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의 첫사랑과 담배공장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3]성냥공장과 전매국에서의 여성노동자
        2013년 02월 01일 0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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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출신 할머니의 생애사-2 기사 링크

    (필자) 일본놈 만드는 학교라고 안보낸거 아녜요?

    (김미숙) 맞어, 일본놈 학교은 쌍놈 교육이니 웬수놈들 교육이니 하면서 안가르친 것도 있을거야. 일제 끝날 때 우리 오빠가 서른 네 살이었어. 벌써 장가도 가고 애들도 많이 크고 그럴 때지. 그 올캐라는 게 나하구 아주 안맞었어.

    밤마다 꼬박꼬박 야학을 다녔어. 하여튼 난 어디 댕기면 출석 하나는 잘해. 지금도 그렇잖아. 시간도 절대로 안늦고 일찍 가지. 일주일에 육일, 토요일도 하고 일요일만 빼지. 그래도 일요일은 또 교회 예배가 있으니까 야학은 안가도 교회는 가지. 그 때부터 그 교회를 십년 너머를 계속 다녔어. 그 이후로도 계속 기독교 신자로 산 거야, 지금까지. 일곱 살부터 열일곱까지 십년 너머를 계속 그 교회를, 거의 한번도 안빠지고 다닌거야. 일년에 한번씩 생일축하도 해주고 같이 놀러도 가고 하니까 재밌었는데, 나이 들어서 장년반 올라가니까 재미가 없어졌어. 교회 이름은 …. 생각 안나. 남신리 교회였을라나? 교회 다니는 거, 어머니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어. 부모가 다니지는 않았지만 머라 그러지는 않았어. 교회 다니고 야학 다니고 하면 맨날 늦게까지 집 바깥으로 돌구, 집에 있는 날이 없는 거지. 그런데 우리 부모가 ‘쟤는 그냥 그런 애구나….“, 하고 놔 둔거 같아. 주일학교 이름이 남신리 주일학교였어. 그루구보니 교회 이름도 남신리 교회(당시 평양 개신교의 주요한 근거지 중 하나가 남신리 교회였음. 당시 숭실학교 학생들이 남신리 교회를 빌려 지역 청소년들에게 야학을 개설하였었다고 함.)였겠네.

    (필자) 교회에서랑 좋아하는 남자도 있을셨을 거 같은데요?^^

    (김미숙) 교회에서 남자사귀고 그런 기억은 없어. 교회에선 못느꼈고 우리 집 근처에 솥 만드는 공장이 있었는데, 그 일본인 사장 양아들로 있는 사람에게 첫사랑을 했어. 그 사람은 조선 사람이었어. 열일곱살 때지. 우리 집 연탄 쌓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집이 보여. 그 남자도 어딜 가려면 자전거타고 일부러 우리 집 앞을 지나서 가고 그랬지.

    그 사람을 알게 된 건 사진 때문이야, 내 독사진. 우리 오빠가 친구들 다섯이서 의형제를 만들어서 맨날 모이고 그랬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여동생이 있었어. 그 여동생이 나랑 친구가 됐는데, 내가 내 사진을 줬었거든. 근데 그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그 사진을 달라 그러면서 가져갔다는 거야.

    그 남자는 오빠랑 의형제는 아니지, 나이가 아주 다르니까. 그 사람은 나보다 세 살 위였어.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내 여자 친구랑 어떻게 먼 친척이든가 그랬어. 내 사진을 가져갔단 말을 듣고, 내가 그 사람한테 쫓아간 거야. ‘왜 남의 사진을 가져가고 그러냐’고, 달라고 해서 뺐어왔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은 달랐던 거야. 키는 작은 데, 생긴 것도 괜찮고 사람이 아주 똑똑했거든. 그러니까 일본 사장이 양아들을 삼고 했겠지. 그러고도 자주 봤어, 바로 이웃이니까. 사귀자 만나자 머 그런 말이 오고가면서 만난 건 아니구, 서로 일부러 만날 일을 만든 거지.

