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야학에서 구구단 배워
    [평양출신 할머니의 생애사-2]구술을 시작하며
        2013년 01월 30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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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숙(본인은 실명을 써도 좋다고 하셨지만, 필자의 판단에 의해 가명을 쓴다) 할머니와 나의 인연은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에게 내가 요양보호사로 방문요양을 하게 되면서였다. 2009년 늦가을, 두 달 정도를 일주일에 5일 하루 네시간씩 방문하면서 요양보호를 해드렸다.

    그 과정에서 할머니로부터 듣게 된 지난 일들의 토막토막이 내게는 무척 흥미로웠다. 하여 방문요양을 그만두고 난 지 다섯 달 정도가 지난 후, 할머니를 다시 방문하여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본격적인 구술 기록에 앞서 구술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먼저 적는다.

    할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예상 외로 간단했다. 마치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기라도 했었다는 듯, 할머니는 내가 충분한 설명을 하기도 전에 삶의 중간을 툭 터뜨려 이야기를 꺼냈고, 오히려 내 편에서 이야기 듣기를 미루며 글이나 책에 대해 충분한 사전 설명을 해야 했다. 

    (필자) 센터장 이야기가 제가 어르신 방문요양 그만두고 난 직후, 다치셨다던데 많이 다치셨댔어요? 이젠 괜찮으신 거에요? 올 초 겨울에 말이에요

    (김미숙) 올 겨울? 아~ 접 때 그 일 말인가? 저 대문 근처에서 넘어져서 귀가 찢어지고 그랬어. 그래서 하루 입원했었지. 엑스레이 찍구 그랬는데 다른 데 별다른 이상은 없대구. 귀만 치료하구 하루 만에 나왔어.

    (필자) 제가 어르신 뵙자 그런 거는 지난 가을 두 달 정도 요양보호 해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눈 것 중 특히 어머니 살아오신 이야기들이 더 듣고 싶었거든요. 저는 요양보호사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해요. 이런 저런 글을 쓰는데 요즘 제가 쓰려고 하는 글은 몇 분 어르신들 특히 할머니들의 살아 온 이야기를 쓰는 거에요.

    제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할머니들 살아온 이야기를 본인이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를 풀어주시면 그걸 그대로 받아써서 글로 만들려는 거거든요. 부자나 잘난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의 할머니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그대로 엮어 보려구요.

    고생이든 재미난 거든 잘한 거든 잘못한 거든 머든 간에, 한 여자로 태어나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록하고 싶은 거에요. 어머니는 저보다 30살 정도 많으시니 나보다 한세대 위신거지, 제 친정어머니가 어르신이랑 몇 살 차이가 안나거든. 그래서 나보다 한 세대 앞선 여성 선배들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듣고, 지금 세대나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에요.

    특히 어르신은 이북출신으로 평양에서 남쪽 서울로 혼자 내려오신 분이잖아요. 아주 드문 경우거든.

    (김미숙) 우리시대 사람들이 젤로 고생도 많이 하고, 배도 곯고 그랬어.

    나는 오래 전 일은 기억이 잘나. 요즘 일이야 깜빡깜빡해도, 오래 된 일일수록 더 기억이 새록새록해. 그래서 요즘은 할 일이든 한 일이든 자꾸만 써놓는다니깐, 종이에다가. 내가 치매 초긴데 머 다른 거는 별루 없구, 요즘 일을 좀 까먹는거랑, 자주 다니는 길이 자꾸 헷갈리는 거, 그거 두 개야. 

    * 내가 방문요양을 해드리는 동안도 할머니는 가계부를 쓰시거나, 전기/가스/수도요금이나 전화요금 등을 계산하는 일들, 본인이 당일이나 일주일간 하실 일들, 내게 시켜야 될 일들을 꼼꼼하게 메모하고 그 메모를 모아놓으셨다.

