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치의 재건은 가능한가
    [기자생각] 각자도생이냐, 각자도살이냐의 갈래길
        2013년 02월 05일 12: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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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쌍용차의 송전탑 농성이 78일째, 한진중공업 최강서씨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시간이 46일, 현대차 철탑 고공농성은 112일차를 맞고 있다. 기아차 윤주형씨의 자결이 있은 지도 벌써 9일이 지나고 있다.

    그뿐인가 사회적 이슈도 되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절절한 투쟁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싸움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하고 있는 또다른 수많은 ‘산 자’들의 모습도 있다.

    노동자들의 힘은 단결과 조직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진 곳에서 조직이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행동이 조직적 투쟁을 대체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위력도 보이지 않고, 그 말 많고 논란 많은 ‘진보정당’들의 힘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민주노총의 조합원 개개인들과 진보정당의 당원 개개인들은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조직과 조직력과 투쟁력은 미흡하다.

    개인이 헌신과 열정을 가지는 경우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에 대한 저항일 것이고, 또 하나는 나만의 싸움이고 나만의 열정이 아니라 내가 속한 내 조직, 집단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뒷배’에 대한 자신감일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무너졌고 전자만이 외롭게 남아서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노동자운동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진보정당은?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힘과 조직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거리를 두고 ‘진보정당’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을 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는 목소리다. 노동조합과 노동자운동이 정치와 진보정당 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노동조합과 노동자운동에 득이 되고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과 판단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진보정치의 대립과 갈등에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이 휘말리면서 오히려 노조운동 자체의 분열과 약화로 귀결된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진보정당이 노조운동에 물리적, 정치적 도움과 힘, 사람들의 심리적 기준에는 미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노조운동이 정치와 진보정당운동에서 발을 뺀다고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노조운동의 혁신과 재정립이 필요할 것이고, 진보정당이 노조운동에 도움이 되고 서로 긍정적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로 어떻게 재정립할 것이냐 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실천적일 것이다.

    2000년인가,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들이 국회 본회의장의 방청석에서 한통계약직 노동자의 처지를 국회에서 다뤄달라고 현수막을 내걸고 절규하던 시절에 비하면, 국회에서 쌍용차, 현대차, 한진중공업의 이슈가 다뤄진다는 것은 진전일 수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국회에서 발언하는 의원들은 있지만 그것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에서 그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그 진보의 목소리를 수렴해야 한다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2004년 전후 민주노동당 시절에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서도 민주노동당, 아니 민주노동당이 대변하고 있었던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두려워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타협적으로 나오고 한편에서는 탄압의 기조로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무시할 뿐이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수는 10명, 지금 통합진보당 6명과 진보정의당 7명 합치면 13명, 지방의원의 숫자도 그 당시와 비교하면 거의 5배 이상 많다. 그런데 외형적 수치는 그 때보다 더 많아졌음에도 정치적 힘과 사회적 영향력은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다.

    왜 그런가? 그 때에는 민주노동당의 의원 숫자가 대변하고 반영하고 있는 민중조직과 민중들의 실체라는 것이 뒷배로 있었다. 그래서 의원수가 전체 3%에 불과했지만 그 수치로 한정되지 않는 나름의 힘과 영향력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의회에 진출한 의원들, 딱 그 숫자만큼의 영향력과 힘을 가질 뿐이다. 말 그대로 3%의 힘일 뿐이다.

    또한 진보정당의 힘과 영향력은 ‘축소’ 조정됐지만 내부의 갈등과 논란, 대립은 ‘확대’ 조정됐다. 뒷배였던 조직된 민중운동과 시민사회의 힘과 영향력도 진보정치 탓만은 아니지만 ‘축소’ 조정됐다. 확대되어야 할 것은 축소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들은 확대되고 있는 현실, 이것이 노동자운동과 진보정치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맨 얼굴이다.

    로고들

    주요 진보정당들의 로고들

    북의 3차 핵실험이 예고되고 있는 시기,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수많은 논란과 사회적 쟁점들이 산적해있는 시기, 민주당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좌편향이었으니 중도로 가야 한다고 떠들고 있는 시기, 안철수는 여전히 모호하고 신비로운(?) 포지션으로 후사를 모색하고 있는 시기, 하지만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민중세력의 조직된 대오도 무너지거나 무력화되고 있는 현 시기, 진보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진보정치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하자는 것은 이제 올바른 길이 될 수 없다. 진보정치의 모든 세력과 주체들을 아우르고 통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선 이전에 민주주의와 공존의 룰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는 이 세력, 저 세력 모두를 통합하자는 당연한 주장 이전에 진보정치가 해야 할 역할과 과제를 중심으로 진보정치를 재편하고 재건해야 한다. 그 역할과 과제는 명확하게 하고, 그 이념적 지향은 최소한의 기준을 근거로 연합하고 재편해야 한다.

    현재 진보의 맨 얼굴은?

    현재의 진보정치세력들의 상황에 대해 개략적으로 돌아보자.