    내가 그 때 그네 좋아하니까, 자기네 집 앞에 그네 매놓고 그랬어. 그러면 그 사람 없을 때 내가 그 그네를 타고 그랬지. 근데 내가 그거만 타면 어디서 와서는 밀어주고 하는 거야. 서로 좋아했던 거지.

    친구가 많이 말리더라구. 니가 삼남매 막내딸 귀한 자식인데, 일본집 꼬치까이를 좋아하면 되겠느냐는 이거지. 꼬치까이가 머슴이라 그 소리야. 그런 사람 좋아하면 큰일나니까 일찌감치 단념해라 단념해라 그러더라구. 그 말도 맞다 싶기도 했어. 그 남자는 아마 생모가 없고 서모한테서 자랐다는 거 같았어. 친구 말이 그럴 듯도 하다 싶어서, 내 마음이 왔다갔다 하고 그랬어.

    그러다가 언제가 한번 나를 붙잡고 자기 월급날이 내일 모렌데, 그날 영화 보러 가자고 하더라구. 그런데 내가 안간다고 그랬어. 마음은 안 그런데 왜 그랬나 몰라…. 일본 집 꼬치까이라는 친구 말에 마음이 오락가락 했던 거겠지.

    그러구 나니까 안보이는거야. 우리 집 앞으로도 지나도 안댕기고, 그런데 나는 너무너무 보고 싶더라구. 그런데도 그렇하구 끝났어. 나도 친구가 말리는 말이 그럴 듯도 하고, 집에서 알면 큰일날 듯 해서, 더 어떻게를 안한거야. 지금 가만~ 생각하면 그 사람하고 살았으면, 이렇게 남한 땅 와서 아무도 아는 사람없이 고생만하고 살지 않고, 편하게 살았을 거 같어.

    해방되고 일본사람 쫓겨날 때 재산을 많이 남기고 갔거든. 그 공장도 양아들에게 인계해 주구 갔다고 하더라구. 그러니 살기가 좋았을 거 아냐. 근데 머 모르지, 그 팔자는 또 어떤 팔자였을지.

    그렇게 안보고 나서 한 이년이나 있다가 길거리를 지나는 데, 누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느낌이 드는거야. 그래서 돌아보니까 그 사람이더라구. 근데 그 눈빛이 “니가 나 싫다고 하고, 어디로 시집가서 어떻게 잘 사나보자….”하는 식으루, 앙심을 품고 있는 눈빛이었어. 글쎄 내 생각에 그렇게 느껴지더라구. 내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보였나 어쨌나는 몰라도, 하여튼 앙심을 품은 눈이었어. 그러고는 다시 못봤어. 나중에 장가갔다는 말은 들었어.

    그 시절 또래들 특히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연애하고 남자 사귀고 쳐다보고 하는 거는 있기는 했지만, 별로 많지는 않았어. 내가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는 몰라도. 교회에서 남자 고등반 여자 고등반 그렇게 갈라서 서로 헌금이니 전도니 가지구 경쟁하고 그러기는 했어. 여자들이 늘 이기지. 그러면 여자반으로 우승기 갖다 놓구, 다같이 우승가를 신나게 부르고 그랬지.

    “오늘의 우승은 우리 반이니, 다음 주를 위해서 힘써 일하자.”

    여자반이 맨날 이겨. 남자들이 머 돈이 있어 직장이 있어 머가 있어? 여자들은 모두 직장다니면서 돈 벌고 그러잖아. 피복공장이나 전매국, 고무공장, 모두 여자들이 많이 다니는 공장들이었거든. 남자들은 별라 직장이 없어. 그런 공장에 가면 남자들은 숫자가 많지가 않았고. 공장 직공들은 거의 대부분 여자구 책임자나 남자들이 좀 있지. 그래서 돈 많이 버는 여자들 반이, 밤나 이기는 거지. 돈을 벌어야 머든 하는 거자나….그렇게 고등반까지는 재밌었는데, 장년반 올라가니까 여엉 재미가 없어진거야.