    그리고 전기요금이나 가스요금 등에 대해 의혹이 있으면 언제라도 취급점에 전화를 하여 따지시는 분이었다. 다만 요즘은 그 전화가 모두 ARS로 처리되기 때문에, ARS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로서는 녹음된 여성 목소리와 한바탕 싸움을 하기도 하셨다. “이 이년아, 왜 물어보는 거엔 대답안하고 니 말만 떠들어? 너 니 상관한테 말해서 당장 짤라버리라 그럴거야? / 너 어제 전화받은 그 년이구나? 높은 사람 바꿔! 남자 좀 바꿔 봐! 이년 또 지 말만 떠드네.” ARS 씨스템에 대해 설명을 해드려도 여엉 못알아들으셨다. 많은 노인들에게 ARS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방문요양을 하는 동안 내가 도시가스와 전기요금의 확인과 더불어 빈곤 가구에게 해당되는 요금 감면까지를 신청해 드렸더니, 나를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 아시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대번에 달라지셨었다. “왜 이런 일을 해? 댁은 펜대 굴리는 일을 해도 될텐데.” 하시면서.

    나의 구술사 제안을 어르신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신 데에는 그 요금감면의 공이 크다 하겠다. 5개월 만에 다시 만난 할머니는 나를 좀 긴가민가 하시다가 ‘아하, 그 똑똑한 요양보호사구나. 가스요금 전기요금 10프로 깍여 나오게 해준 사람‘으로 반가워하시며, “내가 다른 건 다 까먹어도 그 가스요금 전기요금 깎아준 건 기억나지, 꼬박꼬박 매달 딱 1할이 깍여서 나오더라구. 내가 고지서 맨날 꼼꼼하게 보거든.“ 하셨다.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두 축의 권력관계가 있다. 한 축은 요양보호사와 서비스이용자 어르신, 그리고 다른 한 축은 구술자와 제안자/청자/기술자이다. 김미숙 어르신은 요양보호사에 대한 무리한 업무요구로 인한 갈등으로 지나치게 자주 요양보호사 교체 요구를 하시는 분이셨다. 요양보호사를 파출부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셨고, 하여 자신이 파출부하던 기억을 자주 이야기하시며 무리한 요구들을 하셨었다.

    요양보호사가 할머니를 돌보는 자료사진(본문과 관계 없음)

    현재 노인장기요양제도는 어르신의 서비스 선택권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요양보호사 교체요구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노동자 당일해고라는 불안정노동의 문제이기도 하고 두 주체 간의 지나친 불평등의 원인이기도 하다. 나 역시 두 달의 방문요양 과정에서 과도한 부당업무 요구에 대해 다른 이유를 대고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할지, 싸움이 되더라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할 수 있다면 토론^^이라도 해볼지 등을 결정해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었다.

    요금감면의 건이나 여타의 돌봄 과정(단순 업무 보다는 노인복지 관련 지역 자원을 연결한다든가 하는 복지적 돌봄)에서 갈등없이 다른 요양보호사들에 비해 상당히 평등한 권력관계를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달 동안의 어르신과의 대화를 통해 이후 구술사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나는, 갈등없이 헤어지는 타협안[개인적 사정으로 더 하기 어렵다고 설명드림]을 선택했고, 이는 이후 구술사 제안 과정에서 아주 유효하게 작용했다. 어르신(구술자)은 나(제안자/청자/기술자)를 ‘펜대를 굴릴만한 아까운 요양보호사’로 기억하고 있었고, 구술사작업과 책출판 등을 제안하자 대번에 “댁은 국문과 대학을 나온거유?”라는 질문을 하셔서, 보통의 요양보호사들에게서 어르신이 예상하는 것과는 다를 나의 학력[외람되지만 이를 통해 일정한 권위가 인정될]을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고, 이는 나에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미숙) 근데 나 같은 사람 이야기가 머 쓸데가 있다고 글로 쓰겠다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자식 안굶길려고 여자 혼자서 아둥바둥 하다가 겨우 목사 만든 거 밖에 없는 인생인데…. 스물 여섯에 아들하나 낳구 끝이었거든. 남편이라구 같이 살자마자 부터 바람나구 애편[아편]하구, 허구헌날 속썩이다가 자살해 뻐렸어. 스물여섯에 애를 낳았는데 얼마 안있다 남편이 죽은 거지. 전쟁 때 피난갔다 와보니까 약먹구 죽었드러구.

