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쏘련의 자유 vs 미국의 자유
    [미래를 향한 추억⑤] 한 망명객의 자유, 평등 & 자살
        2013년 01월 30일 0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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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냉전이 깊어져 가는 시대, 서방 진영에서 이른바 ‘빅뉴스’가 터진다. 소련의 중급 관료가 서방 진영으로 망명해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그보다 2년 앞선 1944년. 금속엔지니어 빅토르 크라브첸코(1905-1966)는 쏘련 군수물품 구매위원회 소속으로 워싱턴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이 해 미국에 망명 신청을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러시아계 유대인 기자와 함께 책을 써낸다. 제목이 너무나 ‘섹시’하다. 『I Chose Freedom(나는 자유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사회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혁명적 노동자 가정 출신인 크라브첸코는 이 책에서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와 인륜을 배신했다”고 통렬하게 고발한다.

    노동자 월급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간부들의 월급, 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는 일선 노동자들과 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간부들과 고급 기술자, 농업집단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농민에 대한 폭력과 설상가상으로 닥친 1937년의 스탈린의 대숙청…. 민주적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크라브첸코는 쏘련에서 배신자 취급을 당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스탈린이야말로 사회주의를 배신한 폭군이었다.

    자유 없는 스탈린 체제, 정의 없는 자본주의

    크라브첸코의 개인적인 입장은 반사회주의가 아니라 ‘반스탈린주의’였지만, 냉전이라는 맥락에서 그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노 어린 고발은 서방측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됐다. 반공주의자들에게는 크라브첸코의 사회주의적 신념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지 그가 묘사한 쏘련 인민의 가난이나 억압적인 독재, 보안기관 수사실의 구타 등 쏘련 체제를 악마화하기 위한 좋은 ‘재료’였다.

    51년 한국에서 출간된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

    반공 진영의 요새가 돼가던 남한에서도 크라브첸코 책의 국역이 두 권이나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에 국제문화협회에서 이원식의 번역으로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가 상하권으로 펴냈고, 또 6.25 전쟁이 끝난 후 허백년의 번역으로 동해당에서 같은 제목으로 다시 펴냈다.

    사회주의자 크라브첸코의 분노를 자아낸 민중의 가난이나 보안기관의 폭력 내지 민주주의 부재는 그 당시 남한에서도 마찬가지거나 훨씬 더 심했지만, 일본 식민지 시대 때부터 특히 많은 지식인들에게 ‘꿈의 나라, 미래의 나라’로 보였던 쏘련이 사실상 악몽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을 거듭해서 번역 출판하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 책 덕분에 남한까지 알려지게 된 크라브첸코는 자신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선택한 자유를 십분 누렸던가? 그는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미국의 공식적인 자유 중의 제일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 그는 1950년에 새로운 책을 펴냈다. 두 번째 책의 제목은『I Chose Justice(나는 정의를 선택했다)』.

    그의 두 번째 책은 미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비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월가의 큰 돈이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나라, 특정 후보의 진영에 미리 기부한 부자들이 선거 승리 후 대사직 등을 나눠먹는 것으로 보상 받는 나라, 전 세계의 민족해방운동들을 탄압하고 군사적 간섭정책을 추진하는 나라, 이런 미국은 크라브첸코가 생각했던 평화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와는 너무 달랐다. 이제 자유인이 된 크라브첸코의 비판에 대한 미국 사회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

    바로 철저한 무시와 어떤 체질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새로운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크라브첸코는 “적색 환상에 여전히 빠져 있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결국 그는 미국보다 주로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남은 일생을 지냈으며, 사업 실패와 고독감으로 인해 1966년 뉴욕 자택에서 끝내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미국의 자유를 스탈린주의와의 싸움에서 이용하고 싶어 했으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도저히 적응해서 살 수 없었던 그에게 자살은 마지막 자유가 아니었을까?

     선택 없는 선거, 거주 이전의 구속

    보통 쏘련을 비판하는 이들의 가장 핵심적인 논거는 “거기에 자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크라브첸코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이 말은 일면으로 맞다. 크라브첸코 책에서 나오는 그의 수많은 친구, 동지들은 평등과 민주적 사회주의 이상을 짓밟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서 사석에서는 통절한 비판을 해도, 공석에서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그런 행동은 아마도 자살 행위에 가까웠을 것이다.

