런 거지. 그 남자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데,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놔두면 안된다는 거야.

그래서 나더러 먼저 평양으로 가라는 거야. 근데 우리 엄마 생각에, 맨날 내가 봉천간다구 만주 간다구 돌아다니구 하니까 봉천이고 만주고 바로 평양 이웃인 줄 알았는데, 만주 오면서 보니 조선 땅도 아니구 밤을 새서 가서 그 이튿날이나 차를 내리구 하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거잖아.

그러니 이 노인네가 겁이 났던 거지, 알구 나니까. 그래서 그 먼 데를 기집애를 어떻게 혼자 보내냐구 나를 데리구 같이 평양으로 들어가겠다는 거지. 그러니 언니랑 형부도 더 계시다 가라고 섭섭해 하구. 결국 가기루 해서 두 사람이 바리바리 머를 챙겨서 역으로 마중까지 나왔어. 언니랑 형부가 표를 끊어주고 들어가고 엄마랑만 역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 데, 어떤 남자가 저쪽에 우두커니 서있더라구. 그 때는 그저 그런가 부다 하고 있었어. 근데 기차가 들어서고 우리가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까, 그 남자가 얼른 차에 올라서 우리 칸으로 오더라구. 그래서는 쪽지 접은 걸 나를 얼른 주고 내리는 거야, 암 말도 안하고. 그 때는 왜정 때라 기차가 불도 안켜고 다녔거든, 공습이 오니까. 그래서 먼지도 모르고 얼결에 받은 거지.

보니까 사람은 그 언니네 건너편 기억자 집에 살던 남자 중 하나더라구. 노상 보였으니까, 사람 얼굴은 기억이 나지. 순간 머 어머니랑 같이 먼길 가니까 점심이라도 사먹으라고 돈이나 주는 줄 알았어. 그래서 먼 불빛에 희미하게 비춰보니까 돈이 아니구 쪽지에 글씨가 써있는 거야.

우리 엄마가 또 눈치가 빨라. 당장 머이냐고 난리야. 내가 그때나 이때나 거짓말을 못하거든. 그래서 “저 사람이 머 엄마랑 밥이나 사먹으라고 돈이나 주는 줄 알았더니 편지네.” 그랬더니, “기집애가 행실을 어떻게 했길래 사내가 그런 걸 주느냐?“고 난리법석이 났어. 더구나 혼인식까지 한 서방 있는 년이 행실을 똑바루 안해서 그런다구 난리지.

그래서 “가마 있어, 가마 있어.” 그랬지. 챙피하게 기찻 간에서 떠들지 말라고, 나 그 사람이랑 아무 저기도 한 거 없다구 그랬지.

쪽지 내용은 머 요만한 쪽지에 얼마나 썼겠어? 초면에 미안하다구 하면서 나를 사모한데나 머 어쩐 데나. 그리구 주소가 적혀있고 연락을 바란다고 그렇게 써 있더라구. 그래서 평양 집에 와서 심심해서 편지를 쓰게 된 거야. 저는 만주에 있고 나는 평양이고 하니 머 별일이 있겠냐 싶어, 편지를 주고받은 거야. 내가 한문 글씨를 잘 모르잖아. 그 때는 편지 겉봉은 꼭 한문으로 멋지게 썼거든.

그래서 초등학교 나온 내 친구한테 겉봉은 써달라구 하구, 내용은 내가 쓰구 해서, 편지를 좀 왔다갔다 했지, 서너번을. 그 편지 내용도 머 별로 생각나는 건 없어. 정신대 피해서 남자랑 결혼했던 것두 썼어. 난 거짓말은 안하자나. 난 솔직해서 그런 거 다 말해. 거짓말은 죽어도 못해.

저 쪽 마음이야 모르지만, 그때 내 마음은 무슨 결혼이나 그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거는 당연히 아니지. 평양하고 만주니 만날 약속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그저 재미 삼아 하는거지.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그냥 좋기도 하고, 편지질 하는 재미로도 그냥 그랬던 거지. 더구나 혼인식까지 한 그 남자가 나는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다가 해방되고 언니네가 만주를 나왔잖아, 그 때 그 남자가 언니네 일행들 하고 같이 만주에서 나온 거야. 언니네는 살림하던 사람들이니 짐이 많잖아, 그 남자는 혼자니까 달랑 가방 하나구. 그래서 그 사람이 언니네 짐을 많이 들어다 준거지. 차도 한 차 타고 나오다가, 나중에 언니네는 정주로 다시 가구 그 남자는 이남으로 가게 되면서 갈린 거지.

그 때 그 남자가 자기 큰 누나네라고 하면서 나한테 전해주라며 언니한테 주소를 적어줬거든. 그남자한테 신세도 지고 했으니 그 주소를 언니가 전해줬는데, 그게 천안 어디였어. 그 사람은 이남 사람이었던 거야.

근데 난 그게 천안인지 서울인지 구분도 않고 그냥 서울이려니 생각하고 있었어. 나중에 서울 와서 보니까, 서울 사람들이 그 주소가 어딘지를 모르더라구. 그러다가 알구 보니까 천안이 서울에 있는 게 아니더라구. 서울하고 천안하고 그 때만 해두 아주 멀었던 거야. 그건 나중 이야기고, 하여튼 그 남자가 만주를 나오고부터는 아마 나는 편지를 안했던 거 같아. 오기는 몇 번 왔는데 내가 그냥 흐지브지 하고 있었던 거지.<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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