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총선 준비와 안식년
    [아빠의 현대사-51]노동자정치 염원으로 최선 다한 수많은 조합원들의 열정
        2013년 01월 29일 05: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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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수년간 쏟아온 민주노총의 조직적 노력은 진보정치를 향한 소중한 성과들을 모아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실천해야할 많은 것들은 결정사항으로만 남아있을 뿐 조합원 속에서 힘 있게 조직되고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사업은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사업을 담당하는 일부 간부의 몫으로 머물러 있으며 정치적 실천과 투쟁, 그것을 담보할 실천 주체 또한 미약한 실정이다.

    한편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현안투쟁에서도 확인되듯이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일부 기대마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고 있으며,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또다시 정치 불신과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정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노동자의 정치적 힘, 정치적 각성과 단결뿐임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고 조직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치적 과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조직적 실천을 결의해야 한다.” (민주노총 ‘2004년 4.15 총선방침’ 중에서)

    노동자 정치의 명암

    처음 경험해보는 진보정당의 길은 매우 힘들었다. 이상했다. 평소엔 노동자 정치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당선이 된 후엔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내가 모르는 숱한 유혹의 손길이 정치에는 있는 걸까?

    대덕 연구단지에는 우리 연맹 산하 전국과학기술노조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공연구노조로 명칭을 바꾼 조합원들이 모두 유성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몰려 살고 있다. 과학기술노조는 1995년부터 지방의회에 후보를 내어 당선을 시켜왔다. 그즈음 유성구 의회는 8명이었는데 항상 3명은 우리 조합원이었다.

    그러나 이후 과정에서 당선되어 활동하던 4명 중 3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해야 했다. 다음 당선을 위해 당시 그 지역에서 유력한 정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당을 기웃거리거나 구의회 의장이 되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는 사람, 뇌물 등 비리에 연관된 사람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나왔다.

    선거 때마다 내려가서 한 달 이상씩이나 자취까지 하면서 선거운동을 지원했던 나로서는 허탈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진보정당 운동은 다시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냉소만큼 무서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지금은 유성구 의회에 한 명의 조합원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경험은 후보를 선출할 때 신중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경험을 주었다. 물론 사람 속이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후보 발굴부터 추천까지 그 사람이 자신의 명예욕과 권력욕심이 아니라 정말 노동자 정치를 위해 헌신할 사람인지를 심사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는 더 신중해 졌다.

    민주노동당은 대통령 선거 이후 성장세에 있었다. 2003년 2월 현재 민주노동당은 227개 지역구 중 105개 지구당이 건설되어 있었으며,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30여 개 이상의 선거구에서 지구당 창당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03년 6월 현재 민주노동당 당원은 3만여 명이었다. 그 중 민주노총 조합원은 13,550명으로 43.03%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3천명 이상이 공공연맹 조합원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러한 당 조직의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보완되어야 할 여러 가지 점에 대한 지적들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자체 분석을 통해 ‘당원들의 당 활동 참여 부족’ ‘체계적인 당원 교육시스템의 부재’ ‘지구당 정치활동 패턴의 미정착’ ‘재정구조의 취약성’, ‘인터넷 영역에서의 당 활동의 부진’ 등 질적인 측면에서는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4.1점 차이로 연맹 후보가 안 된 국회의원 후

    이런 조건에서 2004년 17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연맹위원장은 이승원 위원장이었다. 아마도 은지 네가 기억을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한내’라는 노동자 역사를 기록하고 각종 사료를 정리하는 사업을 주로 하고 있다. 정치위원장은 이영원 위원장이 맡았다. 우연히도 이름의 가운데 글자만 달랐다.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이0원’이 다 해먹는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공공연맹 정치위원회는 1년전인 2003년 1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한다. 대통령 선거 평가와 동시에 총선 기획단을 준비한다. 이영원 정치위원장의 장점은 친화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위원회로 잘 모였다. 나는 정치국장이었다. 우리 임무는 연맹 정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출마할 연맹 후보를 발굴하고, 이들을 심사할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노동당과 함께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것이었다.

    연맹 총선후보에 대한 심사기준은 각종 의결기구를 거쳐 각 항목에 대한 평가를 통해 평균 8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했다. 평가항목은 “노동조합 활동 전체, 민주노동당 활동전체, 선거 종합계획, 후보 자질” 등 크게 4가지로 구분하되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했다. 심사위원들에게는 미리 논의를 통해 정해진 질문서를 전달했다. 내용은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이번에 국회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는 데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활동해야 한다고 보는지? 또 당직과 공직을 분리하자, 비례대표의 연임을 금지하자는 등의 말들이 나오는 데 이에 대한 생각은?”