    * 할머니는 삶의 중간을 뚝 터뜨리시며, 당장 구술을 시작해버리셨다. 남편의 죽음부터 터뜨리시는 게 흥미로왔다.

    (필자) 잘 죽었죠~. 그 양반한테야 어떨랑가 몰라도 어머니로 치면 그 때라도 그 서방이 죽어 준 게 더없이 고마운 거지요. 더 살았으면 어머니 고생만 얼마나 더 많았겠어요. 그런 서방 일찍 죽어준 덕에 어머니가 독립적으로 헤쳐 나오고 산거잖아. 고생이야 많았다 하더라도 남자 하나한테 묶이지 않고, 어머니 나름대로 생각과 판단대로 결정하면서 사신 거잖아

    (김미숙) 근데 내가 여지껏 다른 사람에게 내 속내 털어놓고 길게 얘기 해본 적이 없어. 그럴 만큼 친하게 지낸 사람도 없구, 그런 이야기 물은 사람도 없었어. 자식 손주 붙잡아 놓고 할 만큼 잘난 이야기도 아니고, 걔네한테는 오히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많구.

    (필자) 그렇겠죠. 특히 어머니는 어린 처녀 적에 홀홀단신 혼자 월남하신 거니, 이 곳 이남에는 기댈 사람도 친한 친구도 없으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묻어 놓은 기억도 아픔도 한도 한바탕 털어 놓으시라는 거에요. 어머니 기억력이야 정말 끝내주시잖아요. 아직 어머니가 그렇게 잘 기억하고 계실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에요. 그렇게 털어 이야기를 하시다보면 혹 미움도 한도 조금씩은 옅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어머니 살아온 삶이 어머니 자신에게 정리가 될 수 있잖아요. 잘 살고 못살고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어머니가 스스로에게, 나는 이렇게 살다, 이제는 거의 다 살고 갈 때가 됐구나…..하는 편안한 마음이 생길 거라구요.

    우선 이야기를 해주시면서는 가능하면 기억나는 그대로 또 시간 순서대로 해주시는 게 좋아요. 그리고 제가 책으로 만들 때에는 남들이 어르신인지 알아보지 않게 쓸 거에요. 그러니까 이 책 나가고 나면 누가 나 살아온 걸 알고 트집을 잡는다든가 손가락질을 한다든가 그런 거 걱정하실 게 없는 거지요. 그저 살아오면서 아직 마음에 남아있는 미움 아픔 한 그런 거, 이번 기회에 다 풀어놓으신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하시면 돼요. 그 이야기 통해 후대 사람들이 우리 시대 할머니의 삶을 거울삼아 어떻게 현재를 살아갈 지 생각해보게 하는 거죠. 날짜는 아무 때나 좋으셔요?

    (김미숙) 낮엔 나두 복지관도 가고 산책도 나가구 해서 바쁘고, 저녁이면 가는 데가 없어. 일요일에는 교회 가야 하니 안되구, 오늘이 수요일인데 오늘 저녁부터 할까?

    (필자) 어르신 저녁식사 일찍 하시니까, 7시면 되겠네요. 저도 저녁먹고 올게요. 저도 집이 걸어서 10분 밖에 안걸리니 정말 잘됐네요.

    가능하면 살아온 시간순서대로, 최대한 어렸을 때 기억부터 이야기를 풀어 보자구요. 어르신도 저 오기 전에 생각나시는 대로 메모도 하셔봐요. 어르신 메모 잘하시잖아. 뒤로 갔다 앞으로 돌아가고 해도 좋은데, 가능하면 시간 순서대로 얘기하는 게 어르신 기억 풀어내시는 데도 좋을 거 같아요. 귀한 이야기, 잘난 이야기 그런 거 아닌 게 더 좋은 거에요. 저는 부자나 잘난 사람들은 관심 없고,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역경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온 사람들, 특히 할머니들 이야기를 모으는 거거든요.

