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명의 민주노동당 의원과 '전진'
    [아빠의 현대사-52] 우아한 백조의 부지런한 물 밑 발놀림
        2013년 02월 05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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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원내 제 3당의 위상을 갖는 역사적인 쾌거가 일어났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이 땅에서 일하는 노동자, 농민, 민중의 승리에 다름 아니며 50년 보수정치의 파열구를 내고 진보정치를 일군 사건이다. 우리 연맹은 민주노동당이 이번 승리로 인해 자만하지 않고 지난 4년간 묵묵히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일해 왔던 것처럼 국회 내에서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길 바란다…..민주노동당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일신우일신 하는 자세로 의정활동과 당 활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 연맹도 민주노동당의 발전과 진보정치의 승리를 위해 격려와 감시와 질책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승리가 우리 노동자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 논평 [민주노동당은 일신우일신하라] 2004.4.16.)

    “자고나니 유명해졌다”라는 영국시인 바이런이라는 사람의 말이 있다. 민주노동당이 그랬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권영길, 조승수가 노동자가 밀집해서 살고 있는 창원과 울산에서 당선되었다. 동시에 정당명부 투표에서는 13.1%라는 놀라운 득표를 통해 비례대표후보 8명이 당선된다. 단병호, 심상정, 최순영, 천영세 등 노동계인사, 강기갑과 현애자 등 농민출신, 노회찬과 이영순 등 진보정치인들이 두루 망라되었다.

    언론에 단 한 줄이라도 나오기 위해 퍼포먼스를 하고, 장미꽃을 들고 기자들을 찾아다니던 것은 과거가 되고, 각 언론사가 아예 민주노동당 사무실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네가 상상할 수나 있을까? 내 평생 꿈이 제대로 된 진보정당 하나를 너희 세대에게 남겨주는 것이었다. 그게 이루어지는 듯 했다.

    97년 『국민승리 21』로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불과 30여만표(1.2%)라는 저조한 출발을 할 때만 하더라도 누구도 이런 ‘감격’의 날이 올 것이란 상상을 못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만들 때에도 “민주노총이 낳은 기형아” 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날이 온 것이다.

    비례대표 후보

    진보정당답게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후보 중 절반을 여성으로 하여 당원총투표를 통해 선출했다. 모두가 쟁쟁한 사람들이었고, 진보정치의 중요한 자산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앞 다투어 당선가능성이 높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 중에는 노동자 정치보다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관심이 더 가있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례후보로서 전국을 돌면서 유세를 지원할 수 있는 얼굴 마담은 아마도 단병호 위원장 정도일 겁니다. 5%가 안 나올 수도 있는 지역에 출마해서 ‘피’를 토하는 지역 출마 후보들의 전쟁 앞에서 전리품을 먼저 챙기는 듯해서 조금 찜찜합니다. ‘이 분은 왜 지역에 출마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비례후보가 몇 명이 당선되더라도 동지의 시체(너무 끔찍한가요?)를 딛고 선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길, 그만큼의 치열함으로 투쟁하시길 부디 바랍니다.”라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아예 다음 선거의 비례대표 후보 자격요건으로 이번에 지역에 출마한 사람으로 한정하는 것은 어떤가요?”라는 제안도 덧붙였다.

    어디나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기 위한 세부적인 고민이 없었고, 그냥 투표를 통해 정했다. ‘비례대표 경선을 어떤 방식으로 치룰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선 논의하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을 비례대표 후보로 내세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성후보가 모자라는 바람에 덩달아 남성후보가 자동으로 강제 사퇴되기도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막판에 이름만 올린 여성들도 생겼다. “지역구 후보로 나가서는 고생만 하고 당선 가능성이 없는 반면 전국구 비례대표 후보로 나가면 의외로 쉽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퍼지고, 당의 최고의원이 되면 비례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내부 경쟁이 치열해 지기도 했다. 이후 보완되어야 할 지점이었지만 채 논의도 하기 전인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이 사라져버린다.

    우아하게 연못에 떠 있는 백조를 떠 올려 보자. 우리는 겉모습만 보지만 백조가 떠 있으려면 물밑의 발은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의 성공에는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0명의 당선자 이전에 지역에서 출마하여 낙선된 121명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그 중 52명이 민주노총 출신이었다.