    “조합원 당원들이 당 활동에 적극 결합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게 현실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노동자들은 당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동자가 추구해야 할 현 시기의 이념적 지향점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이를 위해 이번 총선에서 무엇을 가장 크게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연맹 후보, 민주노총 후보가 됨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무엇이 후보 선정의 가장 큰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지?”

    “과거에도 연맹 후보 혹은 진보정당의 후보였다가 배신하는 경우가 있는 데 이에 대한 조직적인 대안은?”

    “노무현 정권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장 배경은?”

    “연맹의 정치방침과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맹과 민주노총이 주력해야 할 정치사업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고 있는 데 이에 대한 대안과 이번 총선에서는 어떻게 이를 쟁점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지?” 등등 20여개 조항이나 되었다. 후보자들은 답변을 하느라 땀깨나 빼야 했다.

    2004년 당시 공공연맹 내부 국회의원 후보 공청회 후 사진

    이런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연맹 후보를 선출했다. 총 13명이 심사를 받았는데 그 중 서울지하철 조합원 출신 한 명이 이 평균 점수가 75.9로 나왔다. 당연히 80점 이상이라는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탈락시켰다. 그 사람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노동자들의 헌신과 10명의 국회의원

    정치위원회는 [2004년 17대 총선투쟁 종합지침서- 총선의 모든 것, A에서 Z까지]라는 500쪽이 넘는 책자를 준비했다. 교안과 선전물 내용, 현수막 문구는 심지어는 참고할 만한 만화도 넣었다. 선거운동의 의미와 출마자 명단, 민주노동당 공약 등을 모두 포함시켰다.

    그 책자만 보면 단위 노조에서 모든 것을 알고, 따라할 수 있게 한 셈이다. 또 총선을 위해 단위노조의 파견을 받고, 조합원 교육과 당원 가입운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우리 후보와 민주노동당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도 시작했다. 4월 2일 현재 1억 4천 2백만원 이상 모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5천원씩 낸 것으로 보면 무려 28,0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동참한 셈이었다. 이것은 연맹에 낸 것이기 때문에 실제 단위노조와 지역에서 활동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했을 것이다.

    이 돈으로 우리 후보에 대한 선거 기탁금 일부를 지원하고, 민주노동당에도 일부를 줄 수 있었다. 선거 후 각 단위노조 차원에서의 총선 실천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노조의 규모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17대 국회에 10명의 국회의원을 입성시킬 수 있었다. 당선된 사람들도 물론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로지 노동자 정치에 대한 염원 하나만을 가지고 묵묵히 최선을 다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 그 열정들이 새삼 그립다. 지금은 그 열 명 중 단 한명도 노동자 정치의 길에 남아있지 않다. 역사란 그런 걸까?

    * 안식년, 돌아보지 못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너 꼴통이지?” “나 꼴통 아냐. 그지 엄마??” 거꾸로 묻는다.

    “넌 엄마 닮아서 꼴통이야.” “아냐. 아빠가 꼴통이야”

    “왜?” “아빤 맨 날 술 먹잖아. 술 먹으면 꼴통이야!” 졌다.

    밤 11시 뉴스를 보는 데 은수가 왔다.

    “교육방송 볼래!” “안 돼. 텔레비전 많이 보면 바보 되잖어.”

    언니인 너를 겨냥해서 항상 자기 입으로 하는 얘기다.

    “아냐. 천사 돼” “천사가 아니라 그땐 천재라고 하는 거야”

    “천재 아냐. 천사야” 계속 우긴다.

    “천사는 하늘에 살아” “아냐! 천사는 천사 집에 살아!” 다시 졌다.

    당시 다섯 살이 된 네 동생 은수와 나눈 얘기들이다. 너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연맹에 들어간 지 꼭 10년만이었다. 감옥에 간 때부터 따지면 20년만에 운동과 거리를 일정정도 거리를 둔 셈이었다.

    안식년이라고 아니? 교수나 목사들에게만 있는 안식년이 우리 연맹에도 있었다. 7년을 일하면 6개월을 쉴 수 있었으니 ‘안식월’이라고 해야 정확하겠다. 모든 제도는 처음 도입할 때 수많은 반대에 부딪친다. 여성할당제를 도입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안식년 역시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현장에서 20년을 일한 조합원들도 그런 게 없는 데 민주노총에서 그런 걸 두면 말 나온다.” “내가 노가다 생활 20년을 넘게 한 건설 노동자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데 조합원들이 이해하겠냐?” “끽해야 10년 일한 경우 일주일 정도의 휴가를 주는 사업장이 있긴 하다. 1년은 너무 길다.”