    * 이렇게 해서 평양 할머니와의 구술 작업은 생각보다 쉽게 풀려나갔다. 할머니는 혹 놓칠세라 미리 메모까지 해놓으시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김미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할 정도로 자신의 생애사의 구절구절을 현장감있게 풀어나갔다. 기억력도 탁월하여 내용자체가 풍성하기도 했다. 현재 나이 만여든 여덟인 걸으로는 기억력이나 셈 등이 아주 정확한 분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년수나 금액 평수 및 삶의 과정 순서(특히 미군부대 인근 삶의 구술 부분) 등에 대해서는 상당정도 혼돈이 있으신 듯 하다. 본 구술작업의 성격상, 정확한 수치나 순서 등을 구태여 여러번 질문하여 확인하려하지 않고 진행하였다)

    할머니는 1925년 생으로 2013년 현재 만 여든여덟이시다. 167cm정도의 여성 노인으로는 훤칠한 키에 몸무게는 딱 52kg. 날씬한 몸매는 할머니의 자랑거리이시다. 가게와 전세 준 방이 딸린 조그마한 자택에 혼자살고 계신다. 왼팔 마비의 장애가 있으시고, 건망증세가 좀 심하달 정도로 최근 일을 잊으시는 것과 공간인지능력에 초기 치매증세가 있으시다. 자손은 목사인 외아들과 며느리, 갓 20세가 된 손주가 있다.

    유년시절 / 교회 야학 / 첫사랑

    * 평양 할머니의 첫 구술은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자신의 직장 이야기부터였다. “평양 출신”이라는 공간적 다름이 큰 원인으로 여겨진다.

    (김미숙) 내가 열네살(1938년) 때부터 전매국 다니면서 돈 벌기 시작했어. 그 전 기억은, 7살 때부터 교회댕기구 그러다가 열 살부터 교회에서 하는 야학두 댕기구 했지.

    * 고향은 평양시 대신동(현재 평양시 동대원구역 대신동) 33번지. 1925년 1월 24일 생.

    (김미숙) 삼남매의 막내야. 오빠는 열세살 위, 언니는 여섯 살위로, 나랑 차이가 컸지. 중간 중간에 많이 죽어서 그래. 옛날에는 반타작도 힘들었잖아. 우리도 아마 넷이 죽었다는 거 같아. 자식이 많이 죽고 셋 빡에 안남아서 그랬는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야단도 별로 안맞고 컸어. 나 뿐 아니라 언니하구 오빠한테두 그랬어.

    엄마하구 언니는 집에서 살림하구, 아버지는 전기회사, 오빠는 인쇄소 댕겼지. 나두 열네살부터 직장다니구 해서 다섯 중에 셋이 벌고 공짜로 먹는 사람은 둘 뿐이니까, 먹고 입는 데 저기하진 않았어.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평양 시내래서 농사 그런 거는 없었어. 여기로 치면 서울 청량리 쯤 되는 데야. 근처에도 농사짓는 사람은 없고, 마당에 텃밭 정도를 짓는 사람들은 있었는데, 우리는 안했어.

    25년생이니까 21살에 해방이 된 거지. 열네살부터 해방될 때까지 거의 계속 직장을 다닌거야. 내가 쉬는 성격이 아니거든.

    일곱 살부터 교회를 댕겼는데 그 교회에서 밤에 야학을 가르켰거든. 거기를 3년이 거의 다 되게 다녔지. 3학년 3학기를 다니다 졸업을 석달 앞두고 때려쳤어. 한 학년이 3학기구 그걸 삼년을 다 다니면 졸업이거든.

    근데 끝 학기에서 한문이 너무 많아서 싫은 거야. 너무너무 싫어서 도저히 못 다니겠는 거지. 그 전까지는 그래두 재미났었는데 한문이 너무 어려워지니까, 공부가 너무너무 하기 싫은 거야. 한문쓰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숙제도 밤나 안해가구 하니까 매 맞는 거지 머.

