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 고통, 희망,
    '신성한' 노동 그리고 역사
    [책소개] 『여자, 노동을 말하다』(박수정/ 이학사)
        2013년 02월 02일 11:0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70-80년대 우리는 가난했고, 참으로 배가 고팠다. 당시의 처녀, 총각들은 그 배고픔을 이기려고 대부분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나왔다. 그리고 노동자가 되었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었던 변방의 청춘들은 먹고살려고 모두 도회지로 몰려들어 ‘공돌이’나 ‘공순이’ 아니면 ‘식모’나 ‘막일꾼’이 되어 세상을 만났다. 지독한 노동, 해도 해도 끝이 없었던 노동이었다.

    물론 알량한 자본이 노동자를 쥐어짜면서 ‘천박한’ 자본이 되어갔지만, 그래도 노동자는 노동의 희망, 노동의 미래를 믿었다. ‘가난’, ‘고통’, ‘해고’, ‘파업’, ‘투쟁’, ‘저항’이라는 단어가 언제나 노동자와 함께했지만 노동자는 용기를 잃지 않았고 ‘신성한’ 노동을 삶의 푯대로 삼았다. 그들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어머니, 아버지인 50-60대들이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이제는 장성한 자식을 둔 어머니이지만, 여자로서 평생 동안 노동을 한 ‘여성 노동자 8인’의 이야기다(물론 이중 2명은 훨씬 젊은 노동자다). 이들은 대개 고등학교를 마친 후, 그중 몇몇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친 후 가사노동자, 식당 노동자, 공공근로자, 텔레마케터, 아르바이트, 공단 노동자, 시각장애인 활동 보조인, 노동상담센터 사무장, 전국여성노동조합 위원장, 대기업 사내 하청 노동자, 항공기 회사 노동자, 미용 서비스 노동자, 대형마트 수납원,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서 평생을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8인이 우리 사회 여성 노동자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해온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중의 차별을 받는 ‘여성’으로서의 ‘노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개발독재 시대에 가발 공장, 봉제 공장, 신발 공장 등 노동 집약 산업 현장에 여성이 노동자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여성 노동’은 착취와 탄압, 해고와 투쟁, 고통과 눈물 등 지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책도 눈물과 한숨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우리 사회 여성 노동자의 고통과 고난의 이야기이자 역사다.

    하혈을 하면서도 평생을 거의 가사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오경숙, 비정규직을 벗어날 수 없는 텔레마케터 김희영,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지금은 미용 노동자가 된 하연이, 한국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 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추송례, 나우정밀 노동자를 거쳐 지금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는 상담을 하는 이정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전국여성노동조합 박남희, 대기업 삼성의 노동 탄압과 부도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삼성에스디아이 사내 하청 해고자 최세진, 대형 유통업체 홈플러스에서 오랫동안 투쟁하며 여성 노동자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애쓰는 황옥미.

    한 사람이나 몇몇이 걸어간 길은 역사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아니 수백만의 사람이 걸어간 길은 역사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아도 역사가 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8인의 이야기는 1970-8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수백만의 여성이, 우리의 언니들, 누나들, 어머니들이 함께 걸어갔던 가난과 고통과 투쟁과 눈물과 희망의 이야기이자 역사다.

    그 이야기와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보자.

    가난의 내력_평생 비정규직, 오경숙

    59년생 오경숙 씨는 열네 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의집살이로 노동을 시작했다. 이모 집에서부터 병원장 집, 약사 집 등을 거치며 가사노동자로 일하다가 스물넷에 결혼을 한 후에는 부업과 공장 일을 병행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져 월세 집을 전전하며 구로동의 삼화인쇄, 가리봉 공단의 천재교육 등에서 일용직, 주급제로 일하던 중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닥치고 공장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고된 노동에 병을 얻어 5년간 하혈을 하면서 일하기도 한 오경숙 씨는 공공근로, 자활후견기관 일을 거쳐 지금도 가사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내 뜻으로 그만두기를 바라는 노동자_파견직 텔레마케터, 김희영

    상업계 학교를 졸업하고 전자업체에서 잠시 일을 하다 고향에 있는 지역 문화원에서 10년 동안 일한 김희영 씨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사하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육아에 전념하다 다시 일을 하려고 보니 공공 기관에도, 공장에도, 사무실에도, 그 어디에도 정규직 일자리는 없었다. 결국 파견직 텔레마케터로 일하게 된 김희영 씨는 임금수준도, 근무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규직 근로자들과의 차별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했다.

    6개월 계약을 연장하기를 몇 차례, 일한 지 2년이 되자 회사는 2년간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의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선심 쓰듯 다른 지점에 신규 입사할 것을 제안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2년이라는 경력을 말끔히 지우고 다시 묵묵히 2년을 일한 김희영 씨는 지금은 아웃소싱 업체인 택배 회사의 콜센터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정규직이 없는 아웃소싱 업체이니 근무 조건은 더 나빠졌지만, 여기를 그만둔다고 해도 김희영 씨가 갈 만한 ‘더 나은’ 일자리는 없다.

    일하는 아이들_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 하연이

    고등학교 2학년인 하연이는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다가 곧장 패스트푸드점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최저임금에 맞추어 시간당 2,840원을 받고, 저녁이면 식사로 제공되는 햄버거를 30분 안에 먹고, 매장 영업시간인 10시를 훌쩍 넘겨 햄버거가 다 팔리고, 손님들이 모두 나가고, 매장 정리가 끝나는 11시, 때로는 12시까지 일을 한 뒤 버스가 끊길세라 부랴부랴 귀가를 서두른다. 물론 햄버거를 먹는 저 30분과 초과 근무를 한 10시 이후의 노동은 임금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렇게 발에 물집 잡히고 다리가 퉁퉁 부어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하연이는 7년 후, 만 스물넷의 미용 노동자가 되었다. 하루 12시간씩 서서 일하며 한 달에 100여 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는 일이지만 하연이는 기죽지 않는다.