    스탈린 시대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원고의 사전검열제는 사실상 고르바초프의 개혁 시절인 1989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예컨대 고대의 향가나 시조 내지 <구운몽>을 연구했던 제 스승들 같은 경우에는 검열제의 존재 자체를 그다지 인식하지도 않았다. ‘정치적 의미’가 없는 학술 분야들 경우 대개는 주된 검열 기관인 글라블리트(Glavlit, 중앙 서적 관리소)의 검열을 받을 일도 없이 출판사의 책임제로 알아서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열 기준 중의 하나는 ‘외교적 문제 유발 요소 유무’였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박헌영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한국 근대사 책을 공개적으로 펴내기가 어려웠다. 검열기관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보통 책을 펴내더라도 내부 유통만 가능한 준(準)비밀 서적으로 분류했다. 누가 봐도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먼 학계 내부만의 소통 방식이었다.

    이외에도 크라브첸코가 그 책에서 분노 어린 목소리로 언급한 수많은 자유의 침해 내지 제한들은 분명히 쏘련에 존재했다. 선거의 경우 보통 당에서 지역 주민에게 인기 있는 모범 노동자나 기술자 등을 후보로 추천해 형식적으로 치렀지만, 이는 한 명뿐인 후보를 가지고 치르는 그야말로 ‘선택 없는 선거’였다.

    서민들에게 가장 무거웠던 것은 ‘선택 없는 선거’보다 거주지 이동 선택의 제한이었다. 1932년, 즉 스탈린화가 본격화된 시점부터 다수의 쏘련 공민들에게 국내 여권(남한의 주민등록증과 동일함)의 소지가 의무화됐으며, 그 국내 여권에서는 거주지가 찍혀 있었다. 거기에서 찍힌 거주지를 바꾸자면 새로운 거주지에서 일한다는 재직 증명서가 필요했는데, 다른 지역을 거주지로 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채용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대학을 졸업하는 등 신분이 변경돼 새로운 취직 자격을 갖추게 되면 거주지도 바꿀 수 있었지만, 새로운 거주지의 선택은 언제나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당국 입장에서야 식량품 보급과 주택의 무상 배분 등 경제생활이 중앙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특정 지역 인구의 돌연한 폭증은 식량과 주택 보급의 위기를 가져다 줄 수 있었지만, 좌우간 ‘밑으로부터의’ 시선으로 보자면 자유의 제한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유통 부문을 국가가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소비의 자유도 불가능했다. 쏘련 공민이 소비를 했다기보다는 정해진 목록에서 등재 돼 있는 물품을 ‘공급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자유인인가, 현대판 노예인가

    그렇다면, 거주 이전부터 소비적 욕망의 창출까지 모든 게 다 자유로워 보이는 미국에서 크라브첸코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어떤 자유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남을 위해서, 순전히 이타적인 동기에서 일해도 되는 자유는 미국에서 보이지 않았다. 자유의 반대말 중의 하나는 바로 ‘오로지 살아남기’만을 도모해야 하는 생존 투쟁이다. 평생 먹고 살만한 재산을 갖고 있지 않은 절대 다수의 자본주의 국가 평민들에게는 직장 생활이란 자유가 아닌 생존 투쟁의 일환이다.

    지금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학생들의 전공 선택부터 “과연 이 일이 나에게 평생 동안 생계를 보장해 줄 것인가?”하는 문제가 가장 크게 고려될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환경에서 경쟁력이 없어 보이는 인문학 전공 등은 비인기 학과로 몰려 만성적인 위기에 시달린다. 어떤 정부 정책도 이 같은 현상을 구제할 수 없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나면 적성에 맞든 안 맞든, 전공과 관계가 있든 없든 일단 밥그릇이 주어진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지덕지하여, 자신의 꿈을 억누르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나만의 꿈을 좇을 자유는, 특별한 개인이 예외적으로 쟁취할 수도 있지만, 원칙상 자본주의적 시스템 안에서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하게 되는 일은 나의 적이 되고 나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고 결국 나의 심신의 건강을 파괴할 수도 있다. 최근의 한 연구의 결과에 의하면 미국의 대표적인 엘리트 직업군인 의사들 중에서는 탈진 증후군을 보이는 이들은 이미 45% 이상이 된다고 한다.

    의료 보험회사들과 병원들이 요구하는 과잉 행정과 점차적으로 상실돼 가는 직업적 자율성, 이에 반해 갈수록 강화되는 노동 강도 등도 탈진 증후군의 주요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경제적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는 부자유한 직업생활의 근본 좌표들이 결국 직장인의 심신 파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된다.

    전체 근로자 중에서는 약 40%가 자신의 일터를 “지나치게 스트레스 많다”고 여기는 미국에서 탈진 증후군에 시달리면서도 해고의 위협 때문에 병가를 내는 대신 끝까지 정상 출근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면 이는 단순한 부자유를 넘어서 일종의 ‘현대판 노예상태’에 거의 가깝다고 하겠다.