    한문이랑 일본어랑 한 판씩 써오라 그러면 나는 일본어만 한판 써가. 두 배로 맞기는 싫으니까. 일본어는 쉬웠거든. 근데 한문은 너무 어려워서 못쓰겠어. 일반 학교는 안가봤어. 거기 삼년 졸업 맡으믄 요새로 치면 중학교를 가는 거야. 야학이 요새 초등학교 역할을 하는 거지. 근데 졸업 3개월 앞두고 그만 둔거지. 그때가 열세 살 즈음 됐겠지.

    야학 댕기기 전 기억은 별로 없어. 어떻게 하다가 집을 잃어버려서 대동강 주변까지 가서 거기를 왔다갔다 한 기억이 나. 세 살이나 네 살 때 쯤일거야. 어쩌다가 길을 잃었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찾았는지는 기억이 없어. 그냥 대동강 주변을 왔다갔다 한 거만 기억나. 아장거리는 애기 걸음이 멀리 간다구 하잖아. 아마 어른들이 잠깐 바쁜 사이에 어떻게 혼자 쫄래쫄래 간다는 게 대동강까지 갔었나봐.

    30년대 대동강의 나룻배

    대동강이 아주 크지. 어릴 때 그거로야 머 바다 같지. 옛날에 거기에 빠져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대동강 저 짝으로 올라가면 능라도 다리라구 있거던. 사람들이 많이 자살하고 한다는 말을 들었어.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랬는가, 사랑 때문에 그랬는가는 몰라도, 많이 자살을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구, 그 능라도 다리가. 장마 때면 대동강 물이 많이 뿔치만, 물난리 나서 구경하고 한 기억은 없어.

    우리 집에서 나 혼자만 교회 대녔어. 그냥 일곱 살에 내 발로 찾아간 거야. 아마 교회 누군가가 가자 그랬겠지. 그르다가 그 교회에서 야학도 가르치니까 열 살 때부터 그걸 다닌 거지. 등록금이라구 안그러구 회비라 그랬어, 그 교회서는. 십전이면 그 시절에 큰돈인데, 삼년을 다달이 꼬박꼬박 십전씩을 낸 거야. 내가 그걸 엄마한테 고맙게 생각해. 십전이면 큰돈인 데 그걸 엄마가 내 준거지. 열살짜리가 아버지 월급날 그런 거 모르자나. 한 달 끝나갈 때 언제쯤이면 엄마가 알려줘.

    “너희 아버지 오늘 월급날이다. 가서 십전 달래라.”

    아버지가 돈을 엄마한테 다 맡기는 게 아니니까, 일부러 아버지한테 야학 회비를 따로 타라는 거지. 우리 아버지도 나모냥 뎅기는 데가 딱 하나 빡에 없어. 집에 오면 찾아가는 친구네가 말야. 그 집을 찾아가서 십전 달라고 말해도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해, 친구랑 노느라고. 그러면 내가 그 집 바깥에 신발깔구 앉아서 졸르는 거야, 10전 달라고. 한 시간도 그만 두 시간도 그만 눌러앉아서 떼를 쓰는 거야, 십전 나올 때까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머 한번 한다 그러면 그걸 하고 마는 성격이잖아. 돈 나올 때까지 그러고 있는 거지.

    그러면 결국 아버지가 나와. 우리 어머니한테 매도 안맞었고, 아버지한테는 더군다나 ‘이놈의 기집애‘ 하는 욕 한번을 안듣고 컸어. 결국은 아버지가 나와서 첨엔 동전이나 서너개 주지. 주면은 내가 그걸 대문 밖에다 던져버려. 동전이 아니라 십전 달라는 거지. 그럼 우리 아버지가 그걸 찾아와야 십전을 준다고 그래. 내가 찾아오긴 멀 찾아? 안찾아오고 계속 떼를 쓰는 거야, 십전 달라고. 결국 아버지가 같이 가서 찾아오자고 해서, 같이 가서 찾는 거지. 그러고 나면 아버지가 십전하고 그 동전하고를 주는 거야.