    <2차 인터뷰>

    * 2차 인터뷰를 위해 어르신 댁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옷걸이에 걸어놓으신 자주빛 코트 얘기부터 하신다. 며느리 선물이라신다.

    (김미숙) 저기 가정의원 의사가 내가 맨날 같은 잠바만 입고 가니까, 지난 번에는 ‘옷이 이것밖에 없냐?’고 그러더라구.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어려서는 옷이구 머구 내가 갖고 싶은 건 다 가졌댔는데, 서울와서 한동안은 살기가 바빠서, 새옷이라구는 사본 적도 받아본 적두 없어서 옷에 맺힌 한이 많아.

    그래서 먹구 살만 해서부터는, 옷값은 안애끼구 살거든. 그래선가 그 의사 말에 괜히 화딱지가 나구 처량한 마음이 들더라구. 그르구 있는 데 며느리가 지난 주말에 아들이랑 오면서 저 코트를 가져 온거야. 선물받은 건데, 자주빛이어서 목사는 입을 수 없으니까 나더러 입으라는 거지. 색깔이 좀 쎄기는 해도, 내가 키두 크구 가다가 좋으니까 왠만한 건 잘 어울려. 내가 얼굴은 안이뻐두 키두 크구 몸매가 좋아서 옷맵시는 나거든.

    * 늘 맘에 안들어하시던 며느리 선물에 신이 나신 것도 좀 의외고, 자주빛 코트를 자신있어 하시는 것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나 있는데, 할머니는 당장 입혀달라시며 일어나신다. 옷걸이에 걸어놓은 거랑 직접 몸에 입는 거랑은 다르다시는 거다.

    (필자) 아유, 딱 어울리시네. 딱 어르신 입으라구 만든 옷이네. 아구, 그 며느리 이쁘다아~. 자기 친정어머니랑 친정 식구들 놔두구, 시어머니한테 선물할 생각을 하구.

    * 내가 좀 과장하며 특히 며느리네 친정까지 들먹이며 옷 칭찬을 하는 것은, 전에 들어놓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김미숙) 그르게, 그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몰라. 나 죽는다고 내 옷 다 가져간 게 마음에 걸렸었나부지. 내가 이걸 입구 복지관에 갔다가 버스 네 번 갈아타구 복지관에 오는 여든 여덟 할머니가 왠 옷이냐구 물어와서 이래저래 며느리가 선물받은 걸 나를 줬다…그르니까, 글쎄 이걸 자기를 달라는 거야. 나두 모처럼 며느리한테 맘에 드는 선물을 받은 건데 말이야.

    * 나중에도 나오지만 할머니는 옷에 대해서는 각별한 아픔과 기억이 있으시다.

    (필자) 그 양반 무슨 말씀이래~? 외며느리한테 선물받은 걸 달라는 경우가 어딨데요? 글구 어머니, 색깔도 아주 좋아요. 연세 드시면 좀 야하게 입으시는 게, 화사하고 젊어보이시거든. 얼굴빛도 살아나서 한결 건강해 보이시네~.

    * 미워하는 외며느리 칭찬을 슬쩍 내편에서 한술씩 보태며, 옷에 대한 할머니의 흡족함을 거들었다. 옷자랑과 몸매 칭찬으로 한바탕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겨우 지난 번에 이은 구술로 가닥을 잡았다.

    청소년/청년 시절의 직장생활

    (김미숙) 열 살부터 다니던 야학을 삼년을 마저 못채우고 때려 치우구두, 교회는 계속 다녔어. 야학 그만두구 나니 내가 집에서 할 일이 아무 것두 없자나. 내가 머 살림을 할 것도 아니구. 그래서 댕기면서 돈이나 벌려고 처음엔 집 앞에 있는 커다란 성냥공장을 무작정 찾아갔어. 나이도 안보고 학력도 안보고 하는 공장이었지.