    직업 선택의 자유

    그러면 쏘련은 어땠는가? 비교적 가난하게 살면서 소비할 자유를 갖지 못하고,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상당 부분 빼앗기고 있었지만, 직업 선택과 직업 생활에서 쏘련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훨씬 더 자유로웠다. 대다수 직종의 임금 수준들이 어차피 비슷비슷하고, 도서관 사서라든가 청소노동자, 보육원 보모 등 임금이 비교적 낮은 직종이라 해도 주택 등이 무료로 제공돼 기본적인 삶이 보장돼 있었다.

    따라서 돈 걱정을 상대화해서 직업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또 일터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쏘련 시대의 심리학 교과서나 정신치료 매뉴얼에는 직업 스트레스라는 항목은 아예 없었다. 직업이란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인데, 어떻게 좋아서 선택한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은 그 당시 통용되던 상식이었다.

    직업 스트레스뿐 아니다. 쏘련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단어 중의 하나는 예컨대 연구비였다. 각급 학교 및 연구소의 도서관 장서 보충 등에 국가적 예산은 할당됐지만, 학자에게 기쁨이 돼야 하는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별도의 연구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쏘련에서 그야말로 상상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같으면 학자 –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대학의 전임 교원 – 가 되려고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연구비 수입부터 안식년을 받아 미국에 자녀를 데리고 가서 영어 연습시킬 수 있는 특전까지 다 보이겠지만, 쏘련에서는 학자가 되는 것은 많은 면에서 손해를 보는 선택이었다.

    중동 고대사 대가인 댜코노프

    대학 교수나 연구소 연구원의 임금은 평균 숙련공 임금의 60~70%에 불과했고, 또 학자가 됐다고 해서 해외여행 등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정치적인 신임을 두텁게 받아 1년에 한두 번 정도 자본주의 국가같이 가기 어려운 곳에 학회 참가차 갈 수 있다 하더라도 외국에 출장 가는 쏘련 공민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출장비는 경화(硬貨)와 교환이 가능한 특별한 종류의 외환성(性) 루블화 5루블(공식 환율로는 약 10달러) 정도였다.

    그러니까 학회 때문에 1970년대에 종종 오슬로를 찾곤 했던 쏘련의 중동 고대사 대가인 이골 댜코노프(1915-1999) 같은 국제 석학도 보통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정식을 먹는 대신에 바나나와 제일 싼 빵을 듬뿍 사서 공원 걸상에 걸터앉아 먹어야 했다. 내핍 생활의 극치를 보여줬다.

    숙련 노동자보다 낮은 학자 임금

    그들이 노동자보다 더 힘들게 사는 학자의 길을 택했던 이유는? 역시 본인의 자기실현, 즉 내면적 자유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자유가 가능했던 차원에서는 쏘련은 미국보다 훨씬 더 행복한 곳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배가 약간 고픈 행복도 행복이다.

    또 하나의 쏘련적 자유라면 비교적인 출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들 수 있다. 물론 출세 지향적인 인물들이야 고금동서의 모든 사회에 다 포진돼 있다. 그러나 쏘련적 생활의 조건은 이와 같은 출세 욕망들을 상당히 억제하는 기능을 했다.

    한편으로는 출세를 도모하려는 이의 삶은 일선 노동자의 삶보다 너무나 고됐다. 노동력의 절대적 부족의 상황에서는 일선 노동자는 공장 지배인의 잔업 부탁에 “야, 이 놈, 너 같으면 마누라도 안보고 싶냐?”는 식의 욕설 몇 마디를 내뱉고는 그냥 제 시간에 집에 가도 무방했다. 그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악의 징계는 해고였겠지만, 노동예비군이 없는 사회에서 공장지배인은 이 정도의 일을 가지고 해고 절차까지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장지배인이 되려는 엔지니어는 모든 상사들과의 관계부터 원만하게 꾸려야 했고, 그의 공산당 당원증에 징계기록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지배인 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보드카를 마시려는 욕망이나 상사에게 한두 번쯤 욕을 해보는 욕망을 20~30년 동안 억제하면서 꾸준히 출세를 도모하는 대가는?

    금속공장 숙련공의 한 달 임금은 약 400~450루블이었으며, 공산당 중앙당 비서실 실장의 임금이라고 해봐야 817루블 정도일 뿐이었다. 물론 공산당 중앙당 고급 일꾼에게는 숙련공 임금보다 약 2배 정도의 임금에다가 조금 더 넓은 별장이라든가 조금 더 맛이 있는 캐비아를 싸게 살 수 있는 특별한 간부용 상점의 출입권 등 여러 특전들이 주어졌다.