    통합진보당은 당 대표를 포함한 당직 선거를 시작한다. 대표로 강병기-오병윤의 경선으로 예상되었던 구도가 이정희 전대표의 단독 추대로 정리됐다. 소위 경기동부와 공존하기로 했던 부/울/경의 행보가 좁아드는 것 같다. 통합진보당의 전략적 지지기반이고 활동가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의장도 소위 경기동부에서 하겠다고 나서 내부 논란이 극심하다고 한다. 그들만의 조직이 되었지만 여전히 갈등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세력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자신들이 희생자이고 진정한 진보의 주체라는 특유의 폐쇄적 자의식은 더 강화되는 것 같다.

    진보정의당은 최근 ‘사회민주주의’ 노선와 정체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대선 이후 2단계 창당을 목표로 설정했지만 함께 할 세력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정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진보정의당의 주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연합이나 참여계에서는 이에 대해 뚜렷한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당 간부 의식 설문조사에서는 90%가 넘는 이들이 스웨덴형 복지국가모델에 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 민주당의 정체성과 맞물리는 그것인지, 소위 진보좌파의 사회주의, 반자본주의라는 정체성과 맞물리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할 뿐이다.

    진보신당은 2월 1일 당직선거를 마무리했다. 녹색사회주의를 지향으로 하고, 진보좌파의 재건을 내세웠던 이용길 후보가 대표로 당선됐다. 녹색사회주의연대(구 ‘전진’그룹의 남은 세력과 일부 그룹이 재편)와 소위 ‘하나로파’그룹, 구 ‘진보통합파’그룹이 연합했고, 이들은 진보신당의 ‘재건’보다는 더 포괄적 범주에서 진보정치의 ‘재건’을 공통의 공약과 지향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추상적인 진보정치의 ‘재건’의 고민이 구체적이고 실물적인 ‘재건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노동자정당추진회의와 노동포럼 등 노동계 그룹을 중심으로 진보정당과 노동정치를 복원하자는 흐름들은 지난 몇 달간 노동정치세력들의 통일과 단결을 중심으로 논의를 해왔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당연히 거리를 두고 있지만 진보정의당과 진보신당 양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현장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진보정의당이나 진보신당과 다른 또다른 제3의 정당을 자력으로 건설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현장 노동자들의 공감대를 얻기 어려운 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노동이 여전히 진보정치의 중요한 기반이고 토대라는 점에서 이러한 노동정치세력들의 통일과 조직화의 흐름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등 김소연 노동자 대통령 후보 선거를 주동적으로 추진했던 그룹도 별개의 노동자 ‘계급정당’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결과의 아쉬움은 있지만 김소연 선본 평가서를 통해서 이들은 이러한 기조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녹색당은 2014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신들의 정당성이 아닌 대중적 정당성을 찾아야

    진보정치세력들은 다 나름의 자기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런 자기 정당성이 없다면 이렇게 나뉘어지고 분화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조직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당성이 ‘대중적’ 정당성이 아닌 ‘자신들만의’ 정당성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대중적으로 진보정치가 다시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복원하고, 조직돼 있지는 못하지만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 농민들, 도시서민들, 영세자영업자로 불리우는 피해대중들에게 자신들의 목소리와 아픔을 대변하는 세력이라는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의 정당성’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100% 올바른 세력은 없다. 상대방의 눈에서 보자면 다 흠결이 있고 약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 흠결과 약점에는 반드시 정정해야 할 흠결과 약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반드시 짚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말 그대로 합종연횡과 세력연합의 공학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당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약점과 과오와 한계를 내보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진정성은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확인하고 공유하여야 한다.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삶에 실질적이고 기여하고, 노동자투쟁과 민중투쟁을 유의미하게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진보정치세력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점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그 기준 위에서 진보정치 공동의 집을 짓는 것이 필요하다.

    녹색사회주의와 스웨덴 사민주의가 하나의 울타리 내에서 함께 단결하고 함께 경쟁하는 공존이 가능한지, 불가능하다면 차선의 조건이 무엇인지, 노동자들에게 다시 한번 노동정치의 복원과 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고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과거의 틀을 뛰어넘는 진보정치의 재편과 재구성이 필요하다면 무엇인지,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기 힘든 불가능한 거리라면 차선의 대안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새누리당과 민주당, 안철수 세력과는 독립적인, 물론 연대하거나 제휴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과 독립적인 진보정당을 재건하고 복원하고 재기하려고 한다면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 이름이 사회민주당이든, 녹색사회당이든, 진보좌파정당이든, 대안진보정당이든 그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면에서는 동질적일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차이가 더 큰 차이와 갈등, 대립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지난 진보정치의 과정은 그 디테일에 숨어 있었던 것들을 제어 조정하지 못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예고된 필연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여년 진보정치를 이끌어왔던 지도급 사람들의 자기 성찰과 반성과 평가와 ‘어떤’ 행동들이 있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이 없다면, 감동와 열정이 아니라 논리만이 남을 것이다.

    그 결과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일지, 각자도살(各自圖殺)일지, 그것은 대중이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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