    일제시대 인천 성냥공장의 모습(출처inchon.edukor.org/i_2/in2000_3.htm)

    가서 일을 하는 데 성냥개피를 한 웅큼씩 집어서 성냥통에 넣어서는 탁탁 쳐서 꾹꾹 채워넣는 건데, 아 그게 여차하면 성냥 대가리끼리 부닥쳐서 불이 나는 거야. 그러면 손을 디고 그러잖아. 어떤 날은 하루에 세번을 디는 거야. 그러면 공장에서 약을 발라주거든.

    하루는 감독이 “너는 일하는 시간보다 디는 시간이 많구나.” 그러는 거야. 거기는 오래 못다니구 그만 뒀어. 그러구는 바로 이어 열네살부터 전매국(조선총독부 전매국(朝鮮總督府 專賣局)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치된 조선총독부 소속의 관청이다. 담배, 소금, 인삼, 아편, 마약(모르핀)류의 전매 사무를 관장하였다. 본부 직할의 지방전매국이 경성, 평양, 대구, 전주에 있었다.)엘 다녔지. 그 때부터 제대로 직장 다니면서 돈을 번거야. 지금 여기로는 전매청이지. 인삼은 모르구 담배만든 것만 알아.

    내가 전매국 입사 시험 볼 때는 다행히 ‘맻 분 동안에 모 맻개 꽂는 거’, 그 실기시험을 안했어. 내가 손이 굼떠서 그거 있었으면 불합격 났을 거야. 취직 시험도 상당히 어려워. 필기시험은 없고 구두시험이 있었어. 학력두 보구 어려웠어. 나 야학다닌 거를 쳐준 거지. 그 때 전매국이면 최고 공무원이거든. 석달만큼 상여금두 나오구, 석달만큼 승급두 해주지. 일류 공무원이야.

    영감들 대담배피는 거 있자나, 그 대담배 담배가루를 네모난 봉투에 넣는 일을 했어. 저울에 일일이 달아서 넣는데, 근데 그게 그렇~게 힘든 거야, 나는. 여름엔 곰팡이 날까봐 빳~짝 말려가지구는 네모난 봉투에 꽉~꽊 눌러서 넣는 거야. 종일 서서 키가 작으니까 발뒤꿈치까지 들고 온몸으로 눌러가면서 손꾸락으로 꽉꽉 눌러야 하니까, 그게 아주 힘든 일이야. 봉투가 지금 담배갑보다 조금 커. 노인네들 갖구 다니는 용이지.

    담배 포장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사진 출처는 서울시사편찬위)

    내가 열네살이니까, 원래 거기 안들어가고 까치담배 싸는 그 일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 그 때 호적에 나이가 세 살이 늘어 있어요. 왜냐면 옛날엔 딸을 생각도 안했잖아, 안좋아했자나. 우리 엄마가 내리 딸을 셋을 나니까 나를 출생신고도 안한거야. 그러다가 내 바로 위 언니가 네 살이나 되다 죽었는데 사망신고두 안하구, 그 죽은 언니 호적을 내가 쓴 거지.

    나한테는 출생신고를 안하고 그 언니는 사망신고를 안하니, 내가 호적으로는 그 언니를 이어서 사는 거야. 그러니 세 살이나 더 먹게 된 거지. 내가 그 언니가 된 거야. 이름은 그 때 셋째 딸이라고 집에서는 ‘삼례,삼례’ 했었고 그 언니를 집에서 머라 불렀는가는 생각도 안나. 출생신고 때 그 언니 이름이 내 지금 이름 ‘미숙’이였던가봐.

    어릴 때야 머 호적 볼 일도 없으니 몰랐는데, 전매국 취직되서 호적을 떼오라 그래서 보니까 나이도 세 살이나 많고 이름도 ‘김미숙‘이더라구. 그 언니는 일찍 죽었으니까 호적 이름은 부르지도 않고 죽었을 거야. 어릴 땐 호적 이름 안부르고 집에서 부르는 이름을 따로 쓰고 그랬거든. 내가 야학 다니면서도 ’김삼례 김삼례‘ 그랬거든. 하여튼 그래서 내가 전매국에서 열네살 나이로 열일곱살짜리 일을 할려니까 그게 얼마나 힘들어. 원래 열네살은 까치담배 싸는 거니까 힘이 안들거든.