    2000년인가 종로 성당으로 기억된다. 민주노총 중집위 수련회를 하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민주노총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후배와 동료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제안했던 것이 난항에 부딪쳤다. 사실 우리와 같은 상근실무자들은 뒤를 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었다. 감옥에 갇히거나 아파야 겨우 쉴 수 있었다. 주로 저녁에 퇴근한 사람들을 만나고, 주말에는 집회가 많았다. 또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찬성한 사람들도 많았다. “맨 날 조합원 핑계를 댈 거면 월급을 그만큼 주든지, 아니면 조합원들이 받고 있는 복지 혜택을 주든지 하자.” “상근자들이 결국 우리 조직을 지키는 사람들 아니냐? 기업들도 사람들에게 투자를 하는 데 그 정도도 못하냐?”라는 얘기가 통했다.

    사실 우리 연맹만 하더라도 지난 9년동안 임금이 동결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종합하여 2000년 11월 공공연맹발전특별위원회는 교육휴가와 안식년(월)도입을 제안하는 활동보고서를 채택한다. 처음에는 10년 일하면 1년의 안식년을 주기로 했던 것을 7년에 6개월로 수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민주노총 등 몇몇 조직에서 시행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말이 많은 제도다. 우리 연맹에서도 다시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그들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채용된 상근자들이 받는 처우는 조직마다 달랐다. 시대와 상황이 부른다면 득에 상관없이 일을 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조직은 적었다.

    집행부가 바뀌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전원해고하기도 했다. 사무금융연맹에서 2004년 8월 김금숙 여성국장 등 3명을 해고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물론 그 이전 대학노조에서도 그랬었다. 건설연맹에서는 채용된 상근자에게는 국장이라는 지위를 주지 않기도 했다.

    더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복사나 커피 등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 정도로 대하기도 했다. 그런 조건에서 선뜻 안식년을 만들고 이를 관철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튼 이 제도 덕분에 운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너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이 많아서 오랜만에 처음으로 너희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동네사람들과도 만나고, 집에 와 계셨던 어머니 간호도 좀 하고, 네 엄마와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전북 남원에 있는 민주노동당 연수원에도 함께 가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마루에다 텐트를 치니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북경까지 따라온 공안기관원들

    휴가 막바지에 3박 4일로 북경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다녀왔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네 엄마, 그것도 내가 공장에 다니는 중에 결혼하는 바람에 1박 2일 수안보 온천으로 신혼여행 다녀온 것이 전부인 우리가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한 셈이다. 여행은 좋았다. 현지 가이드가 한 말처럼 중국이 너무 큰 나라여서 ‘관광’이 아니라 ‘발광’이랄 정도로 많이 걸었지만 말이다.

    함께 한 여행객 중에 젊은 친구가 둘 있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데 여름휴가를 못가서 사장님이 보내 주었다고 했다. 함께 간단하게 술을 마셨다. 다리가 아프고, 은수를 안고 다녔더니 팔이 아파서 파스를 붙이고 밤에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친구들이 이상했다. 한번 이상하게 보니 계속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둘은 우리 가족 주변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물어보니 그 친구들 얘기가 앞뒤가 안 맞는 게 많았다. 한번은 내가 전날 몇 시에 들어왔는지 묻기도 했다. 첨엔 그냥 못들은 척 했더니 다시 물어보았다.

    네 엄마와 얘기를 나눈 이후에 우리는 공안기관에서 보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도 우리를 한 번에 알아보지만 우리 역시 그들을 알아본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국가보안법으로 걸린 과거가 있는 사람이 온 가족을 데리고 나왔으니 혹시 우리가 북한 등으로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해 볼 수도 있었겠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재미있을 때가 많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어떤 보고를 했을까? 아무튼 그렇게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을 보내고, 운동전체를 ‘떨어져서’ 볼 수 있었다. 투쟁의 한가운데서 항상 투쟁만 하다가 방관자로서, 구경자로서 객관적으로 지켜 볼 수 있었다. 휴가를 끝내면서 “아무리 바빠도 ‘여유’를 잃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물론 이후를 보면 그 주문의 효력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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