    십전은 어머니 갖다 주면 어머니가 교회에 회비 내고, 동전은 사탕 사먹고 그랬어. 내 고집이 맨날 아버지를 이겼던 거지. 우리 아버지도 의례 질 줄 알면서도 십전 줄 때마다 일부러 맨날 그러는 거야.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고, 그냥 재미로 그랬는가봐. 떼쓴다고, 동전 내버린다고, 야단도 안쳤거든. 막내라고 나를 아버지가 더 이뻐했어, 언니보다도.

    부모가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는 게 아니더라구. 우리 어머니는 언니 편, 아버지는 내 편, 이런 거야 항상. 우리 언니하구 나하구 육년 찬데, 둘이 싸우면 엄마는 언니한테 대든다고 나 야단치고, 아버지는 쪼그만 동생이 멀 안다구 싸우냐고 언니 야단치고, 맨날 그랬어. 아버지가 나를 많이 귀여워했지.

    야학은 저녁 여섯시나 일곱시에 시작해서 네 시간을 해. 첫 시간은 무조건 예배구, 다음이 국어. 옛날엔 국어가 일본어야. 그 다음 시간인 선어가 조선어. 그리구 산수. 이렇게 네 가지 네 시간을 숭실학교 학생들이 가르쳐 주는 거지.

    1921년 숭실학당 모습(네이버 숭실학당 자료사진)

    그 시절에 숭실학교 학생이면 대단한 거야. 지금 중학생마냥 어린 게 아니라 나이도 있고, 그때는 지금처럼 모두 학교를 다니던 때가 아니어서 중학교 학생이면 공부를 많이 하는 거지. 처음에는 숭실학교(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Baird,W.M.)가 평양에 설립한 미션계의 교육기관. 평양에서 사학의 명문으로 많은 선각자를 길러냈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숭실학교가는 일제말 당국의 교육 지침을 따르지 않다가 결국 민족의 설움 안은 채 1938년 폐교됨.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숭실 관계자들은 전부 남하하여 서울에서 모교를 재건함) 학생들이 야학 선생을 하다가 나중에 그 학생들이 안오고 교회집사들이 하게 되니까, 여엉 가르치는 수준도 그렇고 애들 다루는 수준도 너무 떨어져 가지구 재미가 없어졌어. 한문도 어렵지만 숭실학교 학생들이 선생 그만두게 되면서, 내가 학교 다니는 걸 재미없어 한거야.

    구구단 숙제를 숭실학교 학생들이 가르칠 때, 내가 잘해 갔나봐. 그걸 일본말로 다 외워서 아직도 줄줄이 기억하고 써먹고 있거든. 지금도 요 뒤 복지관(할머니 집 바로 뒤에 구립 노인복지관이 있다.) 수학반을 다니면서 한글말로 구구단을 다시 외웠는데 막상 쓸데는 일본말 기억으로 셈이 나와. 다른 것도 결국 그때 교육받은 걸 내가 평생 써먹구 살은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고맙다는 거야. 언니는 머 학교는 전혀 안다녔어.

    오빠는 한참 위니까 하늘천 따지 하는 그거 댕겼어, 서당. 엄마가 해준 이야긴데, 하루는 오빠가 밥을 많이 싸달래더래. ‘점심밥을 많이 안먹는데 머하러 많이 싸달래나?’ 해서 우리 엄마가 가만가만 가봤대. 그 서당에 닭들이 병아리들을 많이 까놨는데, 그게 이쁘고 귀엽잖아. 우린 농사고 닭키우는 거고 그런 거 없었으니까 그 병아리들이 오빠 보기에 신기하고 이뻐 보였겠지. 병아리 열댓마리가 애미 닭을 졸졸졸 쫓아다니는 거를 보구는 점심밥을 많이 싸달래서 그 밥을 병아리들한테 주더래는거야.

    어머니가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면서 대통령 위하듯 했어. 울 엄마는 일년에 돼지 두 마리를 두 번을 키워 팔아서, 오빠 옷을 해 입혔어. 아마 오빠 인쇄소 월급보다 엄마가 해 입힌 옷값이 더 많았을거야. 그래도 서당 말구 학교는 안보냈어. 아마 공부를 별루 저기하게 생각했던가봐. <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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