    우리 연맹만 하더라도 뚝섬역 앞에 아예 방송차를 대놓고 출퇴근 선전을 매일 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국 각지에서 헌신을 다한 사람들 덕분에 열 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민주노동당이 생겨난 것이다. 선거를 위한 특별당비를 내고, 휴가를 내서 선거운동하고, 자기 지갑을 털어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에게 밥을 사먹이던 사람들 말이다.

    지역구 후보들은 자신의 당선보다 정당명부투표에서 한 석이라도 더 많이 비례대표 의원을 확보하는 것을 위해 애썼다. 두 표를 가진 유권자에게 한 표는 설령 자신을 찍지 않고 다른 당의 후보를 찍더라도, 비례대표는 반드시 민주노동당을 선택해달라는 식의 선거운동을 했다.

    12번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

    민주노동당의 정당 기호는 12번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열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란 12번은 사실 난감한 숫자다. 97년 대통령선거 때도 앞자리 번호를 받기 위해 ‘건설 국민승리 21’이라는 페이퍼용 정당을 등록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없는 정당은 가나다순으로 기호를 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런 편법을 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냥 민주노동당을 쓰기로 했다.

    대신 기호 12번을 홍보할 수 있는 슬로건을 공모했다. 무려 1백여개의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중앙선대위의 토론을 거쳐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 12번이 살리겠습니다.”로 정했다. 1번과 2번은 지금의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1년 12달 행복한 나라 12번 민주노동당”, “12번을 찍으면 12달이 편합니다.”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노회찬 선대본부장이 TV토론을 통해 유행시킨 ‘판갈이’론도 대박을 쳤다. 아예 정치판을 근본부터 갈아야 한다는 애기였다. “삼겹살 불판이 까매졌습니다. 이제 판을 갈 때가 됐습니다.” 진보 대 보수의 구도를 너무나 쉽게, 대중적으로 상징화한 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3% 이상을 득표함에 따라 구시대 정치인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김종필을 낙선시킨 것도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김종필이 만든 자유민주연합은 비례대표 의석배분 기준인 3%에 못 미치는 2.8% 득표에 그쳤고,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 총재는 낙선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때부터 시작하여 오랜 기간 한국정치의 왜곡을 가져온 그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병호 위원장과의 낚시터 대화

    2003년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나는 단병호 위원장과 집 근처에 있는 공릉저수지를 찾았다. 너도 몇 번 가본 곳이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단병호 위원장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가 자진 출두하여 감옥에 갔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조속한 석방 등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결국 거짓말이었다. 단위원장은 1년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2003년 4월 3일에야 나왔다. 6번째 감옥생활이었다. 단위원장은 구속 말고도 다섯차례 수배 등 87년 이후 8년 5개월 동안 구속과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자리에선가 87년 이래 20여년동안 가족들과 같이 지낸 기간이 1년도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슴 아픈 사연이다.

    서울역에서 27일 동안 단병호 위원장이 단식농성을 하던 2000년, 나는 천막에서 틈만 나면 낚시와 관련된 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낚시가 내 취미가 거 알지? 나는 낚시를 하면서 기다림을 배웠다.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나고 하면 엄마는 밥을 꼽고 나는 기다림을 꼽는다. “인생의 반은 밥이고, 반은 기다림이다.”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결국 단위원장은 나의 낚시 예찬론에 빠졌다. 노동운동을 하느라 가족들과 시간을 가질 틈이 없었던 단위원장은 낚시터에 가서 아들딸과 오붓한 대화를 나눌 날을 상상했다. 그 날 바로 우리는 남대문근처 낚시가게에서 도구 일체를 샀다. 그러나 함께 낚시하러 갈 틈도 없이 감옥으로 가셨다. 결국 3년이 지나서야 낚시를 함께한 셈이다.

    “위원장님, 내년 4월 총선에서 어떻게 하실 거에요?”

    “무슨 얘기야?”“출마 안하실 거냐구요?”

    “내가 감옥에 있으면서 편지를 천통 넘게 받았어. 그 편지 중에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는데, ‘위원장님 제발 정치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야. 그게 기억에 남더라고….”

    “아니 왜 천통이 넘는 편지 중에서 왜 그 편지만 기억에 남아요? 거참 이상하시네. 아니 그럼 정치는 누가하란 말이에요?”

    사실 나는 단위원장이 국회의원이 되기보다는 민주노동당의 대표가 되는 게 더 낫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위원장은 수많은 사람들과 논의한 후에 국회의원의 길을 선택하셨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단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대표로 있었어도 민주노동당이 쪼개졌을까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본다. 실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국회로 들어간 반면 민주노동당은 새로 선출된 최고의원들이 꾸려가게 되고,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생긴다.