    ‘집단 화합’ 위주의 사회

    그러나 그렇게 해봐야 그 특전들이 세습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아주 작은 실수를 한 번만 해도 출세가도를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또 출세에 따랐던 심적인 고통들도 만만치 않았다. 연구소 소장이나 공장지배인 등은 예컨대 부하들에게 가끔 징계를 내려야 했는데, 동료들을 약간이라도 해롭게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부정시(否定視)했던 ‘집단 화합’ 위주의 쏘련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하다가는 ‘몹쓸 놈’이라는 평판을 받게 돼 있었다.

    출세하려면 너무나 고되고, 출세 안 해도 괜찮게 살 수 있다 보니 쏘련 사회에서 노골적인 출세 지향적 인물이나 행위들은 흔치가 않았다. 한 설계연구소에서 평생 일해 온 나의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일반 엔지니어로 시작하여 연공서열에 따라 상급 엔지니어로 한 번만 신분 상승될 뿐 이렇다 할 출세를 해본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이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았다는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신이 하시는 일에 십분 만족하고, 직장에 안가는 주말에도 계속 직장을 생각하고 심지어 직장에 가고 싶을 정도라면, 더 이상 무슨 출세가 필요하겠는가?

    쏘련 생활의 많은 측면들을 자유와 부자유로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아마 곤란할 것이다. 예컨대 시장이 아닌 관료체계가 물품과 이런저런 편의들을 분배하고, 또 거기에다가 이런저런 물품 부족 현상이 만성적이었던 구조 안에서는 일종의 ‘비공식적인 물품과 편의 교환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쏘련에서는 돈을 매개로 하는 부정부패의 발생은 비교적으로 드물었고, 부정부패 행위가 적발됐을 때는 당사자에게 상당히 가혹한 처벌을 내렸지만-규모 큰 뇌물수수사건에는 사형들도 종종 내려졌다-돈보다 관계를 매개로 했던 이런 생활 편의 교환은 일반적이었으며 실제로는 징계 대상도 아니었다.

    예컨대 구하기 어려운 외국산 ‘더 비틀즈’ 레코드판과, 그것보다 더 구하기 힘든 인기 시인 오십 만델스탐(1891~1938)의 시집을 교환하면서 친분을 다지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교환도 있었다. 직장 현장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나의 어머니가 동료에게 ‘노동의 베테랑’ 훈장을 수여하게끔 추천서를 써줬는데, 그 동료가 이를 고마워해서 구하기가 좀 어려운 무료 휴양소 이용권을 선물로 갖다 주는 교환이다.

    뇌물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친분을 확인하는 의례에 더 가깝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교환/증여 경제가 조금 더 발전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부정에 거의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예컨대 대학 졸업생을 위한 레닌그라드 등 대도시에서의 첫 취직은 따내기가 쉽지 않은데, 종종 친인척과 친구들의 친구 등이 취업을 알선하고 했다.

    ‘연줄 사회’의 안과 밖

    물론 이럴 경우에도 99%는 돈이 개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연줄 사회’로서의 특징은 연줄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쉽게 부당 대우로 느껴졌으며, 또 연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주기도 했다. 전형적인 쏘련 사람들은 출세에 꽤나 무관심할 수 있었지만, 인연들을 챙기는 습성은 가히 보통의 한국인이나 일본인 이상이었다.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개개인의 자유가 일정하게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 일면으로는 관계망 속의 개인은 원자화된 서방의 현대인에 비해 훨씬 덜 외로웠으며, 또 인연들과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살아간다는 느낌으로 살 때에는 그 나름의 사람 사는 맛도 느껴볼 수 있었다. 이런 ‘관계성(性) 사회’에 비해서 거의 모든 것이 돈이 매개가 돼 거래되는 미국형 사회가 더 우수하다고 보는 것은 이는 보편의 이름을 빌린 폭력일 것이다.

    크라브첸코가 떠난 쏘련에서는 표현의 자유부터 거주 이전 자유까지 다 불충분했지만, 직장에서의 이타적인 실천의 보람부터 끈끈한 개개인 사이의 관계까지 이를 어느 정도 보상해주었던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 정도를 실현에 옮길 만큼의 잉여 자원이 없었던 쏘련 사회는 궁핍을 벗어나지 못한, 너무나 미숙하고 초보적인 비자본주의적 근대사회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 사회가 그 본래의 장점들 – 예컨대 일에 대한 열성과 애착이라든가 고도로 발전된 무료 교육체계 등 – 을 살려가면서 점차 보다 풍요롭고, 보다 정의로운, 그리고 거주 이전에 따르는 새로운 거주지에서의 아파트 배분과 같은 부담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고도의 비자본주의적 사회로 계속 발전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그 본래의 장점을 잃지 않고 표현의 자유 등을 점차적으로 허했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쏘련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발전 도중에서 돌연히 몰락했다는 느낌은, 아마도 나만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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