    그 때도 늘 손가락하고 손 등이 튀어나오고 했다니까. 그게 다 지금 관절염이 되고 손가락도 비뚤어져서 베기 싫고 그래. 어려서 그런 일을 해가지고. 한 일년 반 다니는 데, 너무너무 골이 아프고 힘들어.

    하루 목표량이 있는 데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그걸 못하는 거야. 어리기도 하고 또 내가 손이 느려. 그러면 거기는 감독 보구 ‘선생, 선생’ 그렇게 부르거든, 그 선생이 나를 불러서 야단을 치는 거지. 그런데다가 담배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몰라. 직접 쌂고 건지고 말리고 하는 거니까. 오빠랑 아버지도 담배 폈었지만, 그냥 담배피는 사람 옆에서 연기마시는 그거랑은 아주 달라. 공장 100메터 앞에만 가두 벌써 골이 아파 오는거야. 그러니 일년반 쯤 다니고는 그만 둔거야.

    (필자) 전매국 다닐 때 친구들과 재밌는 일들도 많았겠네요.

    (김미숙)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가 어리니까, 같이 재밌게 놀러 다니고 한 기억은 많이 없어. 월말에 월급 타다 엄마한테 바치면 엄마가 딱 31일치 전차표 값을 주지. 그럼 30일 되는 달이 있잖아. 그럴 때 그 하루치 전차값 남은 돈으로 십전어치 빵을 사먹는 맛이 있었지. 어떨 때는 일 끝나면 누가 “오늘 차타지 말고 걸어가서 빵사먹자.” 그러는거야. 그럼 같이 어울려서 빵집가서 왁자하게 떠들면서 빵 사먹고는 집까지 또 떠들고 노래하고 하면서 오고 그랬지.

    그때는 그저 자식이 벌어서 부모네 갖다주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월급 봉투채로 열어도 안보고 어무니한테 바치는 거지 머. 어머니가 밥도 해주고 옷도 빨아주고 다 해주니 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딱 주는 차비만 받고, 어떨 때 필요하면 또 달라 그러구.

    전매국 그만 두고도 노는게 아냐, 나는 노는 성격이 아니지. 게다가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먹구 놀면 병신취급을 하는 분위기야. 사람 취급도 안해. 나두 못노는 성격이구. 그만 둔 날부터 당장 다른 공장들을 돌아다녀, 자리 구할려구. 고무공장 피복공장(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 공장이 평양에 많이 있었음.) 그런 게 많았거든.

    그래서 그 바로 이튿날에 고무공장 시다로 들어간 거야. 시다는 쉽잖아. 그러면 그저 꼬박꼬박 열심히 가는 거는 잘 해, 나는. 시다를 한 3년 다니면 미싱 한 대씩을 줘. 시다에서 미싱사가 되는 거지. 미싱사는 많이 하면 많이 벌고 적게 하면 적게 벌고 그렇게 돼 있는 데, 남 천원 벌면 난 백원밖에 못 버는 거야. 일을 못하니까. 난 부지런~~히 하는 데도 그것 밖에 못해. 배우는 건 금방 배워, 눈쌀미가 있어서. 근데 일이 속도가 안나. 그러니 자꾸 선생한테 불려가 잔소리 듣게 되고 그러면 또 차차 싫어지는 거지. 그러다가 공장에 누구 마땅치 않은 사람 생기면 그걸 핑계 삼아 그만 둬버려. 어디든 맘에 안드는 사람은 있는 거잖아. 근데 그걸 핑계삼는거지.

    그래서 그만 두고는 또 그 이튿날부터 근처 공장들을 돌라 치는 거야. 그럼 그 때는 어떤 공장이든 자리는 많거든. 한 삼년 이상 댕기니까 머가 어쨌든 미싱 기술자 아냐?…. 그러니까 금새 취직이 돼. 그래서 사흘 너머를 안 쉬어 봤어. 아무데나 가면 오케이야. 일한다구만 하면 어디든 쉬는 미싱이 한 두 개 너머씩은 꼭 있었거든.