    국회단병호

    2004년 총선 후 국회 본회의장 계단 앞에서 울먹이는 단병호(자료사진)

    아무튼 민주노동당은 6월 4일 본청 계단 앞에서 국회 ‘입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 자리에서 단 위원장이 아닌 국회의원 단병호는 “소감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통받던 현장의 노동자들이 그동안 ‘우리를 대변할 의원들이 한 두명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말하다가 목이 메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던 단병호 의원은 “노동자, 농민, 서민을 대변하는 의원, 희망을 주는 의원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 동영상을 보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감동적인 모습이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원 세비를 당에 반납하고 노동자 평균임금만 받겠다.”고 정하기도 했다. 월 180만원 수준이다. 글쎄다. 그게 꼭 맞는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끊임없는 돌아봄을 위하여

    2004년 5월 7일 연맹 기관지에 쓴 글의 제목이다. 그러나 살면서 보면 돌아본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299명중에 10명에 불과한 국회의원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함의 극치일 뿐이다. 단지 기댈 곳이 하나도 없어 거리투쟁을 중심으로 해 왔던 노동운동이 ‘의회투쟁과 대중투쟁을 결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데 불과하다.

    처음 우리가 진보정당을 만들 때의 생각을 돌아보아야 한다. 노동자 국회의원 몇 명을 만드는 것에 우리의 목표가 있지 않았다. ‘경쟁과 효율’ 대신에 ‘연대와 평등’의 가치가 살아있는 사회, 민주노동당의 당가(黨歌)처럼 “노동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우리의 꿈이 있다. 그 꿈이 이제야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셈이다.

    수많은 선배 노동자들의 죽음과 희생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하나의 완성되지 않은 무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더 많은 조합원이 민주노동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 당의 노동자 중심성을 강화하고, 진보정당으로서 올바르게 자리 잡도록 해야 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과제다.

    마찬가지로 이런 노동자 당원의 확대에 힘입어 한국사회 전체의 개조를 위한 풍부하고도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과제다. 노동조합과 당의 올바른 결합과 역할분담, 그리고 경쟁과 협력에 의한 새로운 투쟁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는 접어들고 있다. 이제 국회의원 하나 없어 거리를 헤매던 과거는 끝났다.

    그러나 보다 높은 과제를 안고 또 다시 대중투쟁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나가야 한다. 투쟁과 협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한 한 방법의 양면일 뿐이다.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오늘의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다. 그 힘으로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니라 전진할 때다.” 그리고 앞으로 한 발 더 ‘전진’해 나가기 위해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전진-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의 시작

    그즈음이었다. 노동조합운동과 당 운동을 결합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런 조직이 필요했다. 나를 비롯하여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사람들, 과거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들, 그리고 민주노동당 안에서 화요모임으로 불렸던 젊은 당 활동가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17인이 모여 논의했다고 17인 모임으로 불려지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름을 가지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나는 느슨한 모임을 통해 우리는 2003년 11월 임시당대회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하자”는 민주노동당의 핵심적 가치를 지켜냈다. 당명과 강령을 바꾸려는 시도를 막아낸 셈이다. 그리고 이후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출과 최고의원 선거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한다.

    물론 수많은 뒷이야기들이 있을 정도로 생각이 같진 않았다. 당 활동가들이 단병호와 심상정은 선출되어야 할 비례후보로 인정했지만 노회찬에 대해서는 끝내 반대한 기억도 있다. 마지막 조율을 위해 만났던 구로역 부근에서 그토록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후에 노회찬 의원과 같은 행보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는 또 다르게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조직도 만들기 시작한다. 5월경 전국조직추진위를 통해 지역과 업종을 망라하여 전국조직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당시만 해도 나를 포함한 우리를 사람들이 소위 ‘중앙파’라고 막연하게 불렸다. 그러나 운동에 대한 방향과 노선이 명확하지 않았고, 몇몇 노동운동의 지도자 등 인물을 중심으로 막연하게 무리를 지어 활동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정당한 얘기였다.

    따라서 이런 방식을 반성하고, 일정한 조직의 목표와 규율을 중심으로 한 조직운동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운동에 책임 있게 다가서기 위해서 정체성을 갖는 조직운동으로 전환,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이 두 흐름은 2004년 12월 18일 1박 2일의 수련회를 통해 약칭 ‘전진’을 만든다. 정식 명칭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준비위원회’였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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