    노동과 삶에서 글을 길어 올리는 사람_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추송례

    전라남도 완도가 고향인 추송례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의 언니 집으로 올라와 염색 공장, 대성목재를 거쳐 동일방직의 노동자가 되었다. 동일방직에서 노동 현실에 눈뜬 추송례 씨는 노동조합에 가입해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장에 들어갔다 하면 사흘이 멀다 하고 쫓겨나는 생활을 하며 10여 차례 넘게 붙잡혀 가 실형도 살고 모진 고문도 당했다.

    노동운동을 하는 게 목숨을 내거는 것과 마찬가지이던 7,80년대였다. 1987년, 철도 노동자였던 남편이 과로사로 세상을 떠난 후 절망을 딛고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추송례 씨는 시각장애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새로 가족을 꾸리고 지금은 시각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며 여전히 “노동자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투사로” 살고 있다.

    노동자 이야기_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사무장, 이정자

    스물 갓 넘어 결혼해 아이 셋을 키우며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살림만 하던 이정자 씨는 빚보증 서준 일이 잘못되면서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1년이면 되겠지, 하며 눈물 바람으로 공장을 다니던 이정자 씨는 그 1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면서 차츰 공장 생활에 적응해갔고, 이정자 씨가 다니던 태연정밀이 1989년에 본사인 나우정밀에 합병되어 나우정밀 노동자가 된 후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부터는 노동조합 간부를 맡아 나우정밀이 1997년에 해태그룹으로 넘어가 1998년에 문을 닫고 노동조합도 해산하기 전까지 대의원, 회계감사, 부위원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후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장으로 일하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에서 노동자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권리를 찾는 일에 힘을 보탰다. 지금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병으로 돌아와 바깥일에서 손을 놓고 쉬고 있지만, 이정자 씨는 자신에게 삶을 일깨워준 노동과 노동조합 활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스스로 목소리 내어 싸우기_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장, 박남희

    1981년, 가난을 이기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곳을 찾은 박남희 씨는 그렇게 노동야학을 만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99년 8월 29일에 만들어진 전국여성노동조합에서 서울지부장을 맡았던 박남희 씨는 2007년 1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전국여성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도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일했다. 30년 노동운동을 해온 박남희 씨는 오늘도 노동의 가치가 골고루 인정받고, 노동자가 최소한 살아갈 정도는 보장이 되는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태풍을 막아내는 투쟁_삼성에스디아이(SDI) 하이비트 해고자, 최세진

    최세진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상 청정원을 시작으로 대한펄프, 웨스턴 바, 인터넷 게임 회사, 소주방 등 참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일을 하다 삼성에스디아이 사내 하청 제이제이엔테크에 들어가 휴대폰 액정 패널 만드는 일을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원청과 하청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최세진 씨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삼성 기업으로 출근해 일했지만 ‘삼성 사람’도, ‘삼성 가족’도 되지 않았다.

    제이제이엔테크에서 일한 지 1년 반이 되자 회사는 문을 닫았고, 일하는 사람도, 하는 일도 그대로인 채 회사만 아웃소싱 회사인 ‘하이비트’로 바뀌었다. 이런 ‘전환배치’를 통해 삼성은 20여 개이던 사내 하청 회사를 차례차례 정리해나갔고, 맨 마지막으로 하이비트가 2007년 3월에 문을 닫았다. 삼성에스디아이가 외국에 공장을 세우는 동안 필요한 물량을 뽑아내느라 잔업과 특근에 혹사당하던 노동자들은 졸지에 갈 곳을 잃은 신세가 되었고, 뜻있는 노동자들이 모여 삼성에스디아이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해고자 대표를 맡은 최세진 씨는 울산 시청 앞에 천막을 치고 원직 복직을 목표로 동료 노동자들과 1년여를 투쟁했지만 결국 원직 복직은 이루지 못하고 삼성에스디아이와 협상 끝에 투쟁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해서 2008년부터 항공기 회사에서 일하게 된 최세진 씨는 또다시 지독한 노동에 혹사당한 끝에 병을 얻어 꼬박 1년 6개월을 아팠다. 지금은 네일샵을 하는 언니와 함께 미용 서비스 노동자로 일하며 사람들의 손을 보살피고 있다.

    투쟁, 비망록을 펼치다_이랜드 일반 노동조합 홈에버지부, 황옥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79년부터 유통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한 황옥미 씨는 결혼 후 10년 동안 미용 일을 하다 2000년에 까르푸 면목점에 입사했다. 까르푸가 홈에버가 된 후로도 죽 수납팀에서 일하던 황옥미 씨는 2007년 12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파업을 주도한 데 대한 책임으로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랜드 그룹은 2007년 7월 1일,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계산 업무를 외주화하며 대량 해고를 단행했고, 그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파업은 무려 510일을 이어져 2008년 11월에 끝났고, 그 오랜 투쟁의 고통을 견딘 황옥미 씨는 2009년 1월에 신규 채용 방식으로 복직되었다. 지금은 홈플러스 노동조합의 면목지부장을 맡고 있는 황옥미 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의 벽을 없애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