    아 근데, 그러다가 스물하나에 내가 여기(남한) 와보니까 어디 갈라면 행주치마 둘러치고, 너무너무 촌스러운거야, 여자들이. 거그 여자들은 다 공장 다니구 돈벌구 하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세련됐지….여그는 어디 갈라면 행주치마 두르고 머리에 수건 두르고…너무 너무 촌스러운거지.

    고무공장은 운동화나 군화 같은 거 만드는 거 했어. 미싱부는 그런 신발들 박는거구, 풀칠해서 바르는 접착분가 그런 부도 있었는데 나는 거기는 안가봤어. 열네살부터 스무살까지 칠년을 거의 안쉬고 공장을 다니면서 재미나게 지냈어. 월급 통째로 갖다주니까, 중간에 내가 머하게 돈 달라 그러면 엄마가 잘 줬어. 그러니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입고 싶은 거 사입고, 교회 친구들이랑 놀러도 마음대로 가고, 아무래도 여유가 있지.

    평양서는 버는 식구가 많으니까 쌀밥을 많이 먹었지. 근데 나는 흰쌀밥은 맛없다고 안먹었어. 그 때나 지금이나 흰쌀밥은 싱거워서 안먹어. 그러면 우리 엄마가 오빠랑 올캐 몰래 옆구리를 꾹꾹 찔르면서 움켜쥔 손을 삐죽 밀어서 돈을 쥐어줘, 냉면 사먹으라고.

    우리 집 바로 길 건너가 냉면집이었거든. 평양냉면 맛있잖아. 그 시절에 쌀 밥 안먹는다고 냉면 값 쥐어 준거 보면 우리 엄마가 나한테 잘했어. 많이 낳아서 죽고 셋 건졌으니까 귀해서 그랬나봐. 그 시절이 남들은 좁쌀밥도 못먹던 시절인 데, 밥 안먹으면 야단치지 누가 냉면 값을 쥐어 주겠어?

    내가 또 냉면을 두 그릇을 먹어요~. 한 그릇으루는 배가 안부르거든. 냉면이 양이 적어. 한 그릇으룬 양이 안차는 걸 아니까 우리 어머니가 두 그릇 값을 줘. 그럼 당장 그돈 들구 길 건너 냉면 집으로 가는 거야. ‘중머리’라 그러거든, 냉면 집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내가 ‘곱빼기 주세요.’ 하고 앉으면 그 새끼들이 지들끼리 히히 대면서 웃어. 보통 곱빼기는 한 그릇에 많이 주자나?

    근데 내가 곱빼기 달라구 하면 그릇 가득해서 두 그릇을 따악 갔다 놓고 가. 세그릇 양이 되는거지. 그러구서는 또 저그들끼리 나를 훔쳐보면서 낄낄대고 웃는 거지. 그러면 나도 보란 듯이 그걸 다 먹고 나와. 그럼 내 뒤에다 대고 또 지들끼리 낄낄대고 난리야 그 새끼들이. 난 고생하고 크지는 않은 거지. 넉넉하게 큰 거야.

    언니는 집에서 엄마 도와서 밥하고 빨래하고, 나랑은 달랐어. 같은 북쪽 여자여도 다른 거지. 밤나 집에서 어머니 일만 도우니까, 우리 엄마는 우리 언니만 좋아하고. 나한테는 “저 년은 그냥 돈도 많이 벌어오는 것도 아닌 게 맨날 싸돌아만 다닌다.”구 구사리를 했어. 허구 헌날 옷 빨아 대주니 귀찮지. 다른 집도 여자가 공장 다니는 집이 많았어. 가만 보니까 내가 집에서 할 일이 없잖아, 그래서 공장을 다닌 거지. 식구도 다섯밖에 없는 데 살림은 우리 언니랑 엄마가 하고, 나는 살림 같은 건 재미도 못붙이고 하니, 직장 다니고 교회 다니면서 밤나 바쁘게 나다녔지. 집에는 별로 없